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2 / 0240 ----------------------------------------------
21장. 약속
“서둘러 주시겠소? 지금 뭔가 굉장히 중요한 말씀들을 나누고 계신 것 같긴 하오만.”
코르토반이 둘을 슬슬 재촉했다. 그는 최상급 듀얼 술사답게 불과 바람의 정령을 동시에 다루며 능숙하게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거세지는 주작의 불길에 그도 란을 지키는 게 버거워지고 있었다.
「쿨쩍. 설마해서 묻는 건데 이 정령술사도 내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냥.」
“실례야, 호랑이님. 정령사 아저씨는 쥬다스 님의 스승님이랬어. 엄~ 청 대단한 분인걸.”
「아니, 내 말은, 지금은 이 꼬락서니여도 원래 신수의 목소리는 개나 소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나도 나름 격 있는 신수인데냥…….」
청룡의 표현에 따르면 ‘그냥 조금 튼튼한 야옹이’ 꼴을 면치 못한 백호의 목소리가 자신감을 잃고 작아졌다.
쿠꽈앙!
그때, 사방이 번쩍 흑백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제 빛깔을 찾았다. 한 박자 늦게 터진 폭발음이 뒤이어 지축을 흔들었다.
“흐익! 놀래라. 바, 방금 뭐야?”
「청룡.」
백호가 그르륵 목을 울리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었다.
무언가 제대로 맞은 듯 거대한 청룡의 몸체가 비틀비틀 기울며 추락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게 분명했다. 백호는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고 란에게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지금 당장 계약해 줘.」
“에엑?”
모처럼 진지하게 한 요청이었지만 란은 질겁하며 눈을 깜빡였다.
“저기, 난 요정족이야. 정령술사도 아닌데?”
「술사의 자질에 종족은 상관없다냐. 인간이든 요정이든, 누구나 계약을 하면 그때부터 술사가 되는 거다냥.」
“하지만 난.”
「제발.」
자신은 해동 왕가의 후손이 아니지 않냐고 물으려던 란이 움찔 입을 닫았다. 작고 하얀 새끼호랑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냐. 청룡이 많이 다친 것 같다냥. 이제 남은 신수는 녀석밖에 없는데, 이대로 청룡 자식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신수의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지금 백호에겐 절박함만이 남아 그물처럼 심장을 조였다.
「부탁한다냥. 지금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냐.」
“호랑이님.”
「……도와줘.」
또옥!
어느 틈엔가 고개 숙인 백호의 콧등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약자를 갖지 못한 정령이란 이렇게나 무력했다.
유일하게 악에 물들지 않은 동료도, 오랜 옛날 지켜주겠노라 약속했던 나라도,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지켜봐 온 귀여운 남매도.
소녀는 이미 죽었고 그녀의 오라비는 지금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전쟁터에 나갔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지킬 수가 없다.
간절히 손을 뻗어 보았자 닿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게.”
고개 숙여 울기만 하던 작은 호랑이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나랑 계약해.”
「……!」
“그리고 지키고 싶었던 것들, 같이 지키자.”
보랏빛 머리의 아름다운 요정이 잿더미 한가운데 쪼그려 앉아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따뜻한 손바닥이 백호의 앞발을 꼬옥 쥐고 있었다.
그날, 엉망진창으로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백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저길 봐!”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축포는 바로 화염이었다.
청룡이 아무리 하늘에서 비를 뿌려도 꺼지지 않고 뜨겁게 대지를 불태우던 검은 불길 위로 파란 불길이 나타나 이를 집어삼켰다.
파란색 불은 해동의 건물과 사람들에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오로지 검은 불길만을 집요하게 공격해 꺼뜨렸다.
그사이 시커멓게 타버린 터전에선 다시 녹색 풀과 나무가 기적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 살았다.”
“검은 불이 꺼지고 있어!”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아직 하늘에선 청룡과 주작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불리하다면 부상을 당한 청룡 쪽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해동 사람들의 시야로 또 다른 신수가 훌쩍 나타났다.
무너진 성벽을 차례차례 밟고 뛰어올라 날쌔게 가장 높은 망루까지 다다른 신수는 다름 아닌 눈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백호였다.
“백호님이다! 저건 백호님의 불이야!”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함성을 질렀다.
「―?!」
함성 소리를 듣고 움찔 시선을 내린 주작에게로 파란 불꽃이 뿜어졌다.
맑은 기운이 담긴 파란색 불에 대응하여 검게 타락한 흑주작의 불이 허공에서 이글거렸다.
두 불길이 부딪혀 마치 폭죽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청룡!」
「오, 벌써 계약했어? 십 년은 지나야 눈치챌 줄 알았더니.」
「이 자식. 알고 있었으면 진작 알려주지 그랬냥?」
커헝! 위협적으로 포효하는 백호를 사이에 두고 주작과 청룡이 잠시 전투를 멈추었다.
「그래, 그래. 우리 야옹이 기특하네.」
「캬아악! 지금 그 꼴로 농담이 나오냥?!」
「내 꼴이 뭐 어때서.」
「꼬부랑 수염이 완전 너덜너덜해졌자냐!」
타락한 흑주작은 본래 신수가 다루는 힘보다 훨씬 파괴적인 성향의 힘을 사용했다.
가호하고 생명을 살리는 힘은 사라지고 모조리 살육과 파괴에 능한 힘만이 강화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사방신수 중 최고서열에 자리한 청룡이라 할지라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청룡은 조금 전 크게 한 방 먹어 비늘 일부가 깨어진 상태였다. 후끈한 열기에 당하면서 긴 메기 수염도 까맣게 탔다.
그걸 본 백호가 수염 운운하자 청룡 가야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아. 수염은 그냥 자를까 봐.」
「왜 또!」
「수염 있으면 늙어 보이잖아. 못생겼어.」
「이 망할 외모지상주의 용 같으니…….」
그러는 사이 뜬금없이 나타나 두런두런 떠들고 있는 백호를 가만히 쳐다보던 주작이 검게 물든 눈을 번뜩였다.
콰아아!
백호와 청룡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주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실린 회오리가 형성되고 있었다.
회오리 속에는 검은 불꽃이 함께 타오르고 있어 꼭 독사를 품은 비단이 하늘에서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 여긴 백호가 긴장의 끈을 조이는 순간 청룡이 별거 아니란 투로 말했다.
「아무튼 이쪽은 걱정할 필요 없어.」
「지금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냥?」
「내 말 들어.」
청룡은 주작과는 반대로 물길이 요동치는 회오리를 만들어내 충돌을 준비했다. 동시에 백호에게는 사령과 싸우고 있는 해동군 쪽을 살짝 고갯짓했다.
「여긴 신경 끄고 저쪽을 지켜.」
「하지만 청룡 너 다쳤잖……!」
「고작 수염 좀 탄 거다. 어차피 자를 건데 뭐 어때.」
「그게 아니라!」
「어서 가.」
워낙 차분하게 떠미는 바람에 백호는 머뭇거리며 주작과 청룡을 번갈아보았다.
「타락한 주작을 막는 건 내 주인이 나한테 맡긴 일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쿠우우우-
웬만한 집 한 채 정도는 거뜬히 삼킬 수 있는 회오리 두 개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검은 불꽃은 물에 젖어서도 꺼지지 않고 끊임없이 넘실거렸다.
청룡은 그 불꽃을 온몸으로 뚫고 달려들어 주작의 날개를 옭아맸다.
「야옹이 넌. 지금 네가 지켜야 할 게 뭔지만 생각해.」
「…….」
백호는 망루에서 휙 뛰어내렸다. 올라왔을 때보다 내려가는 건 훨씬 속도가 빨랐다.
‘하여튼 재수 없는 청룡 자식.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이 나라만이 아니라고.’
울컥한 마음에 괜히 발톱에 힘이 들어갔다. 날카로운 발톱에 긁힌 돌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먼저 추락했다. 그러나 백호도 역시 해동의 수호신수였다.
「므아아, 내 도움 없이 이기지 못했단 봐라. 수염이 아니라 온몸의 털을 다 잘라버릴 테다냥!」
“진정해, 호랑이님. 청룡님이 좀 다치긴 했어도 그렇게 심하게 밀리고 있는 것 같진 않던걸?”
백호의 등에 잠자코 매달려 있던 란이 빼꼼 고개를 내밀며 그를 달랬다.
「그건 그렇지만냥……. 참, 근데 란. 너는 나한테 바라는 게 없었다냥? 왜 계약하면서 성격을 재구성시키지 않았다냥?」
정령은 술사와 계약하면서 강하게 바라는 술사의 의지에 따라 성격이나 외형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란은 계약할 때 백호가 가진 그 어느 것도 수정하지 않았다.
“나는 호랑이님이 내가 알던 그대로였으면 좋겠어. 그게 편해.”
「기껏 지어놨으면 이름을 불러라냥.」
“응. ‘실라’.”
맑은 웃음기가 섞인 대답에 백호는 짜증스럽게 세웠던 발톱을 감추고 사뿐사뿐 가볍게 달렸다.
먼저 해동군을 도우러 간 콜의 모습이 저만치서 보였다. 서로 상극인 정령과 사령은 부딪히는 족족 서로 함께 역소환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아무리 최상급 듀얼 정령술사라 해도 코르토반은 무척 힘에 겨워했다.
「란. 지금 내게 원하는 건?」
“으음. 사령군단이라더니 진짜 어마무지하게 많네.”
란은 눈앞을 가득 메운 사령들을 둘레둘레 훑어본 후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
“역시 이럴 땐 보스를 해치우자.”
「통도 큰 주인이네.」
백호 실라는 푸르륵 콧김을 뿜어대며 웃었다.
인간의 피를 뒤집어 쓴 사령 사이에 그 잔혹성과 어울리지 않는 한 소년이 서있었다.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바로 그 소년이 무수한 사령에게 둘러싸여 가호를 받고 있는 사령술사였다.
「근데 그 명령, 아주 마음에 든다냥.」
화륵!
백호의 입가에 푸른 불꽃이 넘실거렸다. 심상찮은 열기를 느낀 소년 ‘할더’가 그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내 주인의 바람대로.」
이글거리는 푸른 화염이 눈 깜짝할 새 대지를 뒤덮었다.
* * *
바이칼은 에단이 남긴 명대로 기사단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상태로 열심히 어린 쥬다스를 쫓아갔다.
하윤이 아이를 데리고 간 곳은 텅 빈 방 안이었다. 그녀는 간헐적으로 기침을 흘리는 아이를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런, 열이 있잖아.”
가뜩이나 몸이 약한 아이가 상처까지 입고 돌아다녔으니 성할 리가 없긴 했다.
열에 들떠 제대로 숨쉬기도 힘들어하는 어린 쥬다스를 보며 하윤은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야. 많이…… 아프지.”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으로 아이의 창백한 볼을 쓸었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금방 떨어져나갔다.
“얼른 치유술사를 불러올게.”
하윤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일어났다. 아이를 간호하거나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자식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했다.
“로한.”
“부르셨사옵니까.”
“황자를 보아주게. 내 나가서 사람을 불러…….”
꼬옥!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하윤은 자신의 소맷자락을 붙든 작디작은 손가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가?”
“……콜록.”
억지로 참은 기침이 마른 입술 새로 비집고 튀어나왔다.
일곱 살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곁을 빨리 벗어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차마 함께 있어 달라 떼를 부리진 못했다. 대신 병아리 날개 같이 작고 연약한 손을 내밀어 어미의 옷자락만을 간신히 붙잡았다.
“미…….”
하윤은 행여 바스러질까 아이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미안해. 미안해, 아가야. 엄마가 미안해.”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너를 그렇게 아프게 만들어서. 엄마가 엄마일 자격도 없는 나라서.
그녀는 하염없이 사과하다 손을 놓았다. 간신히 용기 냈을 아들의 손을 그렇게 떨어뜨리고 나서, 그대로 돌아서 방을 빠져나갔다.
어린 쥬다스는 이불 위에 손을 내려놓은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 참. 울지도 않으셨습니까?”
아이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다.
바이칼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과거의 주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청룡 계약명 : 가야
백호 계약명 : 실라
만일 주작과 현무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 저런 형식의 이름을...(..)
음, 그리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후기에만 살짝 남기자면 3부연재의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확정되면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ㅎ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