소설리스트

이그레트-176화 (17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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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약속

해동의 남쪽령을 침략한 흑현무 헤로드와 반대로 흑주작 이브는 북쪽에 있는 수도 호성의 상공에 나타났다.

공습의 시작은 하늘을 뒤덮는 새 떼였다. 까마귀, 까치, 비둘기, 참새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부터 시작해서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 희귀한 새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새들은 마치 잘 훈련된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평소에는 그냥 손짓만으로도 쫓아낼 수 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떼 지어 날아다니며 기와를 부수고 불붙은 나뭇가지를 물어와 던졌다. 검은 하늘에서 불비가 쏟아져 내려오는 듯한 장관이 펼쳐졌다.

펄럭!

불붙은 성벽 위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사뿐히 내려섰다. 무릎을 덮은 풍성한 치맛단이 뜨거운 바람에 팔락거렸다.

‘수도를 불태우고 왕의 목을 베어라.’

주작에게 내려진 계약자의 명이었다.

“……그리하여 해동은.”

주작은 아주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훅 하고 불길이 회오리처럼 몰려들었다.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불이 사방으로 폭사하여 근처의 나무며 목재건물에 옮겨 붙었다.

열기가 폭발하는 굉음과 새 울음소리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가운데 정작 주작의 목소리는 파묻혔다.

하지만 딱히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는 목적이 아니기에 주작은 불길 사이로 걸어가며 말문을 맺었다.

“천 년의 역사를 딛고 새롭게 태어나리라.”

나라의 수호신이 직접 이 나라를 불태운다.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장면이기에 사람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불타고 있는 집을 지키기 위해 물동이를 길어와 뿌리려던 한 소녀가 머리 위에서 사납게 날아든 까마귀를 보고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얏.”

소녀는 넘어진 채로 볼을 손으로 감쌌다. 날카로운 부리가 스치고 간 자리에서 길게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눈에 띄는 자는 전부 죽여.’

계약자의 명령을 떠올린 주작이 손안 가득 불길을 머금었다. 마침 소녀도 주작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작님……?”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가 장신구도 없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주작이 지닌 화염 날개를 확인한 소녀가 흐엉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

“왜 우릴 버리셨어요?”

멈칫!

주작의 손끝에서 당장 소녀를 삼킬 듯 이글거리던 화염구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주작은 멍한 눈동자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버…… 려?”

“저랑 엄마는 신수님들을 믿었어요. 오늘은 아니라도 내일, 올해가 아니라면 내년. 이번 시대가 아니라면 다음 시대라도 언젠가.”

소녀는 주저앉은 채 눈물과 핏물이 뒤섞인 더러운 얼굴로 주작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다시 우릴 지켜주러 오실 거라고.”

“지켜?”

“신수님들은, 훌쩍. 우리의 수호신이시잖아요.”

사실은 줄곧 지켜왔다.

계약은 하지 못했더라도 해동을 떠나지 않았으며 적은 힘이라도 최대한 활용하여 나라를 수호하고자 했다.

해동은 사방신수의 고향이자 소중한 둥지였다.

‘그래, 맞아.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의.’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 왔다. 내내 무표정하던 주작의 얼굴이 일순 찌푸려졌지만 소녀는 우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주작님. 혹시 사람들이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화가 나신 건가요? 안 그럴게요. 착한 일 많이 하고 살 테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도 착하게 살자고 얘기할 테니까. 네?”

“……없어.”

“주작님?”

화륵!

불길이 용암 분출하듯 허공으로 치솟았다. 소녀의 놀란 얼굴 위로 불 그림자가 환하게 비추었다.

“착해질 필요 없어. 난 너희에게 화난 게 아니니까.”

“……!”

주작의 답과 함께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오는 불길을 보며 소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생각했던 열기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냐아앙!

‘고양이 소리?’

의아함을 느끼고 눈을 뜬 소녀의 시야에 하얀색 새끼 호랑이가 들어왔다.

날렵한 몸동작으로 주작이 쏘아낸 불덩어리를 막아선 백호는 앞발로 이를 짓밟아 모닥불 끄듯이 콱 꺼뜨렸다.

「불장난이 좀 과하지 않다냥?」

주작은 백호를 보고도 아랑곳 않고 허공에 불새를 한 마리 만들어냈다. 불씨가 또 다른 불씨를 낳는 건 순식간이었다.

위협적으로 파닥이는 소리가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로 부지불식간에 증식하더니 경고도 없이 동시에 백호와 소녀에게로 쏘아져 갔다.

파앙!

그러나 이 역시도 꿀렁거리는 푸른 장막에 막혀 전부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공중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주작은 두 번째로 나타난 방해꾼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힘없는 야옹이 괴롭히면 동물학대다, 너.”

“……청, 룡.”

그리고 아주 잠깐 백호에게 머물렀던 눈길이 다시 가야에게로 되돌아갔다.

「왜 난 못 알아보는 거다냐?!」

백호가 울컥하여 소리쳤지만 주작은 꿋꿋하게 그를 무시했다.

긴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허공에 불쑥 나타난 가야는 주작이 서 있는 성벽 위로 가볍게 내려섰다. 두 신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잠시 침묵했다.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청룡 가야였다.

“그때 한 약속.”

“…….”

“지키러 왔어.”

주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가야를 바라보기만 했다.

타락한 흑주작이 되었어도 예전의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옛 동료를 본다고 해서 반갑다거나 동요가 일어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기억했다.

‘있잖아, 청룡.’

‘응.’

‘만일 우리 중에 누군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때 그녀는 흰색 저고리에 파란 치마, 머리엔 옥비녀를 꽂고 그네에 앉아 있었다.

두 손을 치마 위에 포개놓고 맑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주작은 작은 새처럼 웃었다.

‘우리 손으로 반드시 해방시켜 주자.’

‘해방?’

‘우리는 수호신수니까. 소중한 걸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아무 의미 없어.’

사령에게 잠식당한다면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여 채찍질 받는 노예나 다름없다.

사명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신수들은 자유의지를 잃고 폭주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다.

여기서 주작이 말했던 ‘해방’이란 죽음. 결국 서로의 손으로 끝을 내달라는 뜻이었다.

‘약속이야.’

씩씩하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던 주작은 이제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청룡 앞에 서 있었다.

불타는 성벽 위로 후끈한 열기가 아지랑이가 되어 울렁거렸다. 하늘을 까맣게 덮은 새들은 여전히 그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더 늘어나기까지 했다.

“나는…… ‘이브’.”

“그래. 이브 네가 현재 지키고 있는 건 뭔데?”

“아무것도.”

이브는 공허한 눈으로 가야를 마주보았다. 텅 빈 눈 안에 살의가 감돌기 시작한 건 그 순간이었다.

화아앗!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던 그녀는 불길에 휩싸여 거대한 주작 본체의 형상으로 돌아갔다.

불로 이루어져 타오르는 꼬리 깃이 길게 물결치듯 돌벽을 따라 흘러내렸다. 머리에서부터 몸통까지는 하얀 깃털이 뽀송뽀송 자라난 새였지만 그 외 날개라거나 꼬리 등은 전부 불길로 이루어져 있었다.

갑작스레 거대한 타오르는 새를 올려다보게 된 백호는 소녀의 앞을 막아선 채 입을 쩍 벌렸다.

「우씨, 반칙이다냥.」

「내 임무는 섬멸. 해동의 수도를 파괴하겠다.」

본체로 돌아간 주작은 인간의 언어 대신 정령의 언어를 사용했다.

사나운 선포를 듣고서도 청룡은 별달리 겁내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뜻으로 한숨을 푹 내쉰 뒤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나 이거 참. 무대를 마련하려면 일단 불부터 꺼야겠네.”

가야는 일단 기후를 조종해 강한 비구름을 불러왔다. 개미 떼처럼 우글거리는 새 무리 위로 진짜 먹구름이 순식간에 도래했다.

우릉! 하늘이 울며 비가 쏟아졌다. 날개가 젖은 새들이 더욱 시끄럽게 울음소리를 질러댔다.

「한갓지게 불이나 끄고 있을 때가 아니다냥!」

“엉? 하지만 주변에 막 불타고 있으면 신경 쓰이잖냐. 뜨거운 건 딱 질색이라.”

「지금 그런 게 문제냥?!」

속성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동물계 정령이 실제 싸우는 방식은 주로 육탄전이었다.

한쪽이 본체로 돌아간 이상 나머지 한쪽도 본체로 돌아가지 않으면 힘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백호가 한 차례 더 재촉하려던 순간 주작은 청룡의 변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곧장 날아들었다.

쿠쾅!

거대한 새의 공격을 받은 성벽이 그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으로 깨어지며 돌조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하아. 정말 성질 급하기는.”

훌쩍 뒤로 물러서 피하긴 했으나 찰나의 시간차를 두고 화염이 파도처럼 그를 덮쳐왔다.

간발의 차로 방어막을 형성해내 막은 후 청룡도 본격적인 전투를 위해 육신을 본체로 되돌렸다.

우드득, 우득!

「백호. 넌 가서 다친 사람들을 구해.」

「……그러려고 했다냥. 딱히 네가 시켜서 가는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라냥.」

「그래, 그래.」

파란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몸통이 꿈틀거렸다. 쥬다스 일행 중 블루와이번인 플루비가 본체로 돌아간다 해도 청룡만큼 커다랗게 자라지 않는다.

가야는 동방의 용중에서도 매우 거대하고 아름다운 육신을 가진 청룡이었다.

해동 사람들이 동방 용중 가장 최고봉이라 칭해지는 전설 속 황룡을 만난다 해도 청룡만큼 아름답다는 표현이 나오지는 않을 거라 입을 모을 정도였다.

「자, 그럼. 우리끼리 오붓하게 파티를 즐겨볼까?」

백호가 등을 돌려 후다닥 뛰기 시작하자 가야는 막기만 하던 태세를 전환하여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침내 거대한 두 신수가 충돌했다. 번쩍이는 번개 아래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쏟아졌다.

검은 연기와 그보다 더 짙은 먹구름, 순간순간 번뜩이는 번개와 천둥소리, 그 아래 불타다 만 마을과 다쳐 신음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간절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번개가 칠 때마다 거대한 용과 새의 형상이 그림자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한쪽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수호신에 대한 믿음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긴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한편, 현무의 기운을 읽어 남쪽령에 도착한 쥬다스 일행은 도달하자마자 소용돌이치는 검은 늪을 발견하고 잠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신수 현무의 힘입니까?”

“그런 모양이구나.”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처참했다.

땅을 뒤덮은 검은 늪은 점점 그 면적을 늘려 마치 강처럼 지상을 꿀렁꿀렁 흐르고 있었다. 생명이 있는 존재든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이든 관계없이 늪은 수면에 닿는 족족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분명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을 공간이 지금은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삭막한 늪지대로 변모해 버렸다.

“어후. 나라를 수호하는 신수라더니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삐잉.”

바이칼과 플루비가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늪을 향해 중얼거렸다.

무언가 돕고 싶어도 깔끔하게 검은 늪 아래로 잠겨 버린 마을을 다시 끄집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행은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대로 보이는 광경에 압도당한 채 서 있었다.

‘잠깐. 란이랑 코르토반은?’

문득 자주 같이 다니던 두 사람이 보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이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들을 찾을 수 없었다.

“…….”

세이지는 형에게 그 사실을 물으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쥬다스가 실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유가 있어 따로 그들을 해동 왕궁에 놓고 왔으리라 짐작한 세이지는 걱정스런 눈으로 북쪽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남쪽령에서 보는 하늘은 어두컴컴하기만 할 뿐이다. 워낙 거리가 멀어 수도의 상황이 어떤지는 짐작조차 어려웠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ㅎㅎ

벌써 5월의 시작이네요! 요즘 시간이 엄청 빨리가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ㄷㄷ 5월이라니... 2016년이 절반이나 지났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 ㅠㅠ;;

5월이라는 건.. 슬슬 2부완결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네요 ㅎㅎㅎ

출판사와의 사정 상 3부연재가 이어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최선을 다해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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