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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약속
오래 지나지 않아 아이는 다시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안절부절못하고 그를 지켜보던 일행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이쯤 되니 에단도 더 이상 매몰차게 돌아설 수 없었다. 그들의 주군이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약한 모습이었다.
“어딜 가시는 걸까요?”
“그건…….”
크리스티나는 짚이는 곳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 고운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시 1황자가 정계에서 무시받았던 이유 중 큰 줄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기댈 곳이 없으니까.’
먼 타국에서 건너와 정신이상을 일으킨 모친, 그리고 궁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방관하는 부친, 작고 병약한 황자보다는 다른 튼튼하고 총명한 말에 패를 거는 귀족들.
넓고 아름다워 마치 낙원 같다 일컬어지는 루바르잔 황궁 안에서 아이가 기댈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음? 이거 안녕하십니까. 1황자 전하.”
느린 걸음으로 겨우 궁에서 빠져나온 어린 쥬다스는 마침 근처를 지나던 한 귀족 무리와 맞닥뜨렸다.
“…….”
속내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드러난 표정만큼은 다들 친절하고 깍듯해 보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황자가 답하지 않고 침묵하자 그저 목례와 함께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그 지나가는 행렬 사이에 끼어 있는 어린 소녀를 발견한 크리스티나의 눈이 잘게 떨렸다.
‘저건, 과거의 나야.’
델피아 공작가의 하나뿐인 딸 크리스티나는 어릴 적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따라 황궁을 방문하곤 했다. 어린 나이지만 대귀족 자제답게 그녀는 아이보리 셔츠와 겹겹이 덧대어 만든 붉은 스커트를 입고, 체리처럼 동그란 방울로 머리를 묶어 장식했다.
그리고 그때 어렸던 그녀는 쥬다스를 보고 한눈에 평가했다.
‘아니야.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쓸모없고 무능한 존재에 대한 경멸.
그 모든 걸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낸 물빛 눈동자를 보며 크리스티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손끝으로 피가 죄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본래 그녀는 능력주의에 결과중심 성향이 강했다. 루바흐에서 쥬다스를 다시 만나 충의를 바치면서부터는 그 가치관이 많이 희석되어 융통성이란 걸 가지게 되었다.
세상에는 결과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가치도 있다.
당장 쓸모없다고 느꼈던 것들이 어느 순간이 되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존재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쥬다스다. 하지만 이때의 크리스티나는 그런 사실 따윈 모르던 콧대 높고 도도한 꼬마 아가씨였다.
‘나는 도대체 당신에게, 어떤 터무니없는 상처를…….’
10년 전 그녀는 약해 빠지고 볼품없는 어린 쥬다스를 향해 경멸 섞인 싸늘한 시선을 던지곤 휙 돌아서서 어른들 틈에 섞여 버렸다.
크리스티나는 이때 자신이 보낸 시선이 흉악범에게 던지는 돌팔매질보다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음을 알았다.
“잘 생각해 보라고. 약한 놈은 왜 그 무리에서 약할까?”
문득 지나간 행렬 중 한 남자가 완전히 좌절해 버린 그녀를 힐끗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밟으면 죽으니까.”
붉은 눈동자가 뱀처럼 빛났다. 마치 박스 내에 제작된 환상 중 일부처럼 움직였던 그였지만 사실은 그저 연기였을 뿐이다.
박스에 들어온 기사들과 충분히 멀어졌다 판단한 지점에서 그는 푹 눌러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손가락에 걸었다.
“누가 잘했든 잘못했든 상관없어. 약한 놈은 한 번 밟히면 그냥 알아서 죽거든. 무리 생활을 하는 녀석들은 그걸 아는 거지.”
스스로의 과실을 깨닫고 절망하기 시작한 쥬다스의 수하들을 보며 프리드는 목에 맨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너희 자신이고 말이야.”
‘너희들이야말로 그를 밟아 죽이고 싶어 했잖아?’
궁에서, 학교에서, 귀족사회에서. 지금 황태자를 따르는 이들 중 대다수는 한 번씩 그를 짓밟았다. 꼭 물리적인 타격을 입혀야지만 짓밟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단순한 표정이나 한 마디 말만으로도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과연 어디까지 스스로의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지. 기대하지.”
피식 웃음을 흘린 프리드는 유유자적 돌아서서 그대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쥬다스의 수하들은 하나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에단이 주변을 확인했다.
“여긴.”
어린 쥬다스가 향한 곳은 하윤이 혼인을 맺으며 고국에서부터 가져왔다는 벚나무 아래였다.
1황자궁 뒤편에 심어둔 이 벚나무는 사시사철 분홍색 꽃이 피며 눈처럼 흩날린 후 솜사탕처럼 자연히 녹아 사라진다는 신비로운 나무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인 생기 넘치는 벚나무를 보자 답답했던 가슴속이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는 나무 밑에서 멍하니 서 있는 쥬다스의 곁에 천천히 무릎 꿇었다.
“전하께선 어릴 적부터 이 나무를 좋아하셨군요.”
“…….”
“그래서 저희에게도 보여주신 건가요.”
떠올려 보면 쥬다스는 늘 궁을 찾아온 친우들에게 틈만 나면 함께 꽃놀이를 하자거나 나무 아래서 차를 마시자는 식의 제안을 해왔다.
그들은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름다운 꽃나무구나 생각하며 따랐던 일들이 사실은 꽤나 무거운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았다.
“그땐 꼭 비밀기지에 우릴 초대하는 심정이셨으려나요?”
바이칼도 풀썩 그 곁에 꿇어앉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무릎을 꿇어야 겨우 아이의 눈높이와 비슷해졌다.
사실상 12살이 되기까지 쥬다스는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7살의 외형을 유지했었다.
그랬기에 지금 크리스티나와 바이칼, 에단은 과거의 그를 보면서도 생소함 대신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원래 알던 그와 눈빛이 조금 달랐다. 맑고 부드럽던 금빛이 아니라 뿌옇게 일어난 흙탕물처럼 눈동자가 흐릿했다.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다. 흡사 몽유병에 걸린 사람을 연상케 했다.
“잠깐. 꿈……?”
벚나무까지 와서도 혹시 주변에 진짜 쥬다스의 흔적이 있진 않을까 두리번거리던 에단이 문득 무엇인가에 생각이 미쳐 크리스티나와 바이칼처럼 그 곁에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여전히 아이는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환상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에단은 단순히 과거의 그라서 그들이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바이칼.”
“예.”
“‘박스’는 사람의 정신에 접촉하여 환상을 보게 한다. 맞나?”
“네? 아, 넵. 이론상으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박스에 진입한 자가 본래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을 덮어쓸 가능성은?”
“아니 이 양반이. 갑자기 그게 웬 뚱딴지같은 말씀…….”
똥 씹은 표정으로 되물으려던 바이칼이 퍼뜩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여전히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어린 쥬다스를 조심조심 살폈다.
곧 그의 입에서 탄성과 탄식이 섞인 애매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 허! 단장은 정말 천재시지 말입니다?”
“쓸데없는 감상은 넣어둬라. 결론부터 말해.”
“가능합니다. 그거 가능해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계신 꼬마 전하께서 실제로는 진짜 주군이실 수도 있다는 거죠.”
바이칼은 자신의 밤색 머리칼을 벅벅 헤집으며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예상인데, 어쩌면 말입니다. 애초에 여긴.”
“……?”
“전하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럴싸한 추리였다. 일반적으로는 박스에서 사용할 맵을 고르고 입장한다.
만일 맵을 고르지 않고 입장한다면 사용자의 정신세계에서 맵을 대체할 기억을 끌어오게 된다.
이 경우 정신세계를 침범당한 사용자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박스 사용 시 맵을 반드시 지정하도록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사령술사가 만든 박스가 그렇게 친절할 리는 없었기에 기사단원은 모두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자와 환상을 판별해 낼 수 있는 방법은?”
“그건 모르겠는데요.”
바이칼은 박스개발자가 아니라 일개 마법기사일 뿐이다. 당연히 세부적인 사항까진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전하를 이 기억 속에서 깨울 수 있지?”
“보통은 죽여서 박스 밖으로 끄집어내죠.”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시간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체를 확인하고자 어린 쥬다스를 죽여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에단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머리카락을 정돈하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아이를 찾아온 여인이 슬픈 얼굴로 서 있었다.
루바르잔 황실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이국적인 외모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감빛 도는 피부와 선한 눈, 루바르잔 여성 평균키보다 작아 체격이 아담했으며 아직 소녀티를 채 벗지 못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전 황후 하윤 리였다. 특이한 외향 덕에 에단을 비롯한 일행은 그녀를 처음 봤어도 그 정체를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또 여기 혼자…….”
하윤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제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그녀는 아이를 찾았지만, 이렇듯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오열했다.
하윤은 자신이 사령에게 조종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마저 떠나면 이 아이 곁에는 누가 있어줄까.’
자신의 존재가 아이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떠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엄마?”
어린 쥬다스는 자신을 학대한 어미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아이의 부은 목과 멍든 손목을 어루만지며 하윤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또 널. 아아, 어찌, 어찌해야.”
아이는 엄마를 올려다보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울어…… 요?”
하윤은 너무 울어 초췌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눈물을 삼키느라 답하지 못하자 어린 쥬다스는 담담하게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잘못했어요.”
“아니야, 아가.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크리스티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세간에선 지상낙원이라 불리는 황궁에서 벌어진 비극이 눈앞에 있었다.
‘결국 얼마 후 하윤 리는 자결한다.’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이는 자식을 목숨보다 사랑한 하윤에게 있어 심장을 도려내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죽 걱정했던 대로 아이는 혼자 남았고 모두에게 경멸받았다. 마지막 기회로 그를 루바흐 학원에 입학시켰지만 그 안에서도 철저히 혼자였다.
그가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내기까지 어떤 고충을 겪었는지는 같은 루바흐 동기인 세 사람이 잘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형님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세이지는 차마 쥬다스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발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그는 사야 황후가 사령과 계약해 끔찍한 죄를 저지른 원인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형을 죽이려고 한 순간조차 세이지의 선택은 그를 위한 게 아니었다. 세이지는 어머니인 사야 황후를 택했고 형을 버렸다.
“죄송해요.”
세이지는 그 말과 함께 홱 돌아섰다.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는 3황자를 보고 당황한 바이칼이 그를 불렀다.
“세이지 님! 어딜 가십니까? 아직 혼자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바로 곁에 꿇어앉아 있던 크리스티나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세이지가 사라진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녀를 보고 바이칼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크리스티나 님은 또 왜? 이분들이 단체로 사춘기가 오셨나.”
“두 분을 데려오도록 하지. 바이칼. 대열을 지키고 있어라.”
“예? 제가요? 잠깐만.”
에단은 우선 세이지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멀어지는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바이칼이 이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어씨 젠장! 다들 나한테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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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공든탑
그건.. 네가 동네북이라서 그래....
....가 아니라 잠시 후 다음 화로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