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88화 (18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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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개미의 꿈

그러나 노예시장에 관여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던 일행의 발목을 붙든 건 다름 아닌 호객꾼들이었다.

“이야! 우리 도련님들, 타이밍도 잘 맞춰오셨네. 오늘이 마침 딱 장날이요, 장날.”

“말만 해봐 그려. 어떤 물건이 필요하쇼?”

호객 행위는 시장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방문자에게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사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쥬다스 일행처럼 별 뜻 없이 지나치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노예를 보러온 손님들이었다.

그중에는 미드가르드인뿐 아니라 타국에서 놀러 나온 귀족이나 부호들도 있었다.

루바르잔 출신으로 보이는 자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이를 본 세이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신성을 섬기며 지엄한 국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 저런……!”

“타국에서 노예를 사들여오는 건 꽤 흔한 일이죠.”

바이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제국법으로 노예제도가 금지되긴 했지만 사실 루바르잔 내부에도 몰래 노예를 사들여오는 자가 많았다.

“그럴 수가. 처벌을 좀 더 강화해야 하는 건가?”

“아뇨.”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 말란다고 곧이곧대로 지키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아무리 엄한 벌을 내려도 결국 어떻게든 뒷거래를 만들걸요.”

“법은 지키라고 있는 건데.”

“하지만 그 법에는 늘 구멍이 있으니까요.”

청렴결백이란 관리들의 이상향이지만 현실로 이루어지긴 힘들다.

비단 법을 어긴 자만을 치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를 잡고자 하면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그럴듯한 이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만다.

“때론 필요에 의해 일부러 피할 구멍을 만들어두는 경우도 있지.”

쥬다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건 지배층의 융통성에 대한 말씀이신가요?”

“잘 알고 있구나. 무조건 강제하고 억압한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어둠을 만드는 게다.”

“통제할 수 있는 어둠…….”

호객꾼들을 초파리 떼처럼 달고 시장에 진입하자 말을 타고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일행은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하나 그렇다고 그걸 지배층이 전부 묵인해 버리면.”

쥬다스는 천천히 자기가 타고 온 말의 고삐를 끌며 앞장섰다.

“우리가 일전 레이븐 영지에서 봤던 것처럼 관례라 불리는 악습이 생겨나는 것이겠지.”

그 말에 세이지도 농사꾼들을 착취하던 레이븐 영주를 떠올렸다.

남의 물건을 탐내고 여인들을 납치하며 사고로 위장하여 사람을 죽였던 파렴치한 악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악행을 저지를 동안 감찰 나온 황실의 관리들은 단 한 번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럼 형님. 형님께선 이를 어찌 해결하고자 하십니까?”

몰래 타국의 노예시장을 통해 여타 용도로 노예를 들여오는 자들. 그에 대한 처분을 묻자 쥬다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잔잔히 답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게 마련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지.”

“당사자라면…… 설마 노예들의?”

이젠 황태자의 돌발 행동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일동 놀란 다람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노예를 산 자들도. 양측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지.”

남들이야 놀라든 말든 태연히 대꾸한 쥬다스가 브로치에 걸린 인챈트 마법을 발동시키며 겉옷을 벗었다.

그러자 곧장 인챈트가 발동하여 순식간에 머리색이 변하였다. 보석과도 같던 은빛에서 평범한 갈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본 나머지 일행도 차분히 겉옷을 벗어 정리했다.

대륙의 북향이라 하지만 여름에 접어든 날씨는 제법 후덥지근했기에 더 이상 긴 재킷이나 로브를 두르고 있는 건 고문이 따로 없었다.

다른 여행객들의 차림새도 반팔이나 민소매, 속이 비치는 망사 등 무척이나 간소했다.

땡볕에서 바쁘게 일해야 하는 장사치들은 아예 웃통을 까기도 했으며 심지어 여성들의 경우엔 천으로 가슴만 겨우 가리거나 엉덩이 끝에서 살랑거리는 미니스커트를 착용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무법지대인 만큼 의상양식이 제국이나 해동보다 훨씬 파격적이었다.

보이는 족족 노출이 많아 눈 둘 곳을 잃은 바이칼은 힐끗 크리스티나의 낯을 확인했다.

‘음? 생각보다 멀쩡하신데?’

일행 중 유일한 여성이기도 한데다가 품격을 중시하는 공작가에서 자란 그녀였기에 저급한 문화에 가장 취약하리라 여겼다. 물론 안절부절못하거나 얼굴이 빨개지는 그녀를 상상하긴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힘든 내색은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걱정되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바이칼이 의외라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도리어 칼같이 알아차리고 물어왔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아뇨. 그냥 새삼.”

“새삼?”

크리스티나는 수상쩍은 상황에서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들을 때까지 말꼬리를 붙들 것이 분명했다.

그 강경한 성향을 알고 있는 바이칼은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뭐, 거친 여행길에도 잘 적응하신다 싶어서요.”

“말마따나 새삼스럽군.”

그녀가 무력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나 강한 여자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고위 가문 여성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험한 일에 노출되는 건 평민 여성들뿐이다.

루바르잔 귀족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귀애받는 역할이며 신분고하를 떠나 절대로 궂은일을 하지 않는다.

귀족들은 남녀가 동시에 난관에 처했을 때 여성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걸 예의라고 여겼다.

당연히 귀족 아가씨가 여행을 떠날 때에도 우아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준비된 행렬을 꾸린다.

지금처럼 장시간 말을 타고 이동하는 강행군에 여성을 포함시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이 또한 그녀가 자발적으로 자택을 나와 합류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평할 각오였다면 내 발로 걸어 나오지도 않았어.”

크리스티나는 머리끈을 입에 물고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정돈했다.

잘 교육받은 시녀가 여럿 달라붙어 치장해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머리를 묶는 그녀의 모습은 제법 터프해보이기까지 했다.

가느다란 손목을 타고 긴 바닷빛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흔들렸다.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그녀가 가벼이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왜,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늘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보여주는 아침햇살 같은 웃음에 바이칼은 그만 벙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

“허 참. 크리스티나 님.”

“또 뭐지?”

슬슬 귀찮다는 눈으로 대꾸하는 크리스티나에게 바이칼은 진지하게 물었다.

“이제부턴 좀 자주 웃으십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거, 남자는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뭐?”

“특히 시각적 자극에 약하다고요. 제가 볼 땐 크리스티나 님이 방금처럼 웃어주시면 안 넘어갈 남자는 없을 것 같은데요. 천하의 목석이라도 사람인 이상 심장은 뛸 거 아닙니까?”

그때까지 당당하던 크리스티나가 처음으로 얼굴색을 붉혔다. 동시에 웃음기가 싸악 날아가 버린 굳은 표정을 보고 바이칼은 씩 웃었다.

“고민하실 거 없지 말입니다. 장담하죠! 이거 진짜 효과 직방으로 얻으실 수 있…… 끄악!”

뻐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후두부를 가격당한 바이칼이 꺾인 들풀처럼 맥없이 휘청거렸다.

가차 없는 손속을 자랑한 건 가만히 지켜보다 상황에 불쑥 난입한 에단이었다.

그는 입 가벼운 수하를 향해 체벌의 이유를 읊었다.

“무례다. 그리고 시끄러워.”

“……그렇다고 부관을 죽이실 셈입니까?”

“그 정도로 죽을 체력이라면 그게 낫겠군.”

“으익, 낫긴 뭐가 낫습니까! 누구나 단장 같은 맷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요!”

바이칼이 억울한 어조로 항변했지만 에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인파에 자연스레 섞여 들어가 시장의 중앙거리로 진입했다. 노예시장은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장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개 짖는 소리, 갓 조리한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다만 전시된 ‘상품’들이 살아 있는 인간이란 점만이 달랐다.

“도련님들. 밤노예 필요하지 않슈?”

“대량구매 원하시는 분! 세트당 10두씩 묶어서 팝니다. 애들 상태 좋아요. 기초 체력단련은 물론 검술까지 훈련되어 있습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 일로 와 봐요. 싸게 드릴게.”

“평범한 노예들은 이제 식상하시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한정판 토끼 수인족 있습니다!”

초입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공세해대는 호객 행위에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다.

세이지는 벌거벗기고 짐승처럼 사슬에 달아놓은 상품들을 보며 문화충격에 놀라 혀까지 깨물었다.

“토, 토끼…….”

속이 다 비치는 그물망을 옷이랍시고 입혀 놓았지만 결국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벗겨놓았고 전부 도망가지 못하도록 목에다 개목걸이처럼 사슬을 감았다.

인격에 대한 존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행태였다.

이능을 사용할 줄 아는 특수노예들은 취급이 더욱 심했다. 행여나 이능을 사용해 주인을 해치거나 난동을 부릴 새라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려놓았다.

대부분 채찍에 찍혀 구멍 난 등짝이나 터져 짓무른 살갗 등 구타의 흔적이 역력했고 그에 굴복하여 더 반항하지 않고 체념한 상태였다.

상인들은 흉이 질 법한 상처는 내버려 두고 정말 목숨이 걸린 경우에만 최소한의 치료를 해주었다. 그리고 손님들이 찾는 조건에 따라 노예를 끌고 와 보여주며 물건 다루듯 거래했다.

주인이 정해진 노예는 그 자리에서 불에 지진 송곳으로 몸에다 주인의 문장을 새겼다.

이를 ‘낙인’이라 불렀다. 끔찍한 거래 방식이었으나 ‘낙인’은 노예시장에서 일종의 거래증서처럼 쓰였다.

바로 이 낙인을 통해 노예의 소유주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장부에 기록하기 때문이었다.

「으으, 여기 기분 나빠.」

유니가 추운 사람처럼 팔뚝을 쓸며 중얼거렸다.

생명을 다루는 정령에게 있어서 부정적 감정과 폭력이 가득한 이 노예시장은 몹시 불쾌한 장소였다.

쥬다스의 정령들은 전부 실체화를 풀어둔 상태였기에 자연의 흐름에 보이지 않도록 녹아들어 있었다.

「정말이에요. 이럴 바엔 차라리 전쟁터가 낫겠어요.」

「맞아. 거긴 역동적이기라도 하지. 여긴 애들이 너무 무기력하잖아.」

「……둘 다 별로.」

푸른 늑대만이 고고하게 콧등을 찡그렸다. 카니는 문득 답지 않게 조용한 땅의 정령왕을 돌아보며 물었다.

「토니는 어때요?」

「에에, 나요는 나름 재밌다요.」

「얘가 뭐라니. 재밌어? 이게?」

치를 떠는 동료 정령들을 보며 토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곤 열심히 팔을 휘저으며 설명하려 노력했다.

「땅속에서만 놀다가 우연히 밖으로 뽁! 튀어나왔는데 완전 어지러운 폭풍우를 빡! 하고 만난 느낌?」

「뽁? 빡? 뭔 느낌이야, 그건…….」

바람의 정령이 이해할 리 없는 예시였다. 토니는 헤헤 웃으며 쥬다스의 머리 위에 누워 뒹굴거렸다.

「아무튼 신기하다요! 다른 종족들에게선 볼 수 없는 현상 아니다요?」

「어, 그런가?」

「동족을 잡아다 복종을 가르치고 또 다른 동족에게 팔아 넘긴다요.」

유니는 허공에 둥둥 떠서 팔짱을 낀 채 다시 시장을 둘러보았다.

「……그렇네.」

「사람이 사람을 물건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다요.」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바로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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