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79화 (17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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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약속

“일단은…….”

에단이 침묵하자 크리스티나가 서늘한 눈으로 주변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를 찾아보도록 하지. 그게 급선무다.”

그녀는 착용하고 있던 팔찌으 머리를 높게 올려 묶었다. 맑게 찰랑이는 바닷빛 머리카락을 한 차례 응시한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동의합니다. 이대로 가만히 시간을 놀릴 순 없는 노릇이니.”

에단은 일단 인원을 정확히 체크했다. 제일 급한 건 쥬다스를 찾는 일이었지만 사라진 건 흑현무나 3황자 세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적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대열을 분산시키진 않기로 했다.

“지금부터 주군을 찾는 데에 주력한다. 마법사들은 가급적 박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이동하도록.”

그들은 일단 잔디를 따라 걸었다. 근처에 있는 건물부터 살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건물까지 다가가기도 전에 한 무리의 경비대와 맞닥뜨렸다.

“……!”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에단의 표정에 당황이 어렸다.

‘박스에 사람들이?’

아무리 훌륭하게 현실을 재현해 낸다 해도 박스 안에는 훈련을 위한 몬스터 정도만이 설계 가능했다.

지능을 가진 사람을 재현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에단은 눈앞에 나타난 경비병 무리가 박스 안에 사로잡힌 진짜 인간들인지 아니면 그저 환상일 뿐인지 판단하기 어려워 자리에 멈춰 섰다.

“에이, 황궁 배경인데 설마 공격하진 않겠죠?”

그를 따라 멈춰 선 바이칼이 속닥거리던 찰나였다.

저벅저벅.

경비병 무리가 그들을 무시하고 스쳐 지나갔다. 바이칼은 걱정했던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멀어지는 경비병들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실제 사람은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둔 모양인데요.”

“다행이군. 귀찮아질 뻔했어.”

에단은 검 손잡이에 올렸던 손을 내리며 성큼성큼 앞서갔다.

“와, 단장. 아무리 그래도 황실 경비대를 베려고 하셨습니까?”

“어차피 가짜들이다.”

칼 같은 대답에 바이칼은 물론이고 다른 기사단원들마저 의외라는 시선으로 자신들의 단장을 쳐다보았다.

고지식한 면모가 강한 에단이라면 아무리 가짜라도 황궁에서 난동을 부린다거나 상해를 입히기 꺼려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예상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예의범절을 중시하며 루바르잔 황가에 충의를 바친 헤이가 공작가문의 후예다.

다만 에단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가치가 있을 뿐이었다.

‘전하께 검을 바쳤으니까.’

단 한 사람에게 검을 바치고 목숨을 맡겼다. 개가 한 번 정한 주인을 평생 따르듯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설령 가짜가 아닌 진짜 황궁에서라도 주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검을 뽑을 수 있다.

그러한 속내에 대해 굳이 부연설명을 붙일 필요를 느끼지 못한 에단은 묵묵히 앞서 수색에 임했다.

근처에 있던 궁은 빈 건물이었다. 루바르잔 황궁은 워낙 넓었기 때문에 실제 황족이 기거하는 건물보다 비어 있는 곳이 더 많았다.

그렇지만 주인 없는 궁도 관리만큼은 철저했다. 깔끔히 쓸고 닦은 바닥과 매일 세탁해 갈아놓는 시트, 옷가지들을 나르는 하녀들이 종종 보였다.

경비대와 마찬가지로 하녀들 역시 박스 안에 들어온 인원을 인식하지 못하고 투명인간처럼 지나쳐 버렸다.

“얘기 들었어? 오늘도래.”

“아아, 어쩌면 좋아. 오늘도?”

“응. 이러다 정말 큰일 터지는 거 아닌가 몰라.”

“에구머니! 그런 소리 함부로 하다 우리가 먼저 큰일 나는 수가 있어, 얘.”

본인들은 작게 소곤거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근처를 지나는 누구나 엿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지나쳐 간 하녀들을 슬쩍 돌아본 바이칼이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도’……?”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자주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알기로 최근 루바르잔 황궁에선 딱히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다.

에단과 바이칼은 서로 의문스런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그냥 평범한 황궁 배경이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에피소드 같은 게 있는 박스인가? 그럼 에피소드 감상을 완료하면 자동으로 나가진다거나?”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전하를 찾는 일에 집중하도록.”

“예이. 예이.”

단호하게 말을 자른 에단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바이칼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바이칼도 쥬다스의 행방이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빈 궁을 나와 장미정원과 분수대를 지나 낮은 잔디며 색색의 벽돌로 꾸며놓은 길을 따라 한참을 수색했다.

큰 성과는 없었지만 아직까지 폭발음이라든지 전투의 흔적이 보이지 않음에 다들 안심했다. 만일 쥬다스와 프리드가 한 공간에 있다면 이 정도로 조용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수색 속도에 박차를 가하던 와중, 마침내 그들에게도 익숙한 건물에 다다랐다.

1황자궁이었다.

“어랍쇼? 이거 옛날 건물 아닙니까?”

익숙하긴 했지만 동시에 1황자궁은 쥬다스가 황태자로 즉위하면서 외부디자인을 새롭게 수정했다.

본래는 다른 건물로 옮겨가야했지만 쥬다스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가 떠나고 싶지 않아하니 어쩔 수 없이 궁 자체를 황태자를 위한 건물로 바꿔 버렸다.

그런데 지금 이들의 눈앞에 떡하니 보이는 1황자궁은 변화를 주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크리스티나는 건물 벽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 박스의 배경은 과거라는 뜻이 되겠군.”

‘어쩌면 여기에…….’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망설임이 깃들었다. 경비병이나 하녀들처럼 세밀하게 재현해 낸 이 박스라면 과거 1황자궁의 주인도 이 안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과거 그의 곁엔 그들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크리스티나는 문득 문에 기대선 소년을 발견하고 멈칫 입을 열었다.

“3황자 전하?”

크리스티나의 손이 벽에서 떨어졌다. 상대도 그녀를 발견하고 놀란 눈으로 마주보았다.

바이칼이 반갑게 소리쳤다.

“세이지 님! 여기 계셨군요. 무사하셨습니까?”

세이지였다. 혼자 있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여긴 들어가지 마. 다들.”

“그게 무슨.”

무사해서 다행이란 말을 건네려던 바이칼이 도로 입을 닫았다. 3황자의 주먹이 겁먹은 사람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세이지는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었는데도.”

“예?”

“내 눈으로 봐놓고선 잊고 있었어. 나, 그때 형님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세이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다른 일행이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횡설수설했다.

일단 그를 진정시킨 바이칼이 에단과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입 모양으로만 전달한 질문에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답을 내놓았다.

“가자.”

세이지가 뭘 보고 충격받았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과거 따위에 연연해서 흔들릴 시점이 아니었다.

“우린 한시라도 빨리 주군을 찾아 이곳을 나가야 한다.”

“하지만.”

“외람되오나 3황자 전하께서도 혼자 계시면 위험하니 함께 이동해 주십시오.”

알겠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걸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에단은 다시 앞장서서 1황자궁으로 들어섰다. 궁 안은 몹시 조용했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제외하곤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돌아다니는 하녀조차 없었고 심지어 장식물도 없어 벽면이 온통 썰렁했다. 지금껏 돌아다닌 건물들 중 가장 허전한 공간이었다.

벽면을 따라 양쪽으로 이어진 둥근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복도가 나타났다.

그 복도 한가운데에 위치한 방이 바로 이곳 주인의 방이었다. 가장 앞에 선 에단이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달칵!

문이 먼저 열렸다. 내심 당황한 에단이 한 걸음 물러서자 안에서 문을 연 이가 천천히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

제국 유일무이한 맑은 은발 금안.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라 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설마설마 했던 과거의 주인이 그 앞에 있었다.

“전……!”

그러나 어린 쥬다스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걸음은 무척 느렸고 비틀거리는 기색이 있어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태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본래 전하께선 몸이 몹시 약하셨지.’

그들은 루바흐에서 처음 만났던 쥬다스를 떠올렸다. 같이 봉술 수업을 받았던 에단은 그가 당시에 얼마나 체력이 없고 나약했었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치료사로부터 언제 신체기능이 정지해 숨을 거둘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서둘러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그들은 지금 가짜로 만들어진 어린 그가 아니라, 진짜 쥬다스를 찾아야만 했다.

애써 아이를 무시하고 돌아서 지나치려던 에단의 귓가에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콜록.”

돌아보자 아이는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벽을 짚고 잔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그마저도 원활히 되지 않아 몇 번이고 콜록거리다 털썩 주저앉았다.

“……?!”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그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다, 다치신 것 같은데요.”

바이칼이 조심스럽게 말한 것처럼 어린 쥬다스는 타고난 건강뿐 아니라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목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뺨에도 긁힌 자국이나 쓸린 상처 등이 조금씩 남아 있었고 누군가 조른 듯 목이 잔뜩 부어 있었다.

가까이서 그의 참혹한 상태를 살펴본 에단이 결국 참지 못하고 분개했다.

“대체 누가 이런!”

“형님의 어머니.”

답은 세이지로부터 나왔다. 그러자 모두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사실 쥬다스의 생모가 그를 학대했다는 사실은 귀족가 사이로 공공연하게 퍼진 유명한 소문이었다.

세이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분을 그렇게 만든 게 나의 어머니, 사야 캐슬롯.”

그 진상이 밝혀진 게 불과 5년 전이다. 사야 캐슬롯은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고 그녀의 아들인 3황자 세이지는 침묵의 궁에 유폐당했다.

이른바 ‘해피엔딩’, 사람들은 모든 게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며 황제를 칭송했다.

‘형님, 어째서 날 용서했습니까?’

세이지는 지독한 모멸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그동안 해온 행동과 생각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이었는가를 이제야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사야 황후는 형에게 있어 악마나 다름없었다. 어미에게 자식을 죽이도록 했다.

제 목을 조르는 어머니를 보며 형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 놓고 쥬다스를 원망하고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한 자신이 너무나도 추악하게 느껴졌다.

‘나는 형님의 뒤를 따를 자격이 없어.’

세이지가 고개를 숙이고 절망하는 사이, 에단은 분개하던 그대로 굳어져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소문을 들을 때야 그러려니 싶었던 일을 눈앞에 직접 확인하고 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으.”

그때 아이가 주저앉은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원스레 울음을 터뜨리진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눈물만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에단은 문득 생각했다.

차가운 궁이다. 일곱 살 어린아이가 엉망진창으로 다쳐 울어도 아무도 그 눈물을 찾지 못할 만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하루 보내셨나요? ㅎㅎ

오늘은 하루종일 비바람이 몰아쳐서 좀 무섭기까지 하던데.... 그래도 나갈 일 없이 집안에만 있어서 좋았습니다.ㅋ 역시 비오는 날은 집에서 라면이죠! 흐흐.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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