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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약속
“틀렸다. 전자도 후자도 아니야.”
“허어?”
애초에 그가 데려온 동료들은 짐이 아니었다.
쥬다스는 자신의 기사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자신이 있어서 데려온 것도, 다치든 말든 상관이 없어서 이 싸움에 관여케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적이자 옛 동료를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첫째 이유는 이들에게 너를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프리드는 대기 중의 떨림을 느끼고 비소를 지었다.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기운이 서서히 그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하물며 그냥 피부에 맞닿는 공기조차도 서늘하게 날이 서 따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두 번째는 너에게 이들을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사령술사를 비호하는 검은 장막이 숨을 압박해 오는 자연의 기운에 항거하여 아지랑이를 일으켰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흠?”
“등을 맡기기 위함이다.”
신뢰.
그건 전생의 자색 눈동자에서는 단 한 번도 발견한 적 없는 생소한 빛깔이었다.
프리드는 마루에 걸터앉은 채로 옛 동료의 맑은 금안에 담긴 신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곤 턱을 괸 채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거이거, 굉장한 믿음이군그래. 질투 날 정도야.”
스릉!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는 적을 둥글게 포위하듯 둘러싼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검이 당장에라도 목을 날리기 위해 번뜩였으며 마법사들의 발밑엔 마법진이 발동을 기다리며 웅웅거렸다. 흉흉한 분위기에도 프리드는 여유를 잃지 않고 낮게 큭큭 웃었다.
“날 죽이러 왔지?”
마치 ‘맥주나 한잔할래?’라고 물어보듯 간결한 어조였다.
“그럼 확실히 죽여.”
후웅!
주변으로 몰려든 녹색 바람에 당장에라도 그를 찢어발길 듯 거세게 요동쳤다.
쥬다스는 칼날 같은 바람을 손에 머금은 채 탄식했다.
“……너는 왜 항상.”
‘늘 이런 식으로 나를 시험하려 하느냐.’
그는 프리드가 오랫동안 자신을 시험해 왔음을 모르지 않았다. 채 어른이 되기 전부터 아이는 미묘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시작은 아주 소소한 반항이었다. 어미 새을 따르는 아기 새처럼 이그레트의 뒤만 따라다니던 아이가 처음으로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사춘기를 맞은 소년의 반항은 고작 식사를 거르거나 늦은 시간까지 밖을 돌아다녀 집에 들어오지 않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반항을 해보아도 그 대상에게선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다.
당시 이그레트는 아이들의 엇나감이나 비뚤어진 일탈행위를 벌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자비였으나 프리드가 느끼기엔 벽을 치고 방치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느낀 배신감을 복수하기라도 하듯 일부러 나쁜 짓을 과감히 저질렀는데도 절대 혼내지 않았다.
잘못을 해도 화내지 않는다. 그 사실은 아이들에게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어떤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프리드가 사람을 죽일 뻔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이 터진 날 이그레트는 현장에 나타나 사고를 무마시키고 손수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여전히 화는 내지 않았지만 그 뒤로도 인명이 걸린 일에는 나서서 그를 막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고.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건 싫으신 거야?’
그러자 프리드는 점점 오기가 들어 많은 일을 저질렀다. 어찌 보면 그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나 인내심을 시험한 것 같기도 했다.
“망설일 틈이 있나? 이러는 동안에도 이 나라는 망국의 길로 향해 가고 있다고.”
여전히 무방비한 자세로 앉아 자신의 죽음을 종용한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작태를 보면서 말없이 검을 겨누고 있던 에단이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뭔가 이상하다.’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불리한 상황에 저리도 태연할 수 없다. 주변엔 그가 부리는 사령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특별한 주술이나 수작질을 부린 흔적은 없었지만 이대로 가만 지켜보기도 영 찜찜했다.
“서두르는 게 좋을 텐데. 하나 알려줄까?”
에단이 상황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사이 프리드는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지금 해동 왕궁에 찾아간 손님은 주작만이 아니야.”
“……?”
“할더도 함께 보냈지. 아마 지금쯤 아수라장이 되었겠군. 과연 어느 쪽의 목이 떨어졌을지 기대되는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르륵 마룻바닥을 뚫고 시뻘건 화염이 치솟았다.
뜨거운 불길은 프리드의 주변을 감싼 검은 장막을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콰직!
살이 꿰뚫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양 어깨와 허벅다리를 뚫고 뾰족한 창이 박혔다.
땅의 정령이 만들어낸 단단한 금속 창이었다.
프리드는 마치 엄벌을 받는 죄수처럼 사지를 결박당했다.
“지금 네 숨을 끊어봤자 다른 육신으로 옮겨갈 뿐이겠지.”
쥬다스는 진심으로 그를 죽이러 왔다. 단순히 벌을 준다거나 막으러 온 게 아니었다. 사지를 결박하고 여분의 생명력을 전부 소진시킬 것이다.
다시 부활하지 못할 정도로 힘을 쓰게 만든 후 마지막 순간 확실히 그 숨통을 날린다면 그 질긴 생명도 거기서 끝이었다.
산 채로 말려 죽이는 고문이나 다름없는 처우였다. 채집된 곤충마냥 어깨와 다리를 꿰뚫린 채 축 늘어져 있던 프리드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설마하니 당신을 상대로 아무 준비도 없이 왔다고 생각했나?”
그우우우우-
여기저기서 사람이 통곡하는 것 같은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쥬다스는 힐끗 자신이 밟고 있던 땅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발을 옆으로 치우자 짓밟혀 있던 검은색 선이 보였다.
그 선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이어져 거대한 그림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육망성.’
악마의 별이라 불리는 육망성이 음울한 빛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흙 아래 숨겨져 있던 선이 점차 허공으로 떠오르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
현무와 대치 중이던 루니가 흠칫 놀라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이그레트!」
늘 차분한 모습을 보여 온 푸른 늑대답지 않은 급박함이었다.
루니가 곧장 몸을 돌려 계약자에게로 돌아가려던 순간 그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부웅!
「어딜.」
거대한 꼬리가 루니를 덮쳤다.
당황한 나머지 공격을 허용한 루니가 이를 피하지 못하고 제대로 직격당했다. 꼬리에 맞아 주르륵 뒤로 밀려난 푸른 늑대의 앞을 흑현무 헤로드가 가로막았다. 검게 물든 두 쌍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시비를 걸어놓고 먼저 빼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이 망할. 파충류가.」
크르르릉!
흙투성이가 된 채 일어선 루니가 살벌하게 목을 울렸다.
“어? 단장, 육망성이 마력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하늘로 솟아오른 육망성은 어디로 보나 사령술의 일종이었다.
마법진도 아니면서 마력을 흡수해대는 통에 바이칼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육망성의 크기는 그들이 올려다보는 하늘을 전부 뒤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정체를 알 수 있나?”
“아뇨,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마력을 흡수한다는 건 무언가 발동을 준비한다는 뜻인데요.”
바이칼은 스태프를 쥔 반대 손으로 볼을 긁적였다.
규모가 워낙 커서 막을 수도 없고 원리를 모르니 파훼하기도 어려웠다. 하늘에 떠올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악마의 별은 음산하게 빛났다.
“자, 그럼 마지막 피날레를 즐겨주실까.”
프리드는 여전히 사지를 결박당한 채로 웃었다.
불길한 빛으로 돌고 있던 육망성이 그의 말에 응답하듯 우뚝 멈춰 섰다. 그걸 본 바이칼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맙소사.”
“왜 그러지?”
“단장, 이거…….”
발동 직전이 된 육망성의 마력 배열을 읽어낸 바이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끊긴 문맥 뒤로 ‘미친’이라거나 ‘망할’ 따위의 감탄사가 몇 번 이어지다 이내 버럭 큰 소리가 튀어 나갔다.
“이 배열은 박스입니다!”
“뭐?”
바이칼이 스태프로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땅을 가리켰다.
대지에 그려진 육망성은 검은 빛을 흩뿌리며 오로라처럼 하늘로 치솟아 땅과 하늘에 모두 그 표식을 새겨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체불명의 프로그램으로 이어진 박스라고요! 저 빌어먹을 별표식이!”
이해할 수 없는 주장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박스’란 보통 손바닥만 한 크기의 네모난 마법 상자를 칭한다.
저런 말도 안 되는 크기에 음습한 검은 기운, 육각의 별 모양으로 생긴 박스는 개발된 적 없다.
그러나 모두가 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프리드의 입이 먼저 열렸다.
“스위치 온.”
‘박스’가 발동했다.
먼저 검은 파도가 시야를 뒤덮었고,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의 모습이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뒤엉켜 싸우던 현무와 루니도, 사지를 결박당했던 프리드도, 을씨년스러운 기와집 하나를 남겨두고 모두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 *
짹, 째짹!
명랑한 새 지저귀는 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약간 찬 기운을 머금은 물안개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따스함을 색칠하는 봄 햇살. 새로 자라난 여린 풀잎과 노란 꽃잎 사이로 미풍이 살랑살랑 불었다.
‘……새소리?’
쓰러져 있던 인원 중 에단이 가장 먼저 눈을 떴다. 그러자 뜬금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녹색 정원과 노란 꽃밭, 아름다운 석조건물과 함께 그 사이를 뛰노는 어린 새들.
에단은 순간 판단력을 잃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으, 머리야.”
“바이칼.”
다행히도 전원 깨어나는 시기가 비슷했다. 이슬을 머금어 촉촉한 잔디위에 쓰러져 있던 기사단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검게 물든 하늘과 대지는 사라지고 마치 낙원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린 크리스티나가 익숙함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여긴……. 루바르잔 황궁인가.”
“과연. 그런 것 같군요.”
에단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으음. 일단 우리가 지금 박스 안에 들어온 것 같긴 한데요. 황궁을 모델로 만든 공간인가?”
박스라고 치기엔 지나칠 정도로 세부적이었다. 드넓은 황궁의 건물이며 날씨, 작은 동식물까지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이건 꼭 현실 같군.’
방금 전까지 함께 전투 상황에 있었던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그저 꿈을 꾸고 일어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생생했다.
함께 눈을 뜬 인원은 열둘의 기사단과 크리스티나까지 합쳐 총 열 세 명이었다.
“전하께선?”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건 배경이 아니었다. 쥬다스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프리드 길리아노도 보이질 않는군.”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박스로 강제입장한 상황이라면 프리드도 함께 들어왔어야 정황상 맞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상황이 점점 좋지 않게 다가왔다. 박스 어딘가에 쥬다스와 프리드가 같이 있는 거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단장.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
“그게, 박스를 나가는 조건을 전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박스를 나가려면 보스몬스터를 처치하거나 적을 섬멸하여 열쇠를 얻으면 된다.
하지만 이 박스는 황궁을 기반으로 만든 공간이기 때문에 몬스터 처치가 조건일 것 같진 않았다.
“거기다가 여기선 ‘죽음’이 탈출조건이 되는 건지도 확실치가 않습니다.”
박스 내부에서 죽으면 강제적으로 이탈하도록 조건을 추가해 놓은 건 제국의 마법연구팀이 마련한 안전장치였다.
박스란 인간의 정신을 연결하는 일인 만큼 안전성에 대한 대비책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사령술사가 만들어낸 박스가 과연 그 장치를 충실히 재현했을 지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수였다.
“솔직히 그 악독한 사령술사라면 ‘죽음’이 곧 ‘사령화’가 되도록 입력해놓았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전혀 없죠.”
바이칼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 말대로 그들은 이 박스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극단적인 예시였으나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사령술로 이루어진 박스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전부터 나오는 개념이긴 하지만 '박스'는 게임판타지에서 종종 등장하는 컴퓨터 가상현실게임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ㅎㅎ 다만 맵은 옛날 닌텐도게임처럼(?) 팩마다 다르다는...
참, 다음 편도 잠시 후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