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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개미의 꿈
에단의 손이 소리 없이 검 손잡이에 올라가는 걸 본 가이드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대로 못하겠다고 드러누웠다간 정말로 차가운 시신이 되어 눕게 생겼다.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결국 선택은 하나였다.
“지금 바로 1열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에라 모르겠다 싶은 생각으로 돌아섰다. 사람이 가득 들어찬 경매장을 뚫고 들어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물론 진상 손님들을 제재하기 위해 가이드 연합이 있지만 반항했다간 도움을 받기도 전에 이미 저세상으로 떠날 게 분명했다. 강자에겐 복종하는 수밖에 없다. 미드가르드의 철칙이 여기서도 빠짐없이 적용되었다.
그들은 억울함을 느끼기보단 당연한 심정으로 쥬다스의 명에 따랐다. 그가 보여준 무력은 불의 정령 하나뿐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귀족이라서가 아니라 확실한 강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군소리 없이 일단 1열로 안내해 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문제가 있었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요.”
“뭐? 지나가긴 어딜 지나가?”
아직 1열에는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중간 지점을 지나면서부터 벌써 다른 손님들과 부딪혔다.
중간 열부터는 힘 좀 깨나 쓴다는 권력층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큰돈이 오가는 시장이니 몰려드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고위계층일 수밖에 없었다.
자리싸움 끝에 힘들게 얻은 위치를 양보하려는 멍텅구리는 이곳에 없었다.
“지나갑니다요. 죄송합니다만 손님. 잠시만…….”
“죄송한 줄 알면 저리 꺼져.”
“왜? 왕이라도 행차하셨냐?”
킬킬, 한차례 비웃음 세례가 쏟아졌다. 쥬다스를 안내해 온 두 가이드의 표정이 눅눅하게 짓무르자 다른 손님들에게 고용된 가이드들이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어허! 이거 알 만한 가이드들이 왜 이래? 겁도 없이 어딜 끼어들려고.”
“법은 없지만 상도는 지켜야지. 어떤 자리를 원해서 그러나? 형님들이 구해다 줘?”
“1열까지 가야 합니다요.”
“……?”
안내를 맡은 이상 이렇게 되리란 건 예측하고 온 쥬다스의 가이드가 단호하게 답했다.
“1열 말이요. 그러니까 비켜주십쇼.”
당당하게 1열을 가야겠다는 대꾸에 왁자지껄하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워낙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이보게, 초짜 도련님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가이드들 대신 가면을 쓴 다른 손님이 비아냥거리며 조언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에서 누리던 귀족 지위는 여기서 아무 쓸모없수다.”
“맞소. 귀족이든 왕족이든 알 게 뭐야? 여긴 미드가르드인데.”
다른 몇몇 손님도 수군거리며 동조했다.
“설령 그대들이 다른 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우리가 비킬 이유는 하등 없다는 거요. 좋은 자리를 맡고 싶으면 지나가는 자리마다 돈을 내시오. 그게 싫으면 시솝 정도의 무력을 갖추고 죄 짓밟아버리든가.”
미드가르드는 같은 대륙 내에서 제국이 유일하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땅이다.
그만큼 국력이 강했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머리 숙이는 대상은 미드가르드의 운영자, 즉 시솝뿐이다.
“흠. 시솝?”
알겠다는 듯 짧게 읊조린 쥬다스는 곧 가볍게 웃었다. 늘 짓던 편안한 웃음이 아니라 상대를 깔아보는 오만한 미소였다.
“이거야 원, 노예를 사러 왔더니.”
그는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 없는 이들을 힐끗 눈으로 훑었다.
“과연 어딜 봐도 노예가 되길 자청하는 이들뿐이로구나.”
“뭐요?”
“시솝의 힘 아래 복종하는 너희가 저 무대의 노예나 다를 바 무어냐.”
야시장을 즐기러 온 인원 대부분이 자존심 높은 고위계층이었던지라 도발에 넘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건방진!”
챙!
누군가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쥬다스를 노린 날붙이는 그에게 닿기도 전에 에단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빠르다.’
덤빈 사내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사람들도 놀라 흠칫했다.
아무도 그가 움직이는 걸 본 적 없는데 이미 공격을 막아서고 상대의 검을 동강 내버렸다.
단 일격만으로 완패. 정말이지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계속 안내해.”
“예? 예, 예!”
벙 쪄있던 가이드가 각 잡힌 자세로 앞장섰다. 그러나 어렵사리 자리를 차지한 다른 손님들은 그 정도 무력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놈들을 제압해!”
“저 자식들 호위는 제아무리 날뛰어봐야 검사다. 근접전이 아니라면 쪽을 못 쓰겠지!”
경매장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큰돈을 굴리는 고위계층이다 보니 각자 실력 있는 호위를 데리고 다녔다.
검사들이 에단과 상대하는 사이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자 바이칼이 스태프를 꺼내 들며 투덜거렸다.
“거 성급들 하시긴. 누가 우리 팀에 검사만 있답니까?”
이미 완성시켜 둔 마법진이 발밑에서 번쩍 빛났다. 마력끼리 충돌하며 내뿜는 빛으로 그의 검은 로브가 파랗게 물든 채 펄럭였다.
“잠시 일시정지 해주시죠. 타임포즈(Time-pause).”
허를 찌른 기습에 공격을 준비하던 마법사들이 전부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잠깐이지만 동작이 제한되면서 정교하게 모아놓은 마력 배열이 흐트러져 마법이 우르르 캔슬되었다. 에단이 상대한 검사들은 전부 자로 대고 자른 듯 똑같은 길이로 잘려나간 검을 보곤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쥬다스 일행을 보며 중간열 손님들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물론 제압을 시도했던 사람 수가 몇 안 되긴 했다. 경매장은 지금 노예 구매를 위해 후끈 달아오른 상태였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 묻혀 이런 사사로운 다툼 따위에 신경을 기울이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쳐도 머릿수로만 따지면 공격을 가한 쪽이 훨씬 많았는데도 졌다는 건 그들 간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증명했다.
‘말뿐인 허세가 아니란 말인가?’
제압에 실패한 사람들은 쥬다스가 지나가자 주춤주춤 물러섰다.
자연스레 길이 열리자 무대에 집중하고 있던 1열 손님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응? 시장 가이드로군. 뭐지?”
“크흠흠. 혹시 자리 파실 분 안 계십니까요?”
가이드의 물음에 가면을 쓴 1열 손님들이 일제히 쥬다스 일행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부채로 입을 가린 여성이 옆에 앉은 남성에게 작게 웃으며 수군거렸다.
“어머나. 새로운 이벤트인가 봅니다.”
“잘됐군. 무대가 좀 따분해지려던 참이긴 했어.”
“이제 이런 식으로 노예를 경매하는 건가?”
1열에 자리 잡은 건 로얄 중에서도 로얄 계층의 손님들이었다.
특별대우에 익숙한 그들은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고압적인 태도를 잃지 않고 이를 즐겼다.
자리를 구하려한 쥬다스의 가이드만이 난처함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고 서 있지 말고 소개를 좀 해주지그래?”
“호오, 저 여아의 머리 색깔은 탐나는군.”
“…….”
누군가 크리스티나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품평했다. 그러자 가면에 가려진 크리스티나의 눈매가 차갑게 굳어졌다.
“그, 이분들은 상품이 아닙…….”
“아니라면 상품으로 만들면 그만이지.”
가면에 얼굴을 가린 이들은 본연의 모습이 가려졌다는 생각에 취해 저열한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평소라면 귀족의 품위와 체면을 생각하여 짓지 않았을 음흉한 미소도 가면 아래 마음껏 취했다.
“귀족 출신의 노예도 길들이는 맛이 있을 것 같지 않나?”
“어머. 확실히 들어본 적 없어요.”
“최고의 상품이 되겠군!”
‘아이고, 하필이면.’
상황이 이쯤 되니 바이칼은 크리스티나가 얌전히 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을 넘어 불안감마저 느꼈다.
바이칼이 알고 있는 크리스티나 R.델피아란 여인은 그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며 자존심이 상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꼿꼿한 인물이었다.
그런 여자가 상관의 계획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고스란히 수모를 당하고 있다.
새삼 그녀가 쥬다스에 한해서만큼은 얼마나 자신을 내어놓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인데, 다들 동의한다니 잘되었구나.”
“응?”
설마하니 조롱하던 상대가 저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1열 손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쥬다스는 지팡이를 들어 가장 먼저 크리스티나를 탐냈던 사내를 척 가리켰다.
“‘귀족 출신의 노예’.”
자신들의 입으로 한 얘기인데 이상하게 모욕감이 느껴졌다.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쥬다스는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나도 그 최고의 상품을 가지고 싶어졌거든.”
천근같은 침묵이 장내를 감돌았다.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나머지 부위를 시뻘겋게 물들인 상대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빼 들었다.
타앙!
고막이 먹먹해지는 총성이 울렸다. 이를 기점으로 더 이상 무대에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대에서 노예를 소개하고 있던 사회자조차 진행을 중단하고 그들의 상황에 집중했다.
쥬다스는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궤적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보아하니 부하가 제법 실력 있는 검사인 모양이오. 하지만 이 나라에선 칼 같은 구린 무기는 안 통해, 형씨.”
‘총.’
미드가르드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기계국’인 이유.
그들이 마법 대신 기계와 과학 등으로 이루어진 색다른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었다.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은 마법과 똑같이 마력을 사용했지만 발동 원리는 아예 달랐다.
나라 초입에 위치한 노예 시장에선 온갖 문화가 뒤섞여 기계가 잘 눈에 띄진 않았지만 미드가르드인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기본적인 문물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마력 탄환을 채워 발사하는 ‘마력총’이었다.
철컥! 철컥!
여기저기서 총을 꺼내 겨누는 소리가 들렸다.
“수하 중에 마법사도 있군? 루바르잔 제국에서 온 건가.”
“…….”
“하지만 마법 발동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마법사로는 총을 막을 수 없지. 시험해 보고 싶다면 덤벼도 좋지만. 기왕이면 살아 있는 노예로 부리고 싶으니 무기를 버려라.”
총을 든 남자가 말이 없는 쥬다스를 보며 친절하게 충고해 주었다.
물론 겁을 먹었으리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쥬다스는 흥미롭게 그들이 쥔 총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으음, 서적에서 본 미드가르드 기계식 무기가 저건가. 실물로 보니 제법 구조가 복잡해 보이는데. 마법과 과학이 결합된 제품인가?’
그는 한때 현자로서 연구에 기여했던 인물이었다.
그건 비단 타인의 요구에 맞춰주었던 것만은 아니라 스스로도 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남자는 쥬다스가 총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우월함에 도취되어 주절거렸다.
“루바르잔도 이젠 퇴물이야. 뭐가 마법강국이란 말이냐. 다시 한 번 시솝께서 전쟁의 시대를 일으키신다면 분명 발밑에 무릎 꿇릴 수 있겠지.”
“…….”
“뭐, 걱정 마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우리의 노예로 들어오면 죽을 위험은 없질 않나. 특히 거기 푸른 머리 아가씨는 얼굴도 반반할 것 같은데.”
처음부터 크리스티나를 점찍었던 사내는 아예 가면 속에 숨겨진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가면부터 벗어보지 그래…… 응?”
삐삐삑!
갑자기 그가 들고 있던 총에서 경고음과 함께 과열을 뜻하는 붉은빛이 빠르게 깜빡였다.
어떤 대처도 하기 전에 화륵 열기에 휩싸인 총은 그대로 손안에서 폭발해 버렸다.
“끄아악!”
폭발과 함께 손이 날아간 사내가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귀부인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고 총을 겨누고 있던 다른 이들이 일단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두!
요란한 총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뭐, 뭐야, 저게!”
알 수 없는 푸른 장막에 가로막힌 마력 탄환들이 치이익 김을 내뿜으며 산화되어가고 있었다.
본래 마력이 응집된 강력한 탄환들은 마법사들이 설치한 정교한 실드조차 뚫어버린다. 이처럼 아예 장막에 가로막혀 녹아버린다는 건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기계는 열에 약하군.’
정령의 힘을 운용해 총을 터뜨리고 동시에 탄환을 막아낸 쥬다스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그가 다가서는 만큼 공격을 가했던 1열 손님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해괴한 광경이 벌어졌다.
“그래.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게 당연한 법도라면.”
그의 지팡이 끝에 몰려든 붉은 기운이 괴물의 눈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제부턴 내가 너희들의 시솝이 되면 되겠구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역시 먼치킨다운 간단한 해결안... 참 쉽죠? (?)
쿨럭.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ㅎㅎ
벌써 일요일이라니.ㅠㅠ 주말만 되면 시간여행자가 되는 기분입니다. 그냥 눈 몇 번 깜빡이고 숨 좀 쉬었을 뿐인데 지나가버렸다...
그럼 남은 주말 평안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