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87화 (18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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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개미의 꿈

「청룡. 너도 가는 거냥?」

“엉?”

지나가듯 툭 던진 실라의 질문에 가야가 코를 후비적거리며 대충 대꾸했다.

“왜? 서운하냐?”

「서운하긴 누가!」

털을 바짝 세우며 질색하는 실라를 보며 가야는 피식 웃었다.

“보고 싶으면 하늘에 대고 빌어. 이 몸이 또 위대하신 하늘의 청룡이잖냐.”

「……자꾸 그딴 식으로 굴 거다냥?」

“진짠데? 야옹이 소원 정도는 들어줄 수 있어.”

「므아아, 말을 말아야지.」

청룡도 해동의 수호신수로 오랜 세월 해동을 지켜온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수호신수가 아니라 쥬다스의 정령 ‘가야’다. 그는 계약자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 나라를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도 의외다냥. 귀찮다고 계약 파기해 버릴 줄 알았는데.」

일련의 사건이 끝난 뒤 쥬다스는 가야에게 계약 파기를 제안했다.

애초에 청룡을 살리기 위한 계약이었으므로 이제 해동을 떠나 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가 계약을 지속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가야는 해동에 남길 원할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가뿐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지금이 좋아. 그동안 너무 갈증 났었거든.’

사방신수 중에서도 특히 청룡은 수백 년간 적합한 계약자를 만나지 못했다.

계약을 맺지 못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청룡의 기운은 이제야 막 물 만난 고기처럼 되살아나던 참이었다.

‘주인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정령에게 계약자란 영혼의 동반자잖아. 이제 와서 계약을 파기한다면 배우자에게 이혼당한 사람보다 더 비참할 것 같아.’

그러면서도 가야는 그의 의지를 가장 중시했다.

‘하지만 주인이 바란다면 그렇게 해.’

시무룩해진 청룡의 의견을 듣고 쥬다스는 계약 파기를 철회했다.

마침 백호의 시대가 열린 참이고, 요정족인 란의 수명을 생각한다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인간인 쥬다스가 이번 생을 명대로 누리고 죽은 후에도 란과 백호는 변함없이 해동의 수호자로 남는다.

쥬다스는 청룡 본인이 계약을 유지하고 싶다고 하는 그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아, 물론 내가 게으른 건 사실이지만.”

‘스스로 인정했어?!’

지켜보는 이들의 당황에도 가야는 아랑곳 않고 죽 말을 이었다.

“주인과 계약을 깨면서까지 이 나라에 남아 있고 싶은 건 아니라서. 참, 야옹아. 새로 태어난 현무와 주작은 아직 각성하기 전이니까 잘 돌봐줘야 할 거다.”

「헹.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냥.」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현무와 주작은 힘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제대로 힘을 다룰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가호는커녕 제 몸 하나 지키기 힘들 정도로 나약하다.

백호 실라는 투덜거리면서도 기꺼이 다른 신수들을 돌보는 일을 도맡았다.

“기다릴게.”

그런 백호를 품에 끌어안은 란이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나는 보러가고 싶어도 갈 수 없으니까. 쥬다스 님이 꼭 다시 만나러 와줘야 해?”

사실상 이번 순례의 길을 마치고 나면 제국 군주의 후계자인 쥬다스도 나라 밖으로 나올 기회가 거의 없어진다.

그가 앞으로 짊어질 무게는 거대한 제국 전역에 살아가는 모든 이의 삶이다.

그러니 한 보 한 보가 무거워질 것이며 설령 밖으로 걸음 한다 할지라도 지금처럼 편안히 방문할 수 없을 것이다.

쥬다스는 굳이 그 부분을 짚지 않고 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머리를 토닥거리자 란은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약속하마.”

“……!”

순간 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다시 만나러 올게. 그때까지 건강하려 무나. 란아.”

“응!”

란은 팔을 뻗어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이번 헤어짐이 끝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감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눈물방울이 턱선을 타고 아롱아롱 떨어졌다.

“다녀오세요.”

「잘 가라냥.」

보랏빛 요정과 하얀 호랑이의 배웅을 마지막으로 루바르잔에서 온 손님들은 해동을 떠났다.

* * *

“그런데 전하. 이 방향은 왔던 길이 아니지 않습니까?”

며칠간 말을 달려 해동을 벗어난 쥬다스 일행은 어느덧 생소한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군말 없이 따르던 바이칼이 의문을 제기한 건 길가로 늘어선 온갖 표지판을 발견하고 나서부터였다.

“로울리스 존(Lawless zone).”

커다란 표지판 위에 빨간 물감으로 덕지덕지 칠해진 글자는 대륙공용으로 사용되는 루바르잔 제국어였다.

그 외에도 도박장이나 유흥거리를 안내해 주는 표시들이 가득했다.

대충 꺾어 만든 나무판 위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못에 잠시 시선을 준 에단이 이를 간단히 정리했다.

“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이군.”

때맞춰 그들의 머리 위로 까마귀 떼가 까악 울며 지나갔다. 해동을 벗어났다는 느낌이 물씬 드는 삭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바이칼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거 길을 잘못 든 게 아닐까요?”

「뭐어? 얘가, 얘가. 도대체 날 뭐로 보고!」

은은한 녹색 바람 길을 만들어 길안내를 맡고 있던 유니가 뾰로통하니 볼을 부풀렸다.

하지만 그녀의 불만 어린 목소리는 바이칼에게 닿지 못했다.

“아니. 제대로 온 게 맞다.”

대신 에단이 단호하게 답해주었다.

“현재 위치는 대륙 북부에 있는 무법지대다. 여기부턴 ‘미드가르드’의 영토에 해당하지.”

그 답을 들은 바이칼의 안색이 한층 허옇게 떴다.

“예? 미드가르드요?”

“그래. 올 때는 남쪽 사막지대를 거쳐 왔지만 이번엔 북쪽으로 살짝 돌아서 갈 생각이란다.”

“저, 정말 북쪽을 지납니까?”

“이미 북쪽이다.”

쥬다스와 에단의 호흡이 척척 맞는 답변을 들은 바이칼은 푹 고개를 숙였다.

“삐?”

멋모르는 어린 와이번만이 그의 품에서 날개를 바르작거렸다.

바이칼은 답답해하는 플루비를 로브 밖으로 꺼내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긴 꼬리로 그의 반대쪽 어깨를 휘감아 균형을 잡은 플루비가 기분 좋게 날개를 스치는 바람을 만끽했다.

“전하, 이미 늦은 건 알지만 그래도 말씀드리자면.”

“응?”

“대륙 북부는 전하께서 걸음 하실 만한 동네가 아닙니다.”

평소에 까불대던 바이칼답지 않게 진지한 어조였다.

쥬다스가 멀거니 이야기를 듣고만 있자 바이칼은 끙 소리를 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기 문화는 상상이상으로 더럽…… 지저분…… 아오.”

딱히 황태자씩이나 되는 존재에게 이를 표현할 만한 고급스런 단어를 뇌리에서 찾아내지 못한 그는 제대로 말미를 장식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러자 에단이 작게 혀를 차며 원조에 나섰다.

“대륙 북부를 장악한 미드가르드는 제국 기준에선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에헤이, 그냥 자유로운 정도가 아니죠. 아마 정말로 법이 없다시피 할 겁니다.”

북의 국가 미드가르드.

이 국가를 수식하는 다른 표현으로 ‘무법국가’와 ‘기계국’이라는 명칭이 있다.

두 명칭 모두 다른 국가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점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중 ‘무법국가’라는 표현대로 미드가르드에선 딱히 절대적인 기준으로 따르고 지켜야 할 법 같은 건 없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미드가르드에선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이들을 지배한다. 심지어 왕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혈통에 따른 권력구조가 아니라, 보다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이 상위계층에 올라서는 무한 경쟁체재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를 운영자, 즉 ‘시솝’이라 부르며 추앙하고 섬길 뿐이다.

“그렇다는 건 알고 있단다.”

쥬다스는 미드가르드에 대해 알고서 일부러 북쪽을 경유하는 길을 택했다.

결국 한 대륙 안에 존재하는 이상 제국과 아예 연관이 없을 수는 없는 나라였다. 동맹을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해동과 달리 미드가르드는 제국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미드가르드는 힘을 숭상하는 나라답게 수도 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켰다. 그 역사에는 정복욕 강하기로 치면 손꼽히는 루바르잔 제국도 빠지지 않고 끼었다. 그러다 전쟁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륙 전역에 평화가 지속되는 근래에는 그저 소 닭 보듯 멀리하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너무 다른 문화와 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류하고 친해지기엔 그들 사이에 너무나도 큰 장벽이 존재했다.

‘책에서 보신 것보다 훨씬 충격적이실지도 모른다고요.’

바이칼은 그 걱정을 속으로 삼켰다. 정작 그 자신도 대륙 북부에 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나마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나돌아 다니며 여러 계층의 문화를 접해본 바이칼이었기에 대략적으로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아마 무법국가라는 미드가르드의 문화는 온실 속에서 자라난 루바르잔 지배층들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저열한 형태로 이루어져있을 것이다.

그런 바이칼의 걱정도 모르고 세이지가 순진한 눈으로 형에게 물었다.

“형님. 법이 없으면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나요?”

“어떨 것 같으냐?”

“……사실 잘 상상이 가질 않아요. 범죄자를 치죄할 수도 없고, 피해 입은 자에게 선처할 수도 없고. 또 기준이 없으니 작은 것 하나조차 어디에 맞춰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고. 완전히 혼돈 그 자체잖아요.”

루바르잔 제국 황자로서 당연히 드는 생각이었다.

세이지는 어미의 그늘에 가려 자라 세상물정에 어둡긴 해도 지배층으로 익혀야할 지식들은 착실히 공부해 왔다. 정확히 통치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세이지를 향해 쥬다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 생각하는구나.”

“네. 저런 체제로도 붕괴되지 않고 오랜 역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아요.”

비록 쉴 새 없이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교체가 일어나긴 했지만 미드가르드의 역사는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 중에 가장 길었다.

“아마 그들 사이에 암묵적인 룰이 있을 게다.”

“그렇지만 그걸로 될까요? 결국 분쟁과 혼란은 생기게 마련일 텐데요.”

“어쩌면 그 분쟁과 혼란 자체가 그들에겐 법일지도 모르지.”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세이지가 멈칫했다.

‘싸워서 이기고, 혼란에서 살아남고. 그런 식으로 승자가 모든 걸 취하는.’

여전히 납득할 만한 구조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았다.

세이지가 곰곰이 상념에 잠긴 사이 녹색 정령이 쥬다스에게로 포로록 날아들었다.

「있지, 앞에 큰 장터가 있어.」

「장터? 재밌겠다요!」

쥬다스의 머리 위에 나른하게 드러누워 있던 토니가 반짝 일어나며 제일 먼저 반응했다.

「끝까지 들어, 멍충아. 이 장터가 네가 생각하는 그 장터가 아니란 말이야.」

「으에엥? 이 장터가 그 장터가 아니면 무슨 장터다요?」

「사람을 파는 장터.」

“……노예시장.”

정령들의 대화를 듣던 쥬다스가 어렵지 않게 그 정체를 짚어냈다. 그의 갑작스런 발언에 놀란 눈길이 모였다.

“예?”

“이 앞에 노예시장이 열렸다는 구나.”

맑은 녹색으로 반짝이는 바람의 정령을 힐끗 쳐다본 크리스티나가 진중하게 대꾸했다.

“강자가 약자를 취하는 나라이니 노예를 부림에 거리낄 이유가 없을 겁니다.”

무법국가인 미드가르드에서는 당연하게도 노예를 사고파는 게 불법이 아니었다.

심지어 노예의 아들이라 해도 주인보다 강한 힘을 가졌다면 더 높은 지위로 껑충 뛰어올라갈 수 있는 파격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미드가르드는 종교마저도 자율화되어 있었다.

신성을 국교로 삼아 인간의 고유인격을 존중하고 최소한의 법적장치를 마련해 놓은 루바르잔과는 달랐다.

루바르잔 제국에서는 아무리 하위계층이라 해도 지배층이 함부로 착취하고 목숨을 앗아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서 오는 차이가 일행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타국의 손님들인 그들은 미드가르드의 노예시장에 관여할 권한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Q. 프리드는 완전히 소멸한 건가요?

A. 옙! 현재 '프리드'는 죽은 게 맞습니다. 다만 '할더'의 존재여부는 아직 정확히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 외 사령술사 집단과 봉인된 릴리스 등 미언급된 인물들은 남아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본편에서 밝혀드리도록 하겠습니다.ㅎ

새로운 한 주의 시작입니다!

어젯밤까진 내내 비가 들이치더니 아침하늘은 맑고 깨끗하네요.

듣자하니 대학교는 슬슬 축제기간이라던데... 흐, 부럽습니다. ㅋ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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