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89화 (189/252)

0189 / 0240 ----------------------------------------------

22장. 개미의 꿈

정령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쥬다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우르르 따라 멈춘 일행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쥬다스 님?”

그는 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던 크리스티나가 그가 바라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런 사기꾼들 같으니! 당장 내 돈 뱉어내지 못해?”

시끌벅적한 틈새로 한 사내가 수하들을 이끌고 와 어느 천막 앞에서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보였다.

큰 소리에 놀란 상인들이 허둥지둥 천막 아래서 뛰어나왔다.

“어이쿠!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손님.”

“곤란? 곤란은 내가 할 말이지. 보라고!”

철그럭!

화난 손님은 자신이 끌고 온 노예를 사슬째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자 목에 걸린 사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노예가 바닥에 맥없이 널브러졌다.

“이따위 하자 있는 물건을 팔아놓고 반품을 못해주겠다니!”

“자, 자. 일단 진정하시고.”

“이능이 있다며? 이능이고 뭐고 전혀 사용할 줄 모르잖아.”

분노가 가득 담긴 외침에 상인들이 서둘러 노예의 옷을 걷어 등에 찍힌 낙인을 확인했다.

“손님, 이 녀석은 치유력을 가진 상품이군요. 목소리에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치유술사는 다친 상처를 낫게 하는 힘을 가진 만큼 진귀한 이능력자였다. 그 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치유가 가능한 범주가 넓어진다.

아주 높은 등급의 치유력을 구사하는 술사들은 절단된 신체 부위를 깔끔하게 붙인다거나 불치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하는 등 기적에 가까운 이능을 선보였다.

쥬다스를 호위하는 기사단 중 둘이 이 치유술사에 해당했는데 그들은 칼에 찔린 상처를 아물게 하는 정도가 가능한 중급 치유술사들이었다. 일단 치유력 자체가 드물게 발현되는 이능이다 보니 중급 정도만 되어도 훌륭한 기사단원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니 치유력을 가진 노예는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상품으로 팔려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결국 그 노예는 도로 반품요청을 받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노예를 반품하려는 손님은 몹시 분노한 투로 외쳤다.

“노예를 길들이는 건 손님의 책임이십니다.”

“뭐야?”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분명 상품을 구매하실 때 알려드렸습니다. 단순 변심은 반품이 어렵습니다.”

“이 사기꾼 자식들이 지금 누굴 놀려? 내가 이걸 얼마를 주고 샀는데!”

결국 분노한 손님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먼저 구경하고 있던 쥬다스 일행을 따라 다른 구경꾼들이 붙더니 금세 호떡집에 불나듯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주변에선 관중석처럼 우우 야유가 터져 나왔다.

“흠.”

쥬다스는 턱을 짚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다 이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노예를 산 자의 관점부터 알 수 있을 모양이구나.”

“……그러게요.”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형의 곁에 붙어 있던 세이지가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반품하러 데려온 노예는 바들바들 떨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마른 체구에 아담한 키를 가진 여성이었다. 모발은 연한 레몬색으로 숱이 많은 곱슬머리였다.

굽이치는 머리카락 사이로 둥글게 말린 양뿔이 달렸으며 그와 함께 뽀송뽀송 여린 털이 자란 양귀가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양 수인족!’

척 봐도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극명한 특이점이었다. 루바르잔 제국에서는 수인족을 보기 드물었기 때문에 세이지는 더욱 그 노예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 신기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수인족 노예는 정말 잘 팔리겠어.’

그의 짐작대로였다. 일반 노예보다 수인족 노예는 공급은 적고 수요가 많은 초고가 상품이다.

수인은 동물의 특징을 타고난 소수인종이다. 사람들은 희귀한 것에 열광하며 특별한 외형을 가진 수인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각 종족별 희소성과 외모, 능력치에 따라 또 값이 올라갔다.

그런 이유로 이 시장에서 구매층이 귀족과 부호라 하더라도 웬만한 자본 가지고선 수인족 노예를 구하지 못한다.

지금 반품을 요구하는 사내 역시 그 노예를 사기 위해 집안의 기둥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지출을 한 타국의 귀족이었다.

“형님, 이대로 두실 건가요?”

“글쎄다.”

세이지가 보기에 이상하게도 쥬다스는 저 상황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보였다.

여유롭게 구경만 하는 형을 곁에 두고 세이지는 다시 바닥에 엎드린 노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엾네…….’

분명 살아 있는 인간인데도 상품가치로 판별한다.

값을 매겨져서, 그 값어치만큼의 효율을 보이지 못하면 이렇게 찬 바닥에 패대기쳐지고야 마는 것이다.

결국 난동을 부리던 손님은 기존 금액의 80%를 돌려받고 나서야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딱히 치안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법지대니 판결을 내릴 존재도 없다. 그러니 이런 문제가 일어날 경우 그들은 지금처럼 자율적인 해결 방식으로 끝맺곤 하였다.

“어느 한 쪽이 피 볼 줄 알았더니만.”

“에이, 아쉽네. 너무 빨리 끝났어.”

싸움이 끝나자 구경꾼들은 아쉬워하며 굴뚝에서 연기 흐르듯 순식간에 흩어졌다.

더러는 반품한 손님을 비웃었고 더러는 끝까지 판매수칙을 지키지 못하고 반품을 받은 상인을 욕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이야깃거리로 전락해 버린 수인족 노예를 향해선 손가락질만 이어질 뿐이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인지.”

반품을 받은 상인은 짜증스레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봐. 양 공주님, 아픈 것도 아니면서 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거야?”

“…….”

“네 가치는 목소리에 달려 있다고. 이래서야 비싸게 파는 내 양심이 아프잖아. 응?”

아무리 어르고 달래보아도 수인족 노예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상인은 당장 말을 시키는 걸 포기하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더러운 짚단을 깔아둔 철창 안에 그녀를 밀어 넣고 문을 잠가버렸다.

“배고프면 알아서 울겠지. 하여간 요즘 노예들은 대접이 너무 좋아서 하나같이 건방지다니까.”

단순한 철창같이 보여도 복잡한 보안장치가 되어 있는 노예전문 구속장이었다.

상인은 자리에 남아 감시를 하지 않고 철창을 천막 앞에 전시해 놓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행인들이 양뿔이 달린 수인족 노예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지나쳤다. 끊임없이 품평하듯 온몸을 스쳐 가는 눈길에 노예는 쭈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풍성하고 구불거리는 레몬 빛깔 머리카락만이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오래 굶은 게 확실해 보이는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상인의 말처럼 울거나 배고픔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물쇠가 걸린 철창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무릎에 뺨을 기댔다.

‘울지 마. 그냥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림자처럼 살아. 절대 소리 내선 안 돼.’

수인족 노예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특별한 목소리란 지독한 저주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에게 내 목소린 들리지 않아.’

그녀가 소리 내어 보았자 태엽이 돌아가는 오르골처럼 신기하게 바라볼 뿐이다.

들어주지 않을 사람들에게 고통을 호소하기 보단 그냥 입을 막는 편을 택했다.

포옹!

“……?”

웅크리고 있던 노예는 뺨에 닿아 톡 터지는 물방울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치 눈물방울처럼 맑고 투명한 물기가 볼을 타고 주륵 흘렀다. 그녀는 멍하니 손을 들어 제 뺨을 쓸었다.

눈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꼭 누군가 대신 울어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철창 밖에 누군가 서 있었다. 다른 구경꾼들이 모두 흩어질 때까지 자리에 남아 있던 쥬다스였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빙긋이 웃으며 안녕 하고 작게 인사를 건네 왔다.

“따사로운 오후구나. 햇볕이 참으로 좋아.”

마치 평범한 사람을 대하듯 다정한 어조였다.

한평생 물건 취급을 받고 살아온 노예는 그 차이를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철창 가까이 무릎으로 기어갔다.

“그렇지 않누?”

다크 초콜릿을 연상케 하는 한 쌍의 눈동자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도 손님은 화를 내지 않고 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렇게 하자 낮은 철창에 갇힌 노예와 눈높이가 딱 일치했다.

‘예쁜 황금색…….’

정면에서 바라본 금안은 그녀가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빛났다.

그간 귀한 태생이라는 무수한 귀족을 보아왔지만 진정 고귀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인간이지만 동물의 특성을 타고난 그녀의 눈에는 그를 가호하고 있는 투명한 물방울들과 녹색 바람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고 있었다. 마치 시장이 아닌 숲 속에 들어온 것처럼 숨이 탁 트이는 상쾌함이 느껴졌다.

수인족 노예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

“말을 하기 어려운 모양이로구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억압해 온 탓에 말하는 법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당황하여 자신의 목을 감싼 노예를 향해 쥬다스가 철창 사이로 손을 뻗었다.

“괜찮아.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입을 뻐끔거리는 그녀의 눈앞에 따스함을 품은 손이 내밀어졌다.

함부로 와 닿지도, 손가락질을 하지도 않는다.

노예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손에서 흐르는 기운을 조심스레 맡았다.

“정말 네가 말하고자 하는 건 들을 수 있단다.”

적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기운이었다. 수인족 노예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그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존재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그 순간, 노예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입을 열었다.

“저를 구매하실 건가요……?”

순간 쥬다스의 곁에 서 있던 다른 일행들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살짝 미간을 좁힌 에단이 속으로 단언했다.

‘맙소사. 이건 단순히 치유력 따위가 아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걸 듣는 순간 ‘슬픔’이란 감정에 저절로 사로잡혔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답답함과 울컥 치솟아 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훌쩍이기 시작한 기사단원도 있었다.

아마 상처를 치유하는 힘도 함께 실려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건 다른 기능이었다.

쥬다스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로 듣는 이들의 감정을 동화시키는 이능인가.’

간혹 이처럼 두 가지 이상의 이능을 동시에 타고 나는 이들이 있다.

마법사, 치유술사, 정령술사처럼 잘 알려진 능력이 아니라 어느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노예를 살 생각은 없단다.”

그 말에 수인족 노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쉬웠다. 어차피 한평생을 속박당해 살아가는 노예에게 있어 소원이 있다면 좋은 주인에게 팔리는 것이었다.

“다만.”

쥬다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곳 미드가르드가 힘으로 모든 걸 뒤집을 수 있는 나라라면, 그는 기꺼이 사로잡힌 노예들을 위해 싸워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명확한 이유가 필요했다. 섣부른 동정심으로 노예시장을 뒤엎어 버리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너희가 가진 꿈에 대해 듣고 싶구나.”

그래서 그는 노예의 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저 노예는 다른 연재글 주인공인 에스티오와 비슷한 감정계 능력자입니다.ㅎ (물론 남의 감정을 읽거나 지배하여 원하는대로 조종할 수는 없으니 능력의 등급이 훨씬 낮은 편입니다.)

요즘은 매일매일 날씨가 좋네요.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