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90화 (19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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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개미의 꿈

“꿈…….”

철창에 갇힌 양 수인족은 평생 동안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한 단어를 어색하게 발음해 보았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울림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쥬다스는 차가운 쇠기둥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그런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한참을 ‘꿈’에 대해 생각하던 수인족 노예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건……. 없어요…….”

“갑자기 생각해 보려니까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야.”

쥬다스는 ‘없다’라는 표현을 ‘떠오르지 않는다’로 고쳐주었다.

언뜻 작은 차이 같지만 그 한 마디만으로도 수인족 노예는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 꿈을 품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할 정도로 더러운 지푸라기가 깔린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음.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꾸나.”

쥬다스가 문득 질문을 바꿨다.

“지금 이 낮이 지나면 캄캄한 밤이 찾아오겠지. 어쩌면 그때까지도 너는 이곳에서 힘들어할지도 모르지만.”

노예시장은 낮보다는 밤에 손님이 많았다. 어둠이 내린 미드가르드는 낮보다 환히 불을 밝히고 훨씬 더 자극적이고 대담한 방식으로 이목을 끌기 시작한다.

쥬다스는 이를 짐작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구경꾼은 사라지고 개 짖는 소리마저 잦아드는 시간에 너 역시도 잠이 들겠지. 바로 그렇게 편안히 잠든 사이에 네게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이……?”

“그래. 하지만 너는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밤사이 기적이 일어난 줄을 모를 거란다.”

“아.”

“그리고 마침내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그때 너는 가장 먼저 무엇을 보면 ‘기적이 일어났다’라고 느낄 수 있겠느냐?”

수인족 노예는 멍하니 그의 말을 곱씹었다.

‘기적? 나에게 기적은.’

“1년…….”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선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답을 찾았다.

“하루가 아니라. 1년 정도만 죽 잠들어 있었다면…….”

아플 정도로 주린 배를 채우고 싶다는 것도, 자유를 얻어 철창을 나가고 싶다는 것도 그녀의 소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도 더욱 간절했다.

“지금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구나.”

‘맞아. 지금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쥬다스의 말에 그녀는 속으로나마 강하게 인정했다. 당장 이 모든 현실을 버티기엔 너무나도 지쳤다.

하지만 죽는 건 무서웠다. 그러니까 1년 정도 오래오래 잠들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좋은 주인님을 만난다면.”

당장 굶주림을 해결해 봤자 노예의 삶은 다시 허기진다. 철창 밖을 나가 자유의 몸이 된다고 해서 몸에 찍힌 낙인이 지워지는 건 아니다.

상품으로 판매되는 노예는 전부 오랜 시간 철저히 노예로 훈련받거나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였던 이들이다.

스스로 일어선 적 없는 나팔꽃에게서 타고 오를 담벼락을 뺏는다면 꺾여 쓰러질 뿐이다.

마찬가지로 노예들은 노예가 아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쥬다스는 노예 의식에서 분리되지 못하는 수인족을 보며 그 점을 간파해 냈다.

‘이들을 당장 풀어주는 건 곧 물고기를 물 밖으로 꺼내는 짝이나 다름없구나.’

책임질 수 없는 구원은 결국 독이다. 그의 금안이 잠시 짙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다시 갇힌 노예에게로 향했다.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

수인족 노예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것과는 다른 뽀송뽀송한 양의 귀가 시무룩하게 축 늘어졌다. 그대로 자리를 떠날 것처럼 보였던 쥬다스는 멈칫 돌아서려던 걸 멈추고 그녀를 다시 불렀다.

“참, 아이야.”

누가 봐도 그녀는 ‘아이’라 불릴 나이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쥬다스가 부르는 호칭에는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목소리가 아주 어여쁘구나. 참으로 듣기 좋다.”

“…….”

“그렇지, 노래를 한다면 퍽 잘 어울릴 것 같아.”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칭찬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저주라 여기고 숨겨왔던 수인족 노예는 낯간지러운 느낌에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가슴께에 모아 꼭 쥐었다.

‘노래?’

가사까진 몰라도 알고 있는 멜로디는 몇 가지 있었다. 노래는 인간들의 전유물이다. 하찮은 노예는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 그리 생각하고 동경해 왔다.

‘내가 노래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쥬다스는 이 짧은 만남 동안 그녀에게 지금껏 접해본 적 없는 새로운 감각과 소망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수인족 노예가 벼락 맞은 나무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던 사이 돌아선 쥬다스에게 가야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주인.”

‘……저 사람도 노예인가?’

양 수인족은 아리송한 눈으로 쥬다스와 가야를 번갈아보았다.

가야는 노예치곤 차림새가 멀쩡한데다 태도도 몹시 건방졌다. 겉보기에는 젊은 청년처럼 보이는데 대충 풀어헤친 옷자락에 손을 넣고 옆구리를 벅벅 긁는다거나 하는 행동은 배나온 아저씨를 연상케 했다.

“배고프다. 밥 먹자.”

심지어 반말까지 했다. 뻔뻔스러우리만치 당당하게 식사 시간을 챙기는 가야를 보며 수인족 노예는 그가 결코 노예일 리 없다고 확신했다.

“아까 오면서 보니까 초콜릿 튀김 팔더라. 그거 어때?”

“무진장 느끼할 것 같은데요.”

“그럼 초코바나나 튀김.”

“초코에 바나나가 붙었을 뿐이잖아요?!”

바이칼의 열띤 반박에 가야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하품했다.

“하아아. 거 까다롭네. 자꾸 편식하면 키 안 큰다, 너.”

“……가야 님이 그런 말씀하시면 진짜 같으니까 하지 말아주십쇼.”

하늘이 내리는 성장 중단선고 같은 걸 받은 기분이 든 바이칼이 우울하게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 멋지게 큰 편도 아니었다. 에단과 비교하자면 한참 모자랐고 동년배들 사이에선 평균 수준에 해당했다.

말하자면 2살 어린 쥬다스와 같은 수준이었으니 더 신경이 쓰이는 정도였다. 그래도 아직은 성장기였으니 충분히 더 자랄 가능성이 있었다.

한 발짝 앞에서 혀를 차는 에단을 억울함과 부러움이 뒤섞인 눈으로 응시한 바이칼이 푹 한숨을 쉬었다.

“넌 좋겠다, 플루비. 물만 먹으면 자랄 수 있어서…….”

“삐잉?”

얌전히 그의 어깨 위에 자리 잡고 앉아 졸고 있던 플루비가 제 이름을 듣고 깨 주황색 눈을 끔뻑거렸다.

“흐음. 플루비는 정말 물만 먹고 살아?”

“블루 와이번이니까요. 뭐 간식 정도야 종종 챙겨주는 편입니다만.”

완전히 잠이 깬 플루비는 간식 얘기에 지레 신이나 긴 꼬리를 살랑였다.

“튀김류도 먹나?”

“이놈 식성 자체는 잡식성입니다. 어릴 때 습관 탓인지 유독 고기를 좋아하긴 하더라고요. 튀김도 기름기가 많으니 좋아할 것 같긴 한데.”

“그럼 역시 튀김으로 정하자.”

“아니, 그러니까 왜 우리 점심 메뉴가 플루비 입맛으로 정해지는 거냐고요!”

수인족 노예는 시장의 소음과는 다른 분위기로 왁자지껄 떠들며 사라지는 쥬다스 일행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속에 죽어 있던 꿈이 희미하게 등불을 밝히다 금방 다시 사그라졌다. 그녀는 끌어 모은 무릎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노예는 정해진 삶을 살 뿐이다. 꿈을 이야기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녀 자신과 달리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를 보고 조금 설렜을 뿐이다.

‘기적…….’

그의 맑은 금안은 놓치기 싫어 꽁꽁 숨겨온 목소리를 냈을 정도로 보기 좋았다.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이었지만 그마저도 햇빛을 받아 찰랑이는 수면처럼 반짝였다.

‘사실은 그분을 만난 오늘이야말로 기적일 거야.’

그동안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던 목소리가 그에게만큼은 닿았다. 평생에 찾아올 리 없을 그런 만남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편안한 표정을 짓던 수인족 노예는 문득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미풍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긋.

쥬다스를 가호하던 바람의 정령이 그녀의 곁에 남아 미소 짓고 있었다.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노예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일단 노예로 교육받는 자는 감히 주인에게 반항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죽이는 과정을 겪는다.

그 과정은 무척 정교하고 오랫동안 지속되며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유의지를 완전히 말살한다.

종을 울리면 침을 흘리게 되는 개처럼 주인에 대한 복종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억하게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노예가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 꿀 비싼 값에 거래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단순히 사람을 납치한다고 해서 아무나 노예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은 늘 자유 의지를 추구한다. 편해지고자 하는 욕망,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야망이 무조건적인 복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흠. 역시 어렵겠지.”

단호하게 반대를 표명하는 에단을 보며 쥬다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차마 주군의 뜻을 따르지 못한 에단은 침울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디 소신의 불복을 벌하소서.”

“아니, 언제나 내게 진솔하게 의견을 표해 주어서 고맙게 생각한단다. 에단.”

“하오나.”

“앞으로도 그리해 주려무나.”

이어지는 격려에도 에단의 굳은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늘 현명하고 자애로워 수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주군은 가끔 폭탄발언을 해서 그들을 발칵 뒤집어놓곤 했다. 다름 아닌 지금처럼,

‘아무래도 양측 입장이 난해하구나. 이럴 땐 아예 하룻밤 정도 직접 노예의 입장이 되어보는 게 확실히 알 수 있을 터인데.’

따위의 제안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곤 하는 것이다.

발언이 아니라 망언에 가까웠지만 에단은 단호하게 이를 잘라냈다.

그가 아무리 쥬다스를 주군으로 모시고 그의 명을 따르는 기사라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제국의 황태자가 평민도 아니고 한낱 노예 노릇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주인을 물심양면으로 섬기는 에단으로선 극단적으로 택하자면 차라리 이를 막다가 목이 떨어지는 편이 나았다.

다행히 쥬다스도 그냥 던져본 말인 듯 수하들의 정색하는 면면을 보고 농담처럼 웃으며 지나갔다.

“해서, 우리는 노예시장의 밤를 파고 들어간다.”

‘그래도 조금쯤은 더 신중하고 싶었는데 말이지.’

쥬다스는 속으로 난처한 한숨을 삼켰다. 그로서도 수하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이제 전생의 평민 이그레트가 아니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 사실은 알았지만 시도라도 해보고 싶었다.

사실 그가 지금 신중하고자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실패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사람은 결코 완벽할 수 없으니.’

그는 자신의 선택이 틀릴 수도 있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독선이 될까 두려웠다.

쥬다스는 마치 발밑에 기어 다니는 개미를 밟아죽일 수 있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재미로 죽일 수도 있고 개미가 집에 들어와 해칠까 우려되어 짓밟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판단은 늘 자기 시야에서만 이루어진다.

어쩌면 ‘구하고 싶다’, ‘고치고 싶다’라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걸지도 몰랐다.

노예시장이 불합리하고 불행한 구조라는 건 그 자신만의 가치관일 수도 있다.

그가 세상에 관여하는 순간 모든 것은 손쉽게 이루어질 테지만 그건 결국.

‘한 사람의 생각이 세상의 질서가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선택을 기뻐했던 프리드가 한 이야기와 같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눈에 문제가 좀 생겨서... 원고작업 중에도 이상이 생긴 상황입니다..ㅠ.ㅠ;

어느덧 한주의 마지막인 금요일이 되었네요. 저는 금요일 저녁 시간이 제일 행복하더라구요.ㅎ

다들 평안한 밤 보내시고, 즐거운 주말 맞으시길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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