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77화 (17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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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약속

「현무는 이 근처에 있어.」

유니가 주변을 뱅글뱅글 선회하며 정보를 읽어왔다.

바람의 인도를 사용한다고 해서 너무 적의 코앞에 불쑥 나타나는 건 위험하다 판단했기에 현무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에단.”

“예.”

충성스런 기사단장은 주인의 부름에 즉각 응답했다.

“이곳에 있는 적은 사령에 잠식당한 현무뿐만이 아니다. 그를 부리는 사령술사도 같이 있을 게야.”

“사령술사라면, 말씀하셨던 ‘프리드 길리아노’입니까?”

“그래. ……잘 기억하는구나.”

에단은 순간이지만 사령술사의 이름을 언급할 때 쥬다스의 금안에 씁쓸한 빛이 스쳐 지나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역시 그자와 무언가 얽힌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단순히 정령에 의해 정보를 알아냈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쥬다스는 분명 그 프리드란 자를 사적으로 알고 있다.

여기까진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 짐작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그 짐작을 또다시 의문스럽게 느꼈다.

‘……이상하군. 전하께서 사상 최악이자 최강이라 불리는 제네럴급 사령술사와 얽힐 만한 일이 도대체 언제 있었던 거지?’

에단이 쥬다스를 알게 된 건 학원 루바흐에 갓 입학해서부터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고, 쥬다스는 막 12세가 된 어린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 후 쥬다스를 주군으로 섬기게 된 에단은 빠짐없이 그의 곁을 지켜왔다.

그 와중에 사령술사라는 위험한 존재를 만났다면 에단이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보안이 철저하고 다수의 학생이 공동생활을 하는 루바흐에 들어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령술사와 접점이 있었을 것 같진 않았다.

입학 전이라 추측하기엔 쥬다스의 신분이 황자였단 게 문제였다.

금기인 사령술을 몸에 익힌 자가 감히 황궁까지 들어와 당시 백치로 소문나 황위도 계승받지 못할 거라 소문이 파다한 쓸모없는 황자를 해치려 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그때인가.’

에단은 골몰히 머릿속을 뒤진 끝에 가까스로 어느 한 시점을 짚어냈다.

5년 전 투르케 사막이 사령술로 인해 얼어붙어 멸망했을 때. 그때 쥬다스는 홀로 일행과 떨어져 있다가 장기를 크게 상해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변을 당했다.

본인은 별일 아니라며 입을 다물어버렸지만 그 모습을 본 주변인들은 그가 아마도 사령술사를 만났던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를 주군으로 모시는 세 명의 최측근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프리드란 사령술사와 어떤 일이 있었기에.’

쥬다스가 실은 대현자의 환생이며 프리드 길리아노와는 전생의 악연으로 맺어진 사이라는 엄청난 사실까진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현무와 만날 수 있어. 하지만 조심해야 해. 네가 말했듯이 현무는 지금 혼자가 아니거든.」

유니는 녹색 기류가 은하수처럼 안내하고 있는 방향을 향해 기분 나쁘단 표정을 지었다.

「그 사령술사 녀석, 영 거슬린단 말이지…….」

「당장 가서 박살 내버리자요!」

토니의 단순한 대답에 유니는 양손을 교차시켜 휘휘 내저었다.

「가만 있어봐. 프리드란 녀석은 여벌의 목숨이 있을 거라구. 당장 박살 내는 게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

「저기 그럼, 아예 부활하지 못하게 막아버린다면요?」

슬쩍 끼어든 카니의 제안에 정령들은 일제히 ‘무슨 수로?’라는 눈빛을 보냈다.

카니는 다홍빛 눈망울을 깜빡이며 말을 덧붙였다.

「사령술사가 죽은 목숨을 부활시키려면 미리 재료를 준비해 놓는다잖아요? 거기엔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은 생명력도 필요할 테고.」

「그렇지. 문제는 그 재료를 어디에 어떤 식으로 봉인해 두었는지를 모른다는 거잖아.」

가뜩이나 어둠 속성인 사령술사가 작정하고 밀폐된 공간에 무언가를 봉인해 둔다면 아무리 수색에 능한 자연계 정령왕들이라 해도 완벽히 찾아내기 어려웠다.

게다가 육체 재구성에 필요한 재료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선 더욱 곤란하다.

이러한 유니의 지적에도 카니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

「으응, 그치만 모아둔 생명력을 전부 소진하게 만들어버리는 건 가능하잖아요.」

「생명력을?」

「사령술의 근원도 결국엔 생명력이니까요. 잘 자극해서 생명력을 전부 소진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사령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술사의 정신력을 통해 본연의 힘을 끌어내는 정령과 다르게 한 번 사령이 된 영체들은 살아 있는 것들이 가진 생명력을 흡수해야 힘이 생긴다.

사령술사에게 있어 생명력이 바닥난다는 건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예컨대 맹수 조련사는 맹수가 좋아하는 먹이를 상으로 주며 조건반사를 통해 놈들을 훈련시킨다.

하지만 아무리 훈련을 잘 시켜놓아도 조련사의 손에 먹이가 없다면 사나운 맹수는 그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

「인정하기 싫긴 하지만, 솔직히 프리드란 녀석도 제법 똑똑해. 그 영악한 녀석이 함부로 생명력을 막 소모할 리가 없다구. 분명 최후의 최후까지 여유분을 남겨놓고 행동할 거야.」

「아마도 그렇겠죠.」

카니는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처음부터 쉬운 방법이라 생각하고 의견을 제시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할래요? 이그레트.」

누가 뭐래도 결정권은 그에게 있다. 최근 정령들은 전생과 판이하게 달라지기 시작한 계약자의 감정을 느끼며 불안 반 기대 반으로 그를 지켜봐 왔다.

쥬다스는 과거와는 다르게 무언가를 욕심내기도 하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힘을 행사하기도 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억압하기보다 조금씩 작은 것부터 꺼내놓고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근래에는 슬픔이나 분노 같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까지 오롯하게 인정했다.

예전의 그를 알던 이가 본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느낄 정도였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어설프지만 조심스럽게, 그는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웠다.

‘그래. 중심. 결국 ‘나’와 ‘남’ 양쪽을 모두 알아야 잡을 수 있는 게 중심이지.’

그리고 오늘, 오래전에 배신의 상처를 안고 도망치기를 선택했던 대상을 다시 만나러 왔다.

“루니.”

그르릉-

바람을 따라가는 동안 잠자코 곁을 지키던 푸른 늑대가 낮게 목을 울렸다.

“더 이상 늪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줘. 부탁한다.”

자연계 물의 정령왕과 동물계 신수 현무가 서로 물을 지배하기 위한 싸움을 할 경우 결과적으로는 압도적으로 자연계가 승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정에 발생하는 거대한 파장이었다.

이미 사령으로 타락해 버린 흑현무는 일반적인 물이 아닌 검게 오염된 물을 생성해 내고 있다.

지금 남쪽령을 빠른 속도로 뒤덮고 있는 검은 늪이 바로 흑현무가 다루는 힘이다.

검은 늪은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찬 망자의 물이기 때문에 맞닿는 모든 생명을 삼키고 끌어들여 파멸시켰다.

이를 정화시키지 않고 억지로 개입해 물의 지배권을 빼앗아가게 되면 역으로 물에 깃든 죽음의 기운이 루니에게 스며들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사대정령을 전부 통솔해야 하는 쥬다스에게도 영향이 미치게 되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게 된다.

이를 어렵지 않게 예상한 쥬다스는 무리한 제압을 하는 대신 그 힘의 증식을 막는 선에서 정령을 움직였다.

오염된 물을 본래 성질로 되돌리는 건 사대정령 동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정신력을 소모한다. 그러고 나면 어쩌면 일시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그러니 물의 정화는 일단 큰 싸움이 끝난 뒤 할 일이었다.

우우우!

계약자의 소망을 전해 받은 루니는 곧장 목을 빼고 늑대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물의 힘이 개방되면서 스멀스멀 영역을 넓혀가고 있던 검은 늪 위로 매끈한 코팅이 깔리기 시작했다.

물의 기운을 느낀 흑현무가 무기력하게 질질 끌면서 가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포옹!

그의 얼굴 옆으로 동그라미 하나가 날아올라 뽁 하고 터졌다.

“……물거품.”

흑현무의 뒤편에서부터 해일처럼 밀려오는 맑은 기운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질척한 검은 늪 위로 투명한 물거품이 뒤덮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점점 앞으로 번져가던 늪은 물거품에 갇혀 더 이상 영역을 넓히지 못하게 됐다.

순식간에 풀어놓은 힘이 봉해진 흑현무 헤로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늪을 돌아보고 있던 현무의 앞쪽에서 예기치 못한 음성이 들려왔다.

「뭔가 뜻대로 잘 되지 않는 모양이군.」

“……!”

현무는 천천히 고개를 원상태로 되돌렸다. 그러자 우아한 자태로 앞길을 가로막은 푸른 늑대가 떡하니 시야에 들어왔다.

‘물의 왕.’

사방신수와 사대정령왕은 오래전 서로 안면식이 있었다.

물론 그걸 꼭 기억해서가 아니더라도 정령끼리는 본능적으로 서로의 기운과 계급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그게 너의 뜻은 아니겠지만. 현무.」

“나는…….”

현무는 무언가 적절히 표현할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잠시 입을 닫고 침묵했다. 그러다 다시 느릿느릿 말했다.

“주인의 뜻을 따르는 ‘헤로드’. 주인의 뜻은 곧 나의 뜻이니.”

물거품에 감싸인 늪은 멈춰 있었지만 그가 아예 힘을 다루지 못하게 된 건 아니었다.

현무의 발이 딛고 있는 땅이 돌연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물이 온천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그를 감쌌다.

“이 뜻에 당신이 간섭할 권리는 없다. 물의 왕.”

「……이 나라의 수호신수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루니가 비킬 생각이 없어보이자 현무는 곧장 육신을 인간형에서 본체로 되돌렸다.

용이나 새 같은 명확한 동물의 형태를 취한 다른 신수와 달리 현무의 본체는 특정 동물로 판단하기 애매했다.

해동 사람들은 그를 거북이라 일컫는다. 그 이유는 현무가 등에 두른 단단한 등껍데기 탓이었다.

하지만 마치 말이나 사슴처럼 길고 무릎이 있는 네 개의 다리를 가졌고, 목은 흡사 뱀처럼 길었다. 꼬리도 마찬가지로 길었는데 꼬리 끝에 또 하나의 머리가 달려 있어 총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수였다.

「나 헤로드는.」

본체로 돌아간 현무는 마치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울렸다.

그보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은 루니가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자 현무는 뱀이 쉭쉭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인간을 수호하지 않는다!」

콰앙!

거대한 발굽이 루니가 서 있던 바닥을 찍어 눌렀다.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피해 루니가 가볍게 착지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루니는 날랜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며 물의 기운을 움직였다.

곧 검은 파도와 푸른 파도가 짐승의 아귀처럼 서로를 덮쳤다.

그렇게 루니가 현무의 발목을 묶어두는 사이 쥬다스는 그 근처 땅에서 주작과 현무의 새 주인과 조우하고 있었다.

“이런, 이런. 간만의 만남을 반가워하기엔 손님이 너무 많구만?”

생존자 하나 없이 온통 죽음의 기운에 휩쓸려 버린 마을에서 프리드는 어느 부잣집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불타거나 부서진 것도 아닌데 사람의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기와집이었다.

“설마 당신답지 않게 이런 일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 줄이야.”

여기서 짐이란 쥬다스가 함께 데려온 친위대를 칭하는 표현이었다. 뒤이어 조롱의 의미가 담긴 휘파람이 그들 사이를 할퀴고 지나갔다.

“다치지 않게 지켜줄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

“그들이 어찌 되든 당신한테는 아무 상관없으려나.”

쥬다스가 대꾸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자 프리드는 즐거운 눈으로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마루에 앉아 기다렸다는 듯 느긋하게 말을 건네는 그를 보며 쥬다스를 제외한 일행은 전부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조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바로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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