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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약속
백날 마음속으로만 사랑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상대가 사랑받는다고 느껴야 한다.
그게 사랑을 주는 법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나는 이기적인 위선자가 맞아.”
처음엔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눈앞에서 누군가 죽지 않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렇게 살려놓고 보니 병아리들처럼 그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어느 틈엔가 소중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배신을 당했어도, 자신을 향한 칼끝에 분노와 원망이 깃들어 있었더라도. 도저히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다시 새 삶을 살게 된 후에도 그 마음은 여전했다.
“아무 연고 없는 사람 백이 죽는 것보다 너희가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잘못되었다는 줄 알면서도 전심전력으로 그들을 막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렇듯 커져 무수한 불행을 낳고야 만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되어서도 나는…….”
쥬다스는 정령의 힘을 손에 쥔 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앞머리가 내려앉아 축축하게 젖은 눈가에 달라붙었다.
뜨거운 날붙이로 생가슴을 찢는 것만 같다. 실은 이건 레이야를 죽였을 때부터 남모르게 간직해 온 고통이었다. 아이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듯이 그 역시 아이 셋을 친자식처럼 아꼈다.
그걸 서로 몰랐을 뿐이다.
“흠, 아쉽군.”
프리드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입매는 웃고 있었지만 피처럼 붉은 눈동자만큼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이그레트 님!’
‘꼬맹이가 또 사고 쳤어요.’
‘우아앙! 그치만그치만! 제대로 보여 드리고 싶었단 말이야.’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 막내인 레이야가 코끝이 발개져 엉엉 울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아이들은 각각 정령술, 마법, 검술을 익히고 있었다.
여자아이면서도 가장 신체적 능력이 뛰어난 레이야가 검술을 익혔는데 그날 드디어 검기를 발산할 수 있게 됐다.
신이 나 이그레트에게 보여주겠다며 방방 뛰던 레이야는 결국 컨트롤미숙으로 인해 그들이 머물던 집의 일부를 홀라당 날려먹고야 말았다.
‘훌쩍. 왜…… 혼내지 않으세요?’
울다가 제풀에 지쳐 그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준 이그레트를 향해 레이야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상하게 웃어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망가진 물건은 다시 고치면 된단다, 레이야.’
그는 정말로 집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잠깐 그 당시를 회상한 프리드는 위협적으로 돌풍을 일으키는 정령의 힘을 넌지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직접 내 눈으로 보길 바랐는데. 당신이 만들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전생의 이그레트는 세상을 뒤집을 힘을 가졌으면서도 결단코 심판자의 위치에 올라서지 않았다.
누구도 벌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는다. 그랬던 그가 지금 처음으로 자신들 앞에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단 사실이 무엇보다 가장 프리드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걸로 됐어.”
공평을 추구하여 방관하는 신과도 같았던 자가 드디어 선악을 구분하고 처벌을 내리기 시작했다.
프리드는 바로 그 포문을 여는 시작점이 자신이란 사실에 만족했다.
‘……그래도 말이야. 사실 아주 조금쯤은.’
다 같이 하얀 눈을 모아 주먹만 한 눈 토끼를 만들었던 그때가 자꾸만 떠올랐다.
까르르 웃던 레이야와 투닥거리면서도 나뭇잎을 구해와 토끼귀를 만들어주던 할더.
그리고 이그레트는 그 곁에 앉아 토끼를 만드는 데에 집중하는 아이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그레트 님, 우리도 평범한 가족이 될 수 있었을까.’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콰아아아!
자연계 4대 속성을 압축시킨 힘이 눈부신 빛을 발산하면서 폭발했다.
뜨거운 열기와 냉기가 뒤섞인 돌풍이 벼락처럼 수직으로 내리꽂히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자연의 힘이 융합한 색상은 지독하게 깨끗한 황금빛이었다. 그 순결한 금색에 맞닿은 사령들은 모조리 신기루처럼 흩어져 소멸해 버렸다.
사령과 대치 중이던 사람들과 신수 역시 망막을 찌르는 강한 빛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큭.”
시력과 청력 모든 걸 차단해 버린 정령에너지의 폭발이었지만 사람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생명에너지를 가득 담은 빛에 쬐이자 상처나 흉터 따위가 물에 녹듯 사라져 버렸다.
이는 에단 일행에겐 익숙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쥬다스의 힘임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크리스티나는 놀라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 폭발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돌풍에 휩쓸려 긴 바닷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려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훅 정지했다. 눈을 뜬 병사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 강한 빛과 함께 돌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로 적이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사령군단이 뼛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탓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펄럭!
정적을 뚫고 해동을 상징하는 깃발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용맹하게 선봉에 서 전투를 지휘해 온 성왕 이서윤이 깃대를 부여잡고 힘차게 외쳤다. 승전기였다.
“전투 종료!”
“……!”
“우리는 사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우오오!
왕이 전쟁의 끝을 알리자 그제야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해도 사령과의 전투가 끝났으며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그들을 환호케 했다.
무너진 성벽과 불타 버린 건물들, 그리고 미처 지키지 못해 희생된 목숨 앞에서 터지는 함성은 마냥 기쁨만을 담고 있진 않았다.
“눈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하늘에서 황금색 눈이……?”
이미 해동은 후덥지근한 여름이었다. 한여름에 내리는 눈은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하늘에서 송이송이 떨어졌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기이한 눈송이였다.
쥬다스는 언덕 위에 서서 수도를 가득 메워 파도처럼 울렁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발치에 깨진 모래시계가 떨어져 있었다. 쥬다스는 유리조각이 손에 박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모래시계 잔해를 양 손바닥으로 쓸어 담았다.
「이그레트.」
유니가 그 근처를 빙그르르 돌다 코앞에 멈춰 섰다.
「사령의 기운은 전부 사라졌어요.」
「깨끗해졌다요!」
카니와 토니도 그의 어깨며 머리에 폴짝 내려앉았다. 카니는 쥬다스의 옷자락을 꼬옥 끌어안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후아아. 정말 지긋지긋한 개자식이었어요.」
「개였다요?」
충격받은 토니를 내버려 두고 카니가 마저 말을 이었다.
「끝까지 상처만 주고 가버리다니, 참 주옥같네요.」
「그래도 끝났으니까.」
「그렇다요! 이제 다신 볼 일 없을 거다요.」
토니는 신나서 쥬다스의 머리 위에 드러누운 채 날개를 팔락거렸다.
그 말에 깨진 모래시계를 들고 있던 쥬다스가 손에 힘을 꾹 쥐었다. 검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사라락 흘러내렸다.
그릉!
소리 없이 다가온 루니도 계약자의 곁에 서서 작게 목을 울렸다.
「……다쳤잖아, 이그레트.」
「에?」
「정말!」
유니가 그의 손에 조심스레 내려앉아 유리조각이 박힌 부위를 살폈다. 핏방울이 맺혀 똑똑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거 프리드가 남긴 물건이야.」
「녀석의 기운이 조금은 남아 있다요.」
그의 피와 섞인 검은 모래는 이제 밀가루 반죽처럼 굳어져 동그란 구슬처럼 뭉쳤다. 어떻게 보면 검붉은 보석 같기도 했다.
「아프지도 않아? 왜 그러고 있어. 얼른 가서 치료받지 않고.」
“그러게.”
멍하니 깨진 조각들을 내려다보던 쥬다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어조였기에 다그치던 유니가 움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다시 살폈다.
“아파. 분명 아픈 것 같은데.”
누군가의 죽음에 수많은 사람이 환호한다. 죽어가던 사람들이 살고 그들을 죽이려던 사람이 죽었다. 그 판단을 한 건 쥬다스 자신이었다.
“모르겠구나.”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할 수가 없다.
유리에 찔린 손바닥이 아픈 건지 붉게 물든 눈앞이 답답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저히 모르겠어.”
무수한 군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오로지 승리를 거머쥔 한 소년만이 피눈물을 흘렸다.
해동 역사에 승전으로 기록될 흑사전쟁이 막을 내렸다.
이날, 해동은 사방신수 중 현무와 주작을 잃었다. 대신 새로운 왕가의 핏줄이 나타나 백호와 계약을 맺었다.
그로써 성왕 이서윤은 새로운 백호의 시대가 열렸노라고 선포하였다.
―‘이유란(幼卵)’, 종전과 함께 나타난 해동성국 새 왕녀의 이름이다.
* * *
루바르잔에서 온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는 퍼지지 않았다. 그들의 원조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승리였으나 쥬다스가 자신들의 도움을 공식화하길 원치 않았다.
그로 인해 발생되는 국가 간 손익계산이 불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바르잔 황태자의 원조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공공연한 비밀로 남았다.
싸움이 끝난 후에도 쥬다스는 바로 떠나지 않고 해동 궁궐에 남아 며칠 간 휴식하며 상황 정리를 도왔다.
“주인.”
청룡 가야는 긴 접전 끝에 결국 주작을 쓰러뜨렸으나 당분간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그는 며칠 동안 종적을 감췄다가 오늘 드디어 피곤한 얼굴로 쥬다스의 앞에 나타났다.
“이거.”
불쑥!
가야가 내민 손아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웅크려 있었다. 겨우 참새 정도로 보이는 크기에 깃털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이루어졌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눈도 뜨지 못한 아기 새는 날개에 부리를 묻은 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새로 태어난 주작이로구나.”
“예에?!”
주작과 현무가 소멸했다는 이야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던 일행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정령은 소멸해도 다시 태어나고 그러는 겁니까?”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전의 정령과 같은 아이는 아니야. 이 주작은 전 세대 주작과는 별개의 존재란다.”
이전 해동을 수호하던 주작과 다르게 그럴 의무도 이유도 없는 새로운 주작인 것이다.
새로 태어난 주작과 현무는 더 이상 해동의 사방신수가 아니다.
쥬다스는 수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모든 정령은 저마다의 자리가 있다고 들었다. 아주 작은 하급 정령이라 해도 그 아이의 자리가 비면 새 정령이 태어나 그 자리를 맡는다고 하더구나.”
“오, 그거 편리한 시스템이네요.”
“정령은 인간처럼 후손을 남기는 존재들이 아니니 말이요. 그런 식으로 세상의 균형을 유지해 온 것이지 않겠소?”
쥬다스만큼은 아니나 최상급 정령을 다루는 콜도 정령에 대해선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부연설명에 바이칼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알겠다는 리액션을 취했다.
“정령은 죽어야만 자신과 같은 능력치, 같은 등급을 가진 후대가 태어난다는 뜻이군요!”
“그렇지요. 허허헛.”
콜은 루바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기분이 들어 흐뭇하게 웃었다.
“하온데 전하. 이 작은 새가 새로 태어난 주작이라면…….”
모두 가야의 손바닥 위에 잠들어 있는 주작에 시선을 모으던 찰나, 이번엔 크리스티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 현무도 새로 태어났다는 뜻이 됩니까?”
“…….”
“…….”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꼬집는 바람에 다들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말았다. 그런 일행 사이에서 쥬다스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동물계 정령은 자연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단다. 주작이 날개의 불을 계속 타오르도록 유지해야 하듯이, 현무는 깨끗한 물이 있어야만 살 수 있어.”
“설마 현무는 태어나지 못한 겁니까?”
사령이 점령했던 땅은 아직 상당 부분 회복이 필요했다. 수질의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아 갓 태어난 현무가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루니.”
잠시 후 계약자의 부름에 응하여 물거품을 흩뿌리며 푸른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니의 입에는 등딱지가 없는 새끼거북이 대롱대롱 물려있었다.
「네 바람대로 새로 태어난 현무가 생존할 수 있도록 보호했다. 현재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
“큐웅.”
어린 현무가 낯선 공기를 느끼고 킹킹 울어댔다. 그 모습을 보며 도로 할 말을 잊은 사람들 틈에서 세이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신수도 어릴 때는 귀엽네요.”
“아닌데? 다 커도 귀여울 수 있는데?”
가야가 진지하게 반박했지만 아무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