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83화 (18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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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약속

“아프시잖아요. 제 동생 녀석들은 아플 때 빽빽 잘만 울던데.”

멍이 든 손목이 보였다. 나머지는 옷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그리 멀쩡한 상태일 것 같진 않았다. 심지어 목도 부어올라 숨은 제대로 쉴 수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 상태로 열이 올랐으니 보통 아이들 같았으면 진즉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상황이었다.

“전하께선 왜.”

남들 다 겪는 어린 시절조차 제 어미에게 떼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그렇게.

“하.”

바이칼은 답답함에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뱉었다.

쥬다스에 대한 답답함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아이가 떼를 써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사령에게 좀 먹히고 있던 하윤의 곁에 있다간 또다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하윤의 선택은 옳았고 아이는 이를 이해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걸 왜 이해하냐고요!’

그냥 상황이 전부 다 엿 같았다. 그리고 이 엿 같은 상황을 계속 보여주는 박스도 정말이지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대로 계속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바이칼은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일 눈앞에 있는 이 작은 황자가 실제 쥬다스와 동일인이라면 지금쯤 그가 받고 있을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클 게 분명했다.

해동이 위기인 것과 별개로 한시 빨리 이 박스에서 쥬다스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

“끄응. 열쇠를 가진 보스 몬스터가 분명 이 박스 어딘가에 있을 텐데.”

“부단장님. 그럼 흩어져서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를 주시하고 있던 다른 기사단원이 칼같이 물어왔다.

“확실히 그 편이 빠르겠지. 근데 아오, 단장의 명령을 거스를 수도 없고.”

하필이면 에단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사라진 명령이 ‘대열을 유지하라’인 게 문제였다.

바이칼이 아무리 평소 막 나간다지만 그는 나름 명령 체계만큼은 확실하게 지켰다.

그가 고민에 빠진 사이 치유술사들이 들어와 어린 쥬다스에게 치유력을 불어넣고 건강을 진단한 후 약을 지어주었다. 할 일을 마친 의료진은 그 외 다른 교류 없이 훌쩍 방을 떠났다.

다행히도 치료를 받은 후 아이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양질의 치유력을 전해 받은 아이는 몸에 난 멍이나 상처가 전부 사라지고 기침도 멈추었다.

‘실력은 있나 보네. 전 황후 마마를 조종한 사령술을 끝끝내 짚어내지 못했다기에 맨 돌팔이들인 줄 알았더니만.’

바이칼은 대놓고 혀를 쯧쯧 찼다. 사실 황실 정식 치유술사쯤 되면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고의 성적을 낸 엘리트들이다.

치유술이란 사령과 관계없는 이능이기에 하윤 리에 얽힌 비극을 두고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응?”

어느 틈엔가 얌전히 누워 있을 줄 알았던 아이가 꾸물꾸물 일어나 침상에서 내려와 있었다.

이제 막 치료받아 안정되어가던 몸으로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낌새가 보이자 바이칼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가시면 안 됩니다!”

움찔!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금껏 박스 안에 있는 환상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실제 인간들을 인지하지 못했다.

단순히 인지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연극 속 배우들처럼 정해진 시나리오를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바이칼의 외침에 아이가 반응했다.

“…….”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초점 없이 흐릿한 눈동자 위로 당황한 바이칼의 얼굴이 비쳤다. 지금까지완 다르게 제대로 그를 인식하고 있었다.

‘역시 진짜 전하이신 건가?’

바이칼은 꼭 진행되던 연극에 난입해서 연극배우를 붙잡은 기분이 들었다.

“누, 구?”

바이칼은 다른 환상과는 다르게 반응을 보이는 어린 쥬다스에게 무어라 자신을 소개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니까, 저는.”

“……?”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금색 눈동자에 대고 차마 ‘미래에 만나시게 될 전하의 친위기사입니다’이라고 소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돌이켜보면 그 만남 과정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어휴, 좋긴 개뿔. 따돌림에 막말에, 할 수 있는 패악질은 다 부렸지.’

쥬다스의 세 수족 중 과거 가장 질 나쁘게 굴었던 바이칼이었다. 그는 멋쩍게 뒤통수를 매만지며 답했다.

“바이칼 B.드레이크입니다.”

“…….”

“여기서 B는 브레이브(Brave)의 이니셜입니다. 제 진명이죠.”

어린 쥬다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바이칼은 자신의 진명까지 숨김없이 알려주었다.

“음,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는 마법기사고요.”

“…….”

“그리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허약하여 온갖 추문이 떠돌던 ‘백로황자’.

그 앞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말해준 적 없는 단어가 떠올랐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가 온힘을 다해 펄떡이듯이 바이칼은 용기를 짜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막 말을 꺼내기 직전, 잠깐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 아니야.’

한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백로황자를 경멸했고 혐오했던 소년은 이제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칼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미숙했던 과거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 시절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도록 부끄럽고 죄스럽지만, 그래도 지금은.’

바이칼은 어린 쥬다스에게 손을 내밀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함께 루바흐를 졸업한 친우…… 입니다.”

옛 잘못과 상처를 딛고 그들은 변했다. 지금의 쥬다스가 눈앞에 있는 상처투성이 어린 쥬다스가 아니듯, 그의 주변도 전부 달라졌다.

바이칼은 자신의 주군이 제게 변화할 수 있도록 내밀어주었던 손을 기억했다. 그로부터 받은 신뢰를 다시 돌려줄 차례였다.

그때,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말대로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바이칼은 반색하여 고개를 돌렸다.

“단장!”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아하하, 말은 저래도 칭찬일 거야. 바이칼 경.”

에단의 뒤를 따라 크리스티나와 세이지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크리스티나 님?! 세이지 님도 돌아오셨군요.”

“하. 그대가 뭘 걱정했는지는 알 만해. 하지만 틀렸어.”

크리스티나는 자신을 영락없이 사춘기 가출소녀 취급하는 바이칼을 향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지금까지 맵을 수색해 보았다.”

“예? 그럼 박스 내부를 정찰 다녀오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럼 뭔 줄 알았지?”

‘……사춘기 감성 폭발이요.’

솔직하게 말했다간 감성이 아니라 마력이 폭발할 예감이 들었기에 바이칼의 입이 고요히 다물렸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박스 밖으로 나가는 열쇠는 보이지 않더군.”

“그거 큰일이네요.”

“한 가지 더. 쥬다스 님이 계신 장소가 아닌 곳은 전부 시간이 정지한 듯 움직임이 멈추어 있었다. 그러므로 박스를 구성하는 배경이 쥬다스 님의 기억이란 사실도 확실해졌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그렇단 사실에 바이칼은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렇다면 역시 박스의 심장이 전하이신 건가.’

“하여, 우리는.”

그러나 크리스티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나가야 하나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바이칼은 이어지는 결론을 듣고 기함하고 말았다.

“박스를 구성하는 심장을 파괴하여 이곳을 나간다.”

끼기긱!

푸른 활촉이 정확히 어린 쥬다스를 향하고 있었다. 바이칼은 분개하여 그 앞을 막아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여길 나가기 위해서 이분을 해하겠다고요?”

“잘 알아들었군.”

“……단장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스릉! 에단은 검을 뽑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박스를 구성하는 게 쥬다스의 기억이기 때문에 그 본인이 사라지면 모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바이칼의 입가에 헛웃음이 감돌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박스란 실제가 아닌 환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래서 이 안에선 어떤 짓을 저질러도 상관없다?”

“잘 보도록. 그가 진정 우리의 주군인가.”

바이칼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어린 쥬다스는 그가 알고 있던 본래 쥬다스와 다르긴 했다. 본래의 맑은 금안이 아니라, 무언가 탁하고 불투명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다보면 음습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비켜라. 이건 명령이다, 바이칼.”

바이칼은 여전히 쥬다스의 앞을 막아선 채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황태자의 친위기사가 되어 지금껏 한 뜻으로 검을 들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바이칼은 처음으로 단장의 명을 어기기로 결심했다.

“싫습니다.”

마력이 깃든 바람이 후욱 그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바닥에 서서히 그려지는 마법진에서 주군을 지키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알아본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군.”

바이칼은 문득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는 에단의 모습에서 이상하단 느낌을 받았다.

‘날 공격할 생각은 없다?’

그들로부터 딱히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바이칼에게는 이해한다는 눈빛마저 보내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낌과 동시에 소맷자락에서 작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

옷깃을 잡아온 아이가 두려움에 떨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이칼이 머뭇거리는 사이 크리스티나가 과감히 활을 발사했다.

피잉!

푸른빛으로 빛나는 마력화살이 아이의 손과 발을 꿰뚫었다. 비명 소리는 없었다. 그저 못 박힌 듯 자리에 서서 바이칼의 옷자락을 놓고 축 늘어질 뿐이다.

그 모습을 본 바이칼은 이어지는 공격을 막지 않았다. 그저 떨고 있는 어린아이를 잠자코 품에 안아주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

그러곤 발밑에 그려진 마법진을 촛불 끄듯 훅 꺼뜨려 버렸다. 방어의사가 사라진 그의 어깨를 누군가 잡아당겼다. 에단이었다.

“용케도 알아차렸나 보군.”

“거 좀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면 어디가 덧난답니까?”

“그런 재주는 없다만.”

“하긴 만약 단장이 친절하게 나오셨다면 전 단장부터 의심했을 겁니다.”

바이칼은 씁쓸한 눈으로 농을 중얼거렸다. 그가 뒤로 물러서자 에단이 대신 아이의 앞에 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을 들었다.

콰득!

냉기를 품은 얼음검이 어린 쥬다스의 심장을 찔렀다. 뼈와 살이 일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뜨끈한 핏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아이는 쓰러지는 대신 천천히 입꼬리를 휘었다.

「킥킥. 결국 인간들이란 이렇다니까.」

반짝이던 은발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뼈로 만들어진 날개가 등가죽을 찢고 튀어나오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사령…….”

이를 본 세이지가 앓듯이 중얼거렸다. 어린 쥬다스의 흉내를 내고 있던 건 다름 아닌 프리드와 계약한 사령 ‘릴리스’였다.

그녀는 왈칵 검은 피를 쏟아내면서도 즐겁다는 듯 웃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가엾은 어린아이의 심장이라도 터뜨리려 하잖아.」

릴리스는 여전히 쥬다스의 모습을 뒤집어 쓴 채 그들을 비웃었다.

「겉으론 깨끗한 척 고상한 척하지만 결국 극한의 상황에 처해지면 전부 똑같아지지.」

“그걸 시험해 보고 싶었던 건가.”

「왜? 억울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아무리 환상이라 해도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 친우라 부른 자를 찌른 주제에.」

더 이상 금색이 아닌 검게 물든 눈알에서 눈동자만 구름처럼 희었다.

「아니, 너흰 결국 필요하다면 진짜라도 찌르게 될걸.」

“…….”

「그게 바로 너희들 본질이야.」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본 에단은 얼음검에 묻은 핏자국을 툭툭 털어내며 답했다.

“깨닫게 해줘서 고맙군. 보답으로 네게도 그 ‘본질’이란 걸 알려주고 싶은데.”

「무슨…… 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릴리스가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조금 전 칼에 찔린 가슴께가 하얗게 얼어붙고 있었다.

「뭐야, 이게.」

기분 나쁜 냉기였다. 사령이 가진 음습한 기운과도 닮았으면서 더욱 차갑고 처절했다.

사령이 되면서 잊고 있던 간절함이 되살아나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릴리스는 점점 하얗게 얼어붙는 제 몸을 내려다보다 황급히 자신을 찌른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령이 깃든 검? 어째서 계약하지 않은 자가 사령을 무기로 다룰 수 있는 거지?」

“전하께서 맡기신 검이다.”

「그가…….」

“본래 이름은 ‘레이야’라고 하더군.”

릴리스는 그 이름을 듣고 나서야 얼음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말도 안 돼. 사령의 힘으로 사령을 봉인시킬 수 있다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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