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6 / 0240 ----------------------------------------------
22장. 개미의 꿈
한동안 해동의 임금 이서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번 사령의 대규모 습격은 나라가 통째로 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난이었다.
해동 백성들이 믿고 있는 수호신들이 둘이나 타락하여 민가를 습격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입은 피해를 제하고 나서라도 국가의 뿌리부터 불안정해질 여지가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도 사람들의 믿음을 다시 붙잡아둘 수 있는 ‘백호의 시대’가 새롭게 열렸다.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백호와 성왕을 칭송했고 더불어 새로이 백호의 계약자로 나타난 왕녀 이유란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그래서 난 왜 또 이 모습이다냐!」
하얗고 작은 새끼 호랑이의 외형으로 되돌아온 백호 실라는 버럭 짜증을 부렸다.
청룡과 마찬가지로 백호 역시도 사령들과의 싸움에서 많은 힘을 소진한 상태였다. 전투의 마지막 순간, 갑자기 터져 나온 밝은 빛줄기에 시력을 차단당하고 아차 하는 사이 사령술사 할더는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범위 내에 있던 모든 사령을 소멸시켰던 엄청난 정령에너지 폭발이었으니 죽은 것인지 아니면 살아서 도망친 것인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쩝. 거의 다 잡았었는데.’
그 당시를 떠올린 실라는 목표물을 놓쳤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할더는 프리드처럼 아주 강력한 사령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대신 무수한 하급 사령군단을 불러올 수 있는 지원형 사령술사였다.
그 숨통을 꺾기 위해선 벌 떼처럼 달려드는 사령들을 전부 해치워야만 했다.
때문에 야심차게 술사부터 처리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어버려 상당히 장시간 전투를 지속했다.
결국 사령술사 할더는 놓쳤지만 엄청난 양의 사령군단을 제압해 낸 실라는 남은 기운을 절약하기 위해 본체를 숨기고 둔갑해야만 했다.
하지만 계약자의 뜻에 따라 백호는 인간형으로 둔갑하지 못했다.
바로 그 백호의 새 계약자, 성왕으로부터 ‘이유란’이라는 이름을 받은 보랏빛 머리의 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헤헤. 편한 모습을 상상하라고 하니까 그 모습밖에 안 떠오르지 뭐야.”
「차라리 청룡처럼 인간형으로 해달라냥! 왜 나만!」
“어? 그치만 백호님…… 아니, 실라님이 사람이 된다는 건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걸.”
냐아아아!
실라는 앞발에 얼굴을 묻고 구슬프게 울었다. 그런 백호의 자그마한 어깨를 누군가 툭툭 두들겼다.
“낙심하지 마, 야옹아.”
「청룡…….」
그래도 같은 신수랍시고 위로해 주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든 실라에게 가야는 훈훈하게 웃으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다 큰 것보단 새끼인 편이 귀엽대. 넌 거기에 날개만 달면 완벽하겠네. 이야, 부러워라.”
「역시 청룡 따위 세상에서 제일 싫다냐악!」
한자리에 모여 있던 루바르잔 사람들은 바닥에 드러누워 바둥거리는 호랑이와 그 곁에 쭈그려 앉아 해맑게 놀려대는 청년을 그러려니 내버려 두었다.
그간 두 신수가 티격태격거리는 광경을 하도 봤더니 이젠 정말 고양이가 냥냥거리는 수준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루 기둥에 기대 잠자코 그 투닥거림을 주시하던 에단이 쥬다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전하.”
쥬다스는 미소로 그 부름에 답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부드러운 표정이었으나 조금 기운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해동에 도달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그가 현재 임하고 있는 ‘순례의 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물론 황제의 부름이 있기 전까지는 특별히 시간에 제약은 없다.
그렇다고 한들 특정한 장소에서 이동하지 않고 장시간 머무르는 건 책잡힐 수 있는 행동이었다.
지금도 황제가 붙여놓은 그림자들이 그의 행보를 은밀히 따르며 기록하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쥬다스의 직속친위대처럼 가까이 붙어 이동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상시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림자’란 호칭대로 정말 목숨이 위태로울 때만 개입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간 특별히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해동 수도에 장기간 머물러 있다간 이를 불필요하다 판단한 황제로부터 귀환명령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익히 알려지기로 루바르잔 황제는 어떤 경우에서도 정에 호소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
쥬다스는 마루에 걸터앉아 태양광이 내리쬐는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에 눈이 시려왔다.
그는 무릎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슬슬 돌아갈까.”
작은 소리까지도 귀 기울여 들은 에단이 깊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제 그만 어미의 고향에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쥬다스는 문득 멀리 반쯤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보이는 낡은 그네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윤이 좋아했다는 그네였다. 어쩐지 이를 타고 놀던 작은 소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어 그네를 향해 목례했다.
일단 결심이 서자 쥬다스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채비를 차려 이서윤을 찾아갔다.
“오, 아가. 왔느냐.”
왕은 여전히 바빠 보였다. 며칠간 제대로 잠에 들지 못해 초췌해진 안색으로도 서윤은 자신을 찾아온 조카를 마다하지 않았다.
“예. 바쁘신 줄 알지만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몰라 따로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는가.”
이서윤은 미안함과 고마움, 아쉬움 등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이 뒤섞여 눈살만 찌푸렸다.
언뜻 화난 것처럼도 보이는 험악한 얼굴을 앞에 두고도 쥬다스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해동은 몹시 따뜻한 나라입니다.”
계절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위험에서 구해주었던 해동 사람들이 건네던 진심 어린 감사인사를 잊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쥬다스 일행은 머리색부터 피부색까지 전부 다른 이방인들이었다. 그런데다 아무리 타락했다곤 해도 건국일 이래로 줄곧 나라를 지켜온 수호신수를 둘이나 소멸시켰다. 좋은 뜻에서 사람들을 구해줬지만 사실 원망하고 두려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해동인들은 순수하게 감사를 표했다. 입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따스함이 민족성에 깃들어 있었다.
“제 어머니는 분명 이곳을 사랑하셨을 겁니다.”
“…….”
“그리고 이 나라와 외숙을 믿으셨겠지요.”
이서윤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았다. 확신에 찬 눈빛이 꼭 죽은 누이가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하니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아요. 우리 해동엔 오라버니가 계실 테니까.’
하윤 역시 해동을 떠나기 전, 같은 말을 하며 잔잔히 웃었다.
“저는 이제 돌아가,”
‘그러니까 저는,’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러 갈게요.’
누이동생의 마지막 인사를 생생히 기억해 낸 서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저 인사치레라고만 생각했던 말들의 무게가 이제야 제대로 느껴졌다. 서윤은 누이의 웃음이 설움을 덮는 가면 따위가 아니라 진실로 원한 용기 있는 선택이었음을 이제야 절절히 실감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눈두덩이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꼭 끓기 시작한 찻주전자처럼 목구멍에서 팔팔 김이 날 것만 같았다.
서윤은 눈앞의 조카를 놓칠 새라 허둥지둥 말문을 열었다.
“쥬다스, 아가, 부디 들어주겠느냐. 네 어미는. 하윤이는 말이다.”
“……?”
두서없이 터져 나온 울음 섞인 이야기에 쥬다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정략혼을 강요당한 게 아니야. 루바르잔 황제폐하, 네 아버지를.”
쥬다스는 이내 이어지는 말을 듣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노라고 내게 말해주었단다. 네 어머니는 이 땅을 떠나 제국에 가서도 결코 불행하지 않았어.”
“…….”
“지키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목숨 걸고 지켜낸 거야. 자신이 사랑한 사람과 너라는 행복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존재를 ‘행복’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그리고 그게 바로 먼 타국에서 건너와 황실 암투에 휘말려 비참하게 죽은 생모였을 줄은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이하윤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그의 존재를 원하고 축복한 유일한 부모였다.
쥬다스는 그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그 자신보다 성왕 이서윤이 더욱 격하게 반응했다.
잘나가다 뜬금없이 체통을 잃고 우는 왕을 보며 곁에 서 있던 호위 정다울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저, 전하. 제 손수건이라도 쓰시옵소서.”
“쿨쩍. 고맙네.”
남들에겐 상남자 소리를 듣는 정다울이었지만, 사실 그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아내가 붉은 매화와 까치를 수놓아준 손수건을 늘 가지고 다니는 제법 다정한 면모가 있었다.
그가 알을 품는 어미새처럼 애지중지 품에 넣어가지고 온 손수건을 건네자 서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다가 코를 팽 풀었다.
“……전하. 옥루를 닦으시란 뜻이었사옵니다만.”
“휴우우! 시원하군. 유용하게 잘 썼다네.”
다울은 더럽혀진 손수건을 우울하게 받아 들었다. 좋은 뜻에서 나섰다가 심적 타격을 입고 조용히 찌그러진 호위를 뒤로한 채 서윤이 쥬다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누이에겐 해주지 못한 말을 이제 와서야 네게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서윤은 그대로 어깨에 손을 얹은 채 힘 있게 붙들고 말했다.
“널 믿는다. 쥬다스.”
그것으로 왕과의 짧은 작별인사는 끝났다.
나라가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할 일이 태산인 이서윤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고 쥬다스는 일행과 함께 곧장 궁을 나섰다.
수도 입구까지 실라를 데리고 따라 나온 란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쥬다스 님. 가는 거야?”
란은 이제 ‘이유란’이라는 이름으로 해동의 왕녀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백호는 해동의 신수이고 란은 그의 계약자이니 당연한 절차였다.
“헤어지기 싫은데.”
그녀는 솔직한 마음으로 칭얼거렸다.
“나도 따라가고 싶어.”
“우리와 함께 가고 싶은 게로구나. 하지만 란아, 나는 네게 집이 생겨서 안심했다.”
“집…….”
란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꽤 익숙해지긴 했지만 아직은 어색한 해동의 궁궐이 보였다. 그곳에 혼자 남는다는 생각에 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아빠가 이 나라 왕족이었대. 그래서 나는 요정족이지만 이곳 일원이라고 사람들이 그랬어. 이름도 이제 란이 아니라 ‘이유란’이래.”
“혹 그리 불리는 게 싫으니?”
“으음, 아니.”
란은 기운 없이 고개를 저었다.
“싫지 않아.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해준 적은 처음인걸.”
마녀라 불리며 홀로 숲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그녀였다.
자신의 태생을 알고 그로 인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뛸 듯이 기뻤다.
이곳에선 누구도 그녀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다. 이제부턴 영혼의 계약으로 묶여 늘 곁을 지켜줄 백호도 있었다.
“근데 쥬다스 님과 떨어지는 건 싫어.”
「이제 보니 완전 욕심쟁이다냥.」
“욕심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실라. 쥬다스 님은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준, 진짜 아빠는 아니지만 아빠 같은 사람이니까.”
사실은 새 이름, 새 집보다 그가 불러주는 ‘란’이란 이름이 더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명석하게 판단해 냈다. 해동 수호신수의 계약자가 해동을 떠난다면 많은 사람에게 절망을 안겨주게 된다.
상냥한 요정족 란은 그런 선택은 차마 내릴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안녕하세요!
컴퓨터가 랜섬웨어 바이러스에 걸려 부랴부랴 조치하고 오는 길입니다.ㅠㅠ
지금껏 살면서 컴퓨터가 모니터나 마우스, 내부부품이 고장나는 경우는 있었어도,
바이러스는 단 한 번도 안걸려봤는데 이번에 어마어마한 독종에게 걸렸네요 ㄷㄷㄷ
이럴수가...OTL
다행히 이그레트 원고는... 메일함과 네이버클라우드에 백업하는 버릇이 있어서 살았습니다.
큰 피해는 없다지만 랜섬 바이러스는 따로 치료방법이 없기 때문에 포맷하여 깔끔해진 피시 화면을 보고 있자니... 크...
문제는 더리더(에스티오)와 두살배기~ 등 차기작 원고가 싸그리 날아갔다는 건데..ㄷㄷㄷ 차기작들은 그냥 쉬엄쉬엄 쓰는거라 백업을 안했거든요.ㅠㅠ 조아라 연재분량 외에 진행된 분량이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제법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 바이러스 조심하시고 늘 백업을 생활화합시다!! ㅠ.ㅠ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ㅠ
(이번 화부터 '22장 : 개미의 꿈' 파트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