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84화 (18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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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약속

거기까지 중얼거린 릴리스는 그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자가 세상에 한 사람뿐이란 걸 기억해 내고 망연히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연기한 게 진짜 주군이셨다면 결코 과거 따위에 지지 않으셨을 테지.”

에단은 릴리스가 연기한 쥬다스가 환상이 아니란 걸 안 순간부터 그가 진짜가 아니란 사실을 눈치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과거는 이미 한 번 이겼기 때문에 과거가 되었다.”

누구든지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힘들었던 과거라도 현재의 자신이 그 상황에 다시 놓인다면 결코 같은 행동, 같은 감정을 취하진 않으리라.

“……그러니 적어도 그때만큼 힘들진 않을 거다.”

까득 까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온몸이 얼어붙고 있었다. 릴리스가 얼음 속에 갇혀 갈수록 박스로 이루어진 세상도 서서히 함께 얼어갔다.

그녀가 바로 이 박스의 보스였던 것이다.

「안 돼. 싫어! 나는, 난 아직 이대로……!」

릴리스는 발악하듯 소리 질렀지만 이를 멈추진 못했다. 결국 그녀와 박스 안 세상은 전부 하얗게 얼어붙어버렸다.

얼음에 갇히지 않은 건 오로지 박스 안에 들어온 에단 일행과 보스를 처치한 대가로 새롭게 생성된 출구뿐이었다.

에단은 눈앞에 나타난 문을 턱짓해보였다.

“여기로 나가면 되겠군.”

“……가끔 생각하는 겁니다만, 단장.”

바이칼이 질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짜 피도 눈물도 없으시죠? 환상일지도 모르니 한 번만 찔러보면 안 됩니까?”

“헛소리는 나가서 질리도록 들어주도록 하지.”

단호한 대답을 끝으로 그들은 박스 안에서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천금 같은 고요가 사방을 뒤덮었다. 얼어붙은 세상에는 사령 릴리스만이 남았다. 언제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를 기약 없는 봉인이었다.

화앗!

문을 통해 탈출한 기사들은 갑자기 눈을 찌르는 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박스를 벗어나며 생성되는 이 마력광은 언제 겪어도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그중 가장 빨리 시력을 회복한 에단의 귓가에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잘 다녀왔느냐?”

녹색 바람결이 풀린 실타래처럼 팔랑거리며 눈가를 훅 스쳤다.

에단은 저도 모르게 답하는 대신 짧게 숨을 들이켰다. 놀라 크게 뜬 검은 눈동자 위로 일렁이는 은색이 비쳤다.

“으음? 표정이 영 아니구나.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는 게야?”

“……전하.”

어째서인지 목이 메여왔다. 에단은 시큰해지는 코끝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쿵 소리가 났다. 단단한 맨바닥에다가 주먹을 박살 낼 기세로 내리꽂은 그가 기사의 예를 갖추어 주군을 맞았다.

“3황자 전하와 델피아 공녀, 친위기사단 전원 무사귀환 하였습니다. 전하.”

단장의 보고가 있고서야 뒤늦게 박스 밖으로 나왔음을 깨달은 구성원들이 와르르 바닥에 꿇어 고개를 숙였다.

“그래. 다들 무사하여 다행이야.”

쥬다스는 과하게 걱정하거나 기뻐하는 대신 그저 잔잔히 웃어 보였다.

‘어찌 헷갈릴 수가 있겠는가. 이리도 선명한 빛임을.’

에단을 비롯한 크리스티나와 바이칼, 세이지는 전부 잠깐이나마 혼란을 겪었던 스스로를 향해 탄식했다.

그들 입장에선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장면이라 더욱 흔들리긴 했지만 역시 본래의 쥬다스는 환상 따위와 차원이 달랐다.

그에게선 정말로 금색이니 은색과도 같은 은은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이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색상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마치 한겨울에 지핀 화롯불만큼 따스했다.

“전하. 설마 밖에 홀로 남아계셨던 겁니까? 그 프리드 길리아노라는 사령술사와 타락한 현무는…….”

크리스티나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물어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령술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단다.”

처음부터 쥬다스는 박스 안에 끌려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강력한 사령의 힘이 개입된 박스라 해도 정령왕의 가호를 받고 있는 그를 강제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폭주하는 현무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이동하여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잠재웠다.

「이그레트. 전부 되돌렸다.」

때마침 푸른 늑대가 허공에서 퐁 물방울을 터뜨리며 나타났다.

물의 정령이 나타난 걸 보고 나서야 무릎 꿇었던 수하들은 주변의 검은 늪이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해동을 침식하던 검은 늪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더럽혀진 땅을 씻을 맑은 보슬비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늪을 피해 숨어 있던 해동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된 거지?”

“현무님은?”

“검은 늪이 사라졌어.”

쥬다스는 루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타락한 흑현무 ‘헤로드’는.”

차분히 이어지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소멸하였습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도 해동 사람들은 천둥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똑똑히 그 말을 뇌리에 새겼다.

‘현무님이 소멸?’

사방신수를 수호신으로 섬겨온 해동국민들에게 있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 수호신이 타락하여 자신들을 해쳤다는 사실부터 충격이었기 때문에 사실 어디서부터 놀라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망연자실하여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쥬다스는 유니를 불러들였다.

「프리드란 녀석, 사령 릴리스를 잃은 게 엄청 타격이 큰가 봐. 기척을 숨기지도 않고 곧장 수도로 갔어.」

“고, 고맙습니다.”

그때 누군가 울먹이며 인사했다.

쥬다스 일행에 대해 정확한 신원까진 몰랐지만 적어도 무수한 사람들이 검은 늪에 빠져 죽어갈 때 폭주한 현무에 맞서 싸워준 고마운 이들이란 사실만큼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 인사를 시작으로 들불 옮겨 붙듯 여기저기서 감사가 터져 나왔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현무님을 막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심지어 엎드려 절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됨에 순수하게 기뻐하였고 한편으론 수호신이 사라진 것에 대한 상실을 느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이 섞여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쥬다스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한 해동 사람들을 뒤로하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제 다시 수도로 가자.”

“예!”

수하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일어섰다. 환상이라고는 해도 과거 상처투성이 어린 주군을 보고 온 그들이었다.

다시 만난 지금의 쥬다스를 보고 있자면 그저 한없이 감개무량해질 따름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기합이 들어간 일행을 보며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은 쥬다스는 곧 바람의 힘을 사용해 이동을 준비했다.

“에단.”

“하명하시옵소서.”

“수도에 도달하면 먼저 사람들을 돕거라.”

그 말인즉 쥬다스 본인은 그들과 따로 움직이겠다는 뜻이었다. 뜻을 알아들은 에단이 의문을 표하고자 움찔 고개를 들었으나 그와 눈이 마주치곤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들을 도로 삼켰다.

“……명을 따릅니다.”

충직한 기사는 잠자코 복종을 표했다. 미리 양해를 구한 쥬다스는 바람을 일으켜 일행과 함께 순식간에 남쪽령을 떠났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의 시야에 보인 것은 청룡과 주작의 싸움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두 신수는 모두 전력을 다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선 개미 떼처럼 지상을 점령한 사령들과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사람들의 사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과 대지 모두 전장이 되어 불타는 장관에 기사들은 순간 압도되어 무기를 꺼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쿠오오오!

멀리서 괴수가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눈처럼 새하얀 모색을 자랑하는 거대한 체구, 우람한 골격에 걸맞은 거대한 발톱과 긴 꼬리, 그리고 빛나는 파란 눈동자.

바로 계약을 맺고 본체를 되찾은 백호였다. 작은 새끼 호랑이 모습일 때와는 그 기백이 천지 차이였다.

백호는 철갑을 두른 군함처럼 사령들의 한가운데에 뛰어 들어가 날뛰고 있었다.

그 덕에 사령들의 공격이 백호에게 집중되어 있어 병사들의 피해는 적었다.

그야말로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 현무 하나에게 고요히 침식당했던 남쪽령과는 너무나도 다른 광경이었다.

“전원 전투 준비!”

그런 와중에도 에단의 명령이 칼같이 떨어졌다. 넋 놓고 있던 기사들의 손에 저마다 무기가 들렸다.

“우리 목적은 적의 섬멸이 아닌 아군원조다.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고 주변의 피해를 먼저 도와라!”

미리 얘기해 둔 대로 착실하게 움직이는 기사단을 뒤로 한 채 쥬다스는 소리 없이 대열을 이탈했다.

칼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와 사령의 웃음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함성이 점차 멀어지면서 스산한 바람만이 주변을 감돌았다.

그리 멀지 않은 언덕 위에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원흉이 서 있었다.

“선물은 마음에 드셨나?”

쥬다스가 언덕 위에 내려서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돌아보며 물어왔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엔 절망이나 분노 따위는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이번 전쟁에 일절 관여하지 않은 방관자처럼 느긋하기까지 했다.

“조금 아쉽긴 해. 당신의 새 장난감들은 내가 준비한 연극의 끝까지 배신할 생각이 없더군.”

“그게 네가 보고 싶었던 진실이 아니었느냐.”

쥬다스는 프리드가 던진 장난감이란 도발에도 흔들림 없이 직언을 던졌다.

“……진실이라.”

프리드는 피식 웃었다.

“그들이 과연 언제까지 당신의 등을 지켜줄까?”

“프리드, 난 그 아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도 상관없단다.”

충성을 맹세하고 우정을 약속했다지만 그는 그것이 영원불변할 진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쥬다스가 그들에게 가진 신뢰는 깨어지지 않을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니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은 오히려 독이다.

그가 믿고 있는 건 아이들의 선택이었다.

과거 자신들에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굳건한 신뢰를 엿본 프리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지독한 위선자 같으니. 어디 한번 자신이 만들어낸 불행을 보라고.”

프리드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가엾은 레이야. 그 아일 당신 손으로 죽였지. 하지만 비참하게도 소멸하지 못하고 검이 되어버렸더군.”

“…….”

“할더는 어떻지? 당신을 어버이처럼 따르던 꼬마 말이야. 이제 곧 당신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그의 목을 베어버리겠지.”

쥬다스는 잠시 불타는 수도를 내려다보았다. 언덕 위에서 바라다본 전장은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나 역시.”

프리드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수족처럼 다루던 사령 릴리스를 봉인당한 프리드에겐 이제 이렇다 할 방어 능력이 없었다.

“그 손으로 직접 숨통을 꺼뜨리러 온 것이 아니던가.”

제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즐거운 기색이었다.

불행히도 프리드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가 말한 셋은 모두 전생에서 이그레트가 직접 삶을 구원한 아이들이었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자면 지금 인연들보다 훨씬 애틋했다.

“그 말이 맞다.”

후웅!

계약자의 소망에 따라 몰려든 바람이 폭풍처럼 언덕을 휩쓸었다. 천천히 뻗은 손바닥 앞으로 자연계 4속성 정령의 힘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미안하구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현무 소멸! 다음 타겟은....읍읍.

크흠, 이그레트를 제어하는 장치는 사실 인간답지 않은 '균형'에 있었습니다. 지금 그가 처벌을 내리고 악을 제거하기 시작했다는 건 좋게 말하면 인간다워진 것이지만... 그 철벽같던 자기제어가 깨어지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ㅎ

그럼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함께 달려주셔서 언제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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