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91화 (191/252)

0191 / 0240 ----------------------------------------------

22장. 개미의 꿈

쥬다스는 일단 노예시장을 빠져나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낮은 언덕에 말을 풀어 쉬게 했다. 그리고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노예시장에 대한 정보를 세세하게 수집하였다.

「이런 건 유니가 전문인데 아쉽네요.」

「나요도 잘할 수 있다요!」

「으응, 물론 땅도 사방에 펼쳐져 있으니 웬만한 정보는 다 모아올 수 있긴 하지만.」

흰 치맛자락을 다소곳하게 모아 쥔 카니가 곁에서 의욕을 불태우는 토니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필요한 정보를 판별하고 정리해 주는 역할은 유니가 야물게 잘하는 편이니까요.」

「우으으. 그건 그렇다요…….」

토니는 순순히 그 차이를 인정했다.

계약자가 원하는 정보를 중요도별로 정리해서 전달하는 역할은 주로 바람의 정령인 유니가 도맡아 해왔다.

그러나 유니는 현재 쥬다스의 곁에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지만 지금은 다른 임무를 맡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 고맙다.”

쥬다스는 유니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정령들을 다독여 주었다.

저녁을 지나 밤에 가까워지는 시각, 하늘이 갓 짜낸 물감처럼 검푸른 색상으로 어둑어둑 물들어갔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시장은 길목마다 밝혀둔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조명도 한 가지 종류가 아니라 붉은색, 녹색, 파란색 등 형형색색의 불빛이 번쩍거려 마치 축제라도 하는 듯 화려했다.

“참 모순적이네요.”

“세이지.”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장소가, 가장 큰돈이 오가는 상류세계라는 것이.”

지금까지 세이지는 형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왜 루바르잔 역사에서 황제의 후계자가 순례의 길을 다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단순히 신하들에게 대접을 받고 권력을 즐기며 편안히 여행을 다니라는 취지가 아니었다.

세이지는 포탈을 이용하지 않고 험준한 여행길에 몸소 부딪히고자 한 쥬다스의 선택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몬스터도 사령도 없는데.”

지금 세이지의 눈에도 보였다.

“왜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걸까요?”

힘을 가진 자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람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사회.’

지도자란 결국 삶을 지키는 자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정치하며 지배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도 자신들을 지켜주는 군주를 진정으로 따르며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저 당연히 올라야 할 권좌에 올라, 힘을 휘두르고 억압하여 봤자 지금 노예를 부리는 무도한 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루바르잔을 그리 만드는 게 우리 역할이지 않겠느냐.”

쥬다스는 우울해 보이는 동생을 향해 빙긋이 웃어주었다.

“물론 여긴 루바르잔이 아니니 우리가 황족으로서 의무감을 느낄 필요는 없지.”

“예? 그렇지만 형님은…….”

세이지는 의무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면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밤까지 기다린 쥬다스에게 의문을 느꼈다.

그 의아한 눈빛에  쥬다스는 작게 미소를 흘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미드가르드에 왔으니 미드가르드의 법을 따라볼까, 하고 말이다.”

“미드가르드의?”

‘무법국가’라 불릴 정도로, 미드가르드에선 확고하게 지켜야만 하는 법이 몇 가지 없었다.

세이지가 무슨 말인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쥬다스는 미리 챙겨둔 가면을 착용했다. 시장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모양이었는데 색상은 검은색으로 눈과 코까지 가려주며 턱선은 내보이는 반가면이었다.

사실 노예를 사는 것이 몇몇 나라에서는 불법이기도 했고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닌지라 야시장에 찾아와 거액의 돈을 주고 노예를 구하는 귀족들은 주로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리곤 했다.

그 풍토를 따라 자연스럽게 얼굴을 가린 쥬다스는 이번엔 챙겨온 고급 망토를 꺼내 두르고, 거기에 검은색 천으로 문양을 감싼 황룡쇄를 지팡이처럼 한 손에 드니 영락없이 부유한 집안의 귀족 도련님으로 보였다.

멍하니 변장인지 변신인지 모를 형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세이지에게 불쑥 코앞으로 가면이 내밀어졌다.

“자아, 자. 세이지 님도 얼른 이거 쓰시죠.”

“어? 나도?”

“‘나도?’라뇨, 무슨 말씀이십니까? 연극의 꽃은 손발이 잘 맞는 조연들이라고요.”

“하아?”

어느 틈엔가 바이칼도 윤기 나는 검은색 고급 로브를 걸치고 마법기사다운 태를 다듬어둔 상태였다.

그뿐 아니라 여행객 차림으로 있던 에단과 크리스티나도 환복을 마친 상태였다.

에단은 호위기사의 차림이었고, 크리스티나는 모처럼 외출용 드레스를 차려입어 레이디로 치장했다.

“자, 잘 어울리……! 아니, 다들 어느 틈에.”

“코르토반 님과 나머지 기사들은 일반인으로 위장하여 근처에서 호위하기로 하였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면과 재킷을 받아 착용하는 세이지에게 바이칼이 덧붙였다.

쥬다스로부터 대충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준비할 줄은 몰랐던 세이지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동생을 보며 쥬다스는 황룡쇄를 어깨에 걸친 채 느긋하게 일러주었다.

“지금부터 우린 노예를 사러 온 귀족들이다. 노예에 대해 호기심이 많으며 필요하다면 방탕하게 소비할 생각도 있지.”

“……그런 역할을 연기하란 뜻인 거죠?”

“영 어렵다면 그냥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아.”

사실 자신이 없긴 했다. 세이지는 처음 여행을 시작할 무렵 들렀던 레이븐 영지에서 쥬다스가 보여준 ‘바보놀음’을 떠올렸다.

‘그땐 정말 형님이 이상해지신 줄로만 알았지.’

그만 깜빡 속을 정도로 기가 막힌 연기였다. 혹시 루바흐 학원에서 연기 수업도  가르치나 싶을 정도로 그럴듯했다.

“네, 한번 해볼게요.”

“좋아. 그럼 출발하자. 각자 위치에서 조심해서 움직이도록 하여라.”

“예!”

먼저 일반 여행객 차림의 기사들이 노예시장 내부로 투입되었다.

그리고 바람과 불의 정령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는 콜이 그들을 따라가 신호를 주고받는 임무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잠시 간격을 두고 쥬다스와 세이지,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이 한 일행으로 뭉쳐 시장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방문을 환영합니다!”

대낮처럼 환히 불을 밝혀놓은 시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입구를 지키는 덩치들이 우렁차게 인사했다.

말로는 환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야시장 입장 요금을 받는 관리인들이었다. 요금을 지불하고 시장에 들어서면서 일행의 표정은 굳어졌다.

세이지는 그 표정이 가면에 가린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와. 같은 노예시장인데도 분위기가 낮과는 완전 딴판이구나!’

낮에는 말마따나 물건을 파는 시장처럼 각자 노예를 진열해 놓고 판매했다면, 밤의 노예시장은 하나의 거대한 경매장이었다.

자잘한 천막을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서커스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무대를 마련했다.

무대에는 쉼 없이 다양한 노예가 올라왔고 낮 시장에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가격에 팔려 나갔다.

시장에 몰려든 인파는 많은데 딱히 좌석이 지정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일찍부터 앞줄에 자리 잡은 자들이나 힘으로 밀고 들어간 강자들 위주였다.

“안녕하십니까요? 꼬마 도련님들.”

“후후. 처음 와보시나 봐요? 귀여워라.”

이제 막 시장에 들어와 초보 티가 흐르는 쥬다스 일행에게 두 남녀가 접근했다.

대머리가 홀랑 까진 남자와 노출이 심한 옷을 걸친 금발미녀였다. 그들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참 복잡하죠? 이런 데에선 가이드 없이 돌아다니면 아주 큰일 납니다. 아닌 밤중에 뒤통수 맞으실 수도 있다구요.”

“가이드?”

“하하! 저희야 뭐 야시장 안내도 해드리고. 경매장 참여도 도와드리고. 그 외 밤중에 필요한 이런~ 저런~ 일을 도와드립죠.”

“노예사용법은 아시나요? 처음이시면 우리가 잘 알려드릴 수 있는데에. 응?”

상대가 가이드도 모르는 초짜라는 사실을 알자 접근해 온 남녀는 은밀한 시선을 교환했다.

아직 어리고 순해 보이는 세이지에게는 남성 가이드가 붙어 유려한 말발로 가이드 고용을 종용했고 쥬다스에게는 여성 가이드가 붙어 애교를 피워댔다.

“아이 참, 오빠들. 놀러온 김에 화끈하게 놀고 가요.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구경만 하고 갈 건 아니잖아?”

쉽사리 고용한다는 답이 돌아오지 않자 여성 가이드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흐응, 이제 겨우 십 대 중후반? 이 나이 때 귀한 집 애들이야 뭐, 적당히 자극만 해줘도 쉽게 넘어가지.’

그녀는 상대를 유혹해 보고자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렇게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속삭이던 순간이었다.

“어때요. 내가 자세히 알려줄……꺅!”

화륵!

갑자기 허공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화들짝 놀라 볼품없이 엉덩방아를 찧은 여성 가이드의 턱에 검은 지팡이가 와 닿았다.

“싸구려 수법. 과연 시장 바닥답긴 하구나.”

“……아.”

“지저분한 건 그럭저럭 봐줄 만하지만.”

지팡이 끝에 붉게 빛나는 정령이 파앗 실체화하여 내려앉았다.

“나는 천한 것들이 건방지게 구는 걸 싫어해.”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던 소년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두 가이드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십여 년 이 바닥에서 구른 가이드로서의 촉이  경보를 울려댔다. 그 경보를 종식시키는 명령이 떨어졌다.

“똑바로 꿇어.”

‘망했다.’

두 가이드는 부리나케 자리에 무릎 꿇었다. 가면 사이로 언뜻 엿보이는 금안이 사자의 눈동자처럼 냉혹했다.

그들은 상대가 어설픈 초짜가 아니라 지배하는 일에 익숙한 맹수의 새끼였음을 깨달았다.

가이드를 무릎 꿇린 쥬다스는 에단에게 눈짓하여 그들에게 비용을 지불케 했다.

“마침 정보가 필요했던 건 사실이었으니 너희들을 고용하겠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는 평소 그들이 받던 비용의 스무 배가 넘었다.

가뜩이나 귀족들 상대로 비싼 값에 후려치던 가이드 비용이었으니 그 스무 배가 넘는 돈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엄청난 고위귀족!’

이대로 잘 만하면 망한 게 아니라 제대로 크게 한 방 물었다는 생각에 풀죽어 있던 가이드들의 눈빛이 살아났다.

“마, 말씀만 하십쇼. 무엇이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1열.”

“예?”

남성가이드는 간신히 미소 짓던 입매 그대로 굳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하는 사이 쥬다스가 단호하게 재차 언급했다.

“이 경매장에서 최고로 좋은 자리.”

그는 오만하게 사람들이 바글바글 들어찬 무대 주변을 턱짓했다.

“뒷자리엔 흥미 없거든.”

“그, 그게. 하지만 1열은 이미 자리가.”

“무엇이든 안내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 뜻이 아니잖아! 적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걸 맡기라고오오!’

방금 했던 말이라 무를 수도 없었다. 가이드들은 이제 표정관리에 완전히 실패했다.

울상이 된 두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입모양으로 방법을 강구했다. 하지만 중간열도 아니고 1열에 자리를 마련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현재 1열을 차지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과도 같았다.

“흠. 가이드가 꼭 둘일 필요는 없겠지.”

쥬다스가 지팡이를 짚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그들에겐 꼭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불금 보내고 계신가요? ㅎ

핫핫. 모처럼 12시 연재를 하러 왔습니다 (?)

참, 본래 학원 루바흐에서 만나 친해졌던 아이들(치료술사 리이나, 정령술사 리베흐, 그 외 마르젠 등)은 3부에 등장 계획이었습니다.ㅎ 다만 3부가 이어서 진행이 될지 안될지는 아직 결정이 나질 않아서.....(...)

그럼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더리더-에스티오'의 연재도 재개하였습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