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81화 (18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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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약속

“저, 부단장님.”

바이칼은 머리를 뜯던 자세 그대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차로 절망했다.

다른 기사들의 상태도 영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다들 의기소침해져서 우물쭈물하는 꼴이 당장에라도 전원 대열을 이탈할 낌새였다.

바이칼의 손에 들린 스태프가 웅웅거리며 마력을 머금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니들도 헛소리 지껄이면 진짜 기사단복 벗을 각오하고 그 정신상태를 개조해 줄 거다.”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먼저 말을 건 기사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전하께서, 아니, 그러니까, 과거의 전하께서 이동하고 계십니다.”

그 말대로 어린 쥬다스는 하윤의 손을 꼭 붙잡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전하를 따라가야 하나? 단장은 대열을 지키라고 했지 제자리에서 기다리란 말씀은 하지 않으셨잖아.’

이대로 어린 쥬다스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멋대로 대열을 이끌고 움직여도 되는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질 않았다.

끙끙대던 바이칼은 결국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아이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해동의 수도는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화염이 살아 있는 새처럼 날아다녔고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무지개처럼 불의 다리가 놓였다.

신수는 자연계 정령과 다르게 여러 속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중 불 속성을 가진 신수는 백호와 주작으로, 현재 백호가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작이 다루는 화염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대신 하늘 속성만큼은 주작과 청룡이 같았는데 두 신수는 천기를 다루며 엎치락뒤치락 격렬하게 싸워 댔다.

그러나 거대한 신수들의 싸움 아래에서도 사람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호성의 주민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대피시켜라!”

“수(水)기를 더해 주술진이 깨어지지 않도록 보충하라.”

“집과 성벽은 불타도 괜찮으니 민간인 보호에 주력하라!”

왕은 가장 먼저 지하대피소에 사람들을 피신시켰다.

큰 전쟁이나 재난을 대비해 만들어둔 장소였는데 수도의 모든 거주자를 수용하고도 공간이 남아 여행객이나 장사꾼들도 모조리 들어오도록 했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은 불타는 와중에도 지하대피소는 제법 안전하게 유지되었다. 왕실주술사들이 나서서 있는 힘을 다해 결계를 쳤기 때문이다. 집을 태우고 산간을 집어삼켜 무섭게 넘실거리는 불길도 그 결계에 막혀 대피소 내부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성왕 이서윤이 사람들을 지키는 데에 모든 병력을 주력한 탓에 궐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윤은 아름다운 궁궐이 불타는 것엔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선봉에 나서 상황을 지도했다.

“전하! 근방에 사령술사가 나타났습니다!”

지금껏 나름 큰 위기 없이 척척 대응해 나가던 해동군이 술렁이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사령군단이 나타났단 속보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으며 병사들의 얼굴에도 근심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정작 이를 보고받은 서윤의 표정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잠시 혀를 찼을 뿐이다.

‘사령술사라……. 적의 수뇌부 놈들은 어디서 뭘 하나 했더니 이제야 한 놈 나타났나? 생각보다 게으른 녀석들이군.’

“중앙군은 전투를 준비하라.”

그는 차분히 창을 챙기며 명을 내렸다. 중앙군은 왕의 칙명에만 움직이는 군대였다.

중앙군을 움직이겠다는 건 왕이 직접 전장에 나서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아바마마, 저도 돕겠습니다!”

“세자.”

그의 아들 이지오가 맹랑한 기세로 뛰쳐나왔으나 서윤은 단호히 기각했다.

“너는 여기 남아 사람들을 지키도록 하여라. 절대 이 안에서 한 발짝도 나와서는 안 된다.”

“하오나!”

“듣거라!”

큰 소리에 찔끔한 지오가 입을 다물자 서윤은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지오 너는 이 나라 해동의 왕족이다. 왕족은 왕족으로서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배웠지 않느냐.”

“배웠습니다. 그러니 저도 나라를 위해…….”

“네가 정녕 나라를 위한다면!”

왕은 열두 살 왕세자의 작은 두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네 사람을 지킴과 같이 너 자신도 지켜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왕족에겐 백성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할 의무도 있는 것이야.”

늘 인자하던 성왕이 아닌 아비로서의 호통이었다.

“그럼 왜 아버진.”

“나는 왕이기 때문이다.”

그 말과 함께 이서윤은 아들의 어깨를 놓았다. 그리고 호위가 끌고 온 말에 훌쩍 올라탔다.

“수호!”

“예, 전하. 하명하시옵소서.”

왕의 부름을 받은 연수호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중앙군이 돌아올 때까지 세자를 도와 이곳을 지키도록 하게.”

“명을 받듭니다.”

간결한 명을 마지막으로 왕은 중앙군을 이끌고 결계를 나섰다.

먹잇감을 발견한 검은 불꽃이 왕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으나 그를 지키는 호위의 활약으로 인해 전부 무위로 돌아갔다.

“아버지.”

이지오는 아비의 말을 따라 결계 안에 남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반드시 승리하여 돌아오소서.”

아들의 바람을 뒤로한 채 이서윤은 갈라진 땅을 박차고 말을 달렸다. 딱딱하게 말라 굳은 흙덩이가 말발굽에 채여 이리저리 튀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눈에도 멀리서부터 스멀스멀 몰려오고 있는 검은 먹구름 같은 게 보였다.

“정지.”

정지신호에 따라 말들이 일제히 투레질했다.

당당히 싸우고자 자리에 나오긴 했지만 막상 검은 물결을 마주하고 나니 고삐를 쥔 주먹이 떨렸다.

서윤은 불타는 성벽 아래에 자리 잡고선 쓰게 웃었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전쟁이군.’

모든 전쟁이 그렇긴 했지만 이 전투는 서윤에게 있어 특히 벼랑 끝에 몰린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서 그가 무너진다면 다음 순서는 그의 아들 이지오의 차례였다.

절그럭!

그는 문득 창칼에서 나는 쇳소리가 꼭 맹수나 요괴처럼 무기가 우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후.”

짧게 심호흡한 후 서윤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적은 사령술사와 놈이 부리는 대량의 사령군단이다! 사령이란 평범한 물리 공격에 소멸하지 않으니 기를 두르거나 주술을 사용해서 공격하라.”

검은 해일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낄낄대는 사령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해동군도 말을 박차고 적과 맞부딪혔다.

와아아아!

「느아아, 진짜 미치겠다냥.」

“어어, 호랑이님. 괜찮아?”

주작과 싸우는 청룡 측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주변만 어슬렁거리던 백호는 이번엔 사령군단과 맞서 싸우는 해동군을 발견하고 이를 갈았다.

「하나도 안 괜찮다냥! 나라가 불타고 있는데 신수 체면에 이게 무슨 꼴이다냐!」

울상을 짓는 백호를 따라 란도 시무룩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꽈르르릉!

우르릉!

검은 하늘을 수놓은 화염과 뿌연 연기가 보였다. 그 사이로 거대한 두 신수가 뒤엉켜 싸우면서 끊임없이 천둥이 일어났다.

“란 님, 이제 여기서 피해야 할 것 같소.”

“응. 근데 정령사 아저씨.”

올해 쉰이 넘은 란보다 스무 해는 더 산 코르토반 옌은 아저씨란 호칭에 어색하게 콧수염을 매만졌다.

“쥬다스 님은 언제 돌아올까?”

두 사람도 쥬다스가 남쪽의 땅을 지키러 떠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란과 콜은 그 출정에 굳이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건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허허. 그쪽 일을 잘 해결하시고 나면 돌아오시겠지요.”

“그치만 나, 쥬다스 님이 없으니까 계속 불안해.”

“두려우시오?”

“응. 맞아, 무서워.”

그 와중에도 악착같이 달려드는 불새들을 콜이 부리는 바람의 정령이 반으로 갈라 소멸시켰다.

란은 숲의 힘을 가진 요정이기에 불을 상대로는 힘을 쓰기 어려웠다. 지금 그녀가 하는 일은 불타버린 나무를 재생시키는 정도에 그쳤다. 그것만으로도 수도의 정경을 지키는 데엔 상당히 도움이 되긴 했으나 숲의 요정족이 불을 보고 무서워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란이 정말 무섭다고 느낀 건 타오르는 불새들이 아니었다.

“쥬다스 님, 거기서 다치면 어떡하지?”

「어이고, 걱정도 팔자다냥. 다쳐? 누가냥? 자연계 정령 녀석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키고 있을 텐데!」

백호가 기가 차다는 눈으로 쨍알거렸지만 란은 여전히 시무룩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치만 거기 나타난 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령술사라며!”

「……꼬맹이, 방금 네가 무슨 말을 한지나 아는 거냥?」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 여기도 이렇게 무서운데 거긴 얼마나 더 굉장할지 상상도 가지 않아.”

「나 참. 대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령술사가 뭔 소용이다냥.」

백호는 여유롭게 앞발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사령술사고 나발이고, 그 이그레트 앞에선 다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을걸.」

“응……?”

「계약한 정령왕만 넷. 그걸 두고 인간들이 ‘자연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했던가냥? 솔직히 그 표현도 웃기다냥.」

란이 멍청히 눈을 깜빡임과 동시에 콜이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백호는 털 고르기에 열중하여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쯤 되면 그냥 살아 움직이는 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냥.」

“저기.”

「냥?」

“근데 ‘이그레트’는 누구야?”

「…….」

백호는 아차 싶어 입을 냉큼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란은 눈을 말똥말똥 빛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왜? 쥬다스 님과 아는 사이래?”

「…….」

“응? 호랑이님. 누구냐니까?”

「므, 므앙. 그건, 그러니까.」

아무리 눈치 없는 백호라고 해도 그 사실이 쥬다스에게 있어 감추어야 할 비밀이라는 정도는 알아차렸다.

다행히 숲 속에서 혼자 살아온 란은 루바르잔에서 대현자로 이름을 떨친 ‘이그레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땅히 수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쩔쩔매던 백호는 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익숙한 검은 눈동자였다.

‘있잖아. 둘씩이나.’

왜 하필 이 순간에 청룡의 한 마디가 떠올랐을까.

백호는 꼬리를 천천히 살랑거리며 란의 냄새를 다시 확인했다. 그 검은 눈만큼이나 익숙한 냄새가 났다.

「란. 너를 돌봐준 ‘아버지’가 해동사람이었다고 했었냥?」

“응. 아빠는 해동 사람이었어.”

「이름이나 다른 특징은 모르는 거냥?」

“으음. 이름은 몰라. 직접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아는 거라곤, 아빠는 해동 사람이었고 연금술로 나를 만들었고…….”

「만들었다고냥? 생명을 다루는 연금술을 사용했다는 거다냥?」

생명을 다루는 연금술은 해동 왕가에만 전해지는 금지된 술법이었다.

연금술로 만들어내는 생명에는 전부 영혼이 없다. 영혼이 깃들지 않은 실패작들은 전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연금술로 생명을 만드는 건 살인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넌 멀쩡히 요정족으로 태어났다는 거고.」

“멀쩡하진 않아. 난 반쪽짜리거든.”

란은 배시시 웃으며 스스로를 가리켰다. 밤이 되어 아름다워진 얼굴은 숲의 여왕이라 불리는 픽시다웠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어쩌면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난 아빠의 시체를 먹고 태어났어.”

「시체를…….」

백호가 그녀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만일 그 아버지란 자가 해동 왕가의 피를 이었고. 란이 그를 흡수해 태어난 존재라면?’

보통은 결혼을 통해 후사를 남기지만, 만일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특이한 경로로 유전된 핏줄인 셈이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란에게 사방신수와의 친화력을 증폭시킨 물건이 있었다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열매 상태의 픽시가 인간의 시체를 자력으로 흡수했을 리는 없어. 그 자리에 최후의 연금술을 완성시킨 매개체가 있었을 거야.’

무기력하게 쪼그려 있던 백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백호의 신물!」

“어?”

「설마 그걸 네가 흡수한 거다냥?」

“어어어?”

그렇다면 청룡이 그녀에게서 그다지 친화력을 느끼지 못한 이유도 설명이 되었다.

란은 사방신수 중 백호와 계약할 조건을 충족한 해동 왕가의 핏줄이었다.

「이럴 수가. 네가 신물 그 자체였을 줄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해. 호랑이님.”

란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울먹이는 백호를 다독여 주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옙, 란의 정체는 그러하였습니다.(...)

애당초 신물 그 자체이기 때문에 친화력이 만땅일 수밖에 없죠. ㅎ (콜의 경우는 그냥 불의 자질이 뛰어난 정령술사입니다. 그러나 해동왕가의 피를 잇지 않았으니 사방신수의 마음을 얻는 데엔 실패하였다는...쿨럭. 콜 의문의 1패...)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ㅎㅎ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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