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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개미의 꿈
장내에 무섭도록 깊은 고요가 감돌았다. 경매장에 입장한 인원은 무려 천 명이 넘었는데 전원 미동도 없이 침묵을 지켰다.
‘아으으. 형님, 어쩌시려고 일을 이렇게까지……!’
세이지는 쥬다스의 곁에서 가까스로 태연함을 가장하였으나 속으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솝이란 결국 미드가르드의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연기라곤 하나 시솝이 언급될 정도면 이 나라의 제도를 정통으로 건드리겠다는 뜻이다. 즉, 미드가르드인들에겐 그보다 더한 도발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세이지가 보기엔 제법 위험한 선택이었다.
쥬다스는 제국 군주의 후계자다. 아직까진 그 정체를 들키지 않았지만 이번 사안은 자칫 잘못했다간 대륙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다만 현재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를 도발로 받아들이기보단 쥬다스가 보여주는 기백에 압도당해 있었다.
‘뭐지?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심지어 그들은 조금 전 쥬다스가 사용한 이능이 정령술이란 사실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보통 세간에 알려진 정령술사가 사용하는 정령의 힘은 특별하긴 해도 이렇게까지 압도적이지 않았다. 힘을 쓰기 위해선 정령이 늘 술사의 근처에 있어야 하며 그 능력치도 주로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하거나 하는 등 주로 서포트 형식이다.
아무리 실력 좋은 정령술사라 해도 마력이 응집된 총격을 산화시켜 버린다거나 불길을 일으키지 않고도 정확히 총만 노려 폭발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겼다.
하지만 관중들이 간과한 사실은 쥬다스와 계약한 정령이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는 점.
정령왕은 실체화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계약자와의 교감을 통해 간단한 정령술을 발동시킬 수 있다. 정령왕이 사용하는 힘은 아무리 간단하다 할지라도 인간이 받아들이기엔 강력하고 정확했다.
방금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특정 부분에만 온도를 높여 총을 폭발시키는 작업은 불의 왕에게 있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우, 웃기지 마!”
누군가 발작적으로 소리쳐 적막을 깨뜨렸다.
“네놈에게 무슨 재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우리의 시솝이 되겠다니. 어느 누가 너를 시솝으로 인정한단 말이냐!”
쥬다스는 불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황룡쇄를 바닥에 끌듯이 짚은 채 멈춰 섰다.
그때를 기회로 포착한 상대가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
타앙!
탄환이 발사되고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잠시 뒤 펼쳐진 건 많은 이가 예상했던 결말이 아니었다.
“어리석구나. 내가 정한 일에 누가 감히 인정을 한단 말이냐.”
쥬다스는 그리 말하며 깔끔하게 지팡이를 회수했다.
그를 노린 사내는 지팡이에서 발사된 불화살을 맞고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그대로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즉사였다.
그에 반해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새하얀 반가면이 그를 지켜본 좌중을 더욱 소름 끼치도록 만들었다.
이젠 더 이상 경매를 진행할 수도, 그를 대적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야시장의 꽃이라 불린 경매장은 그렇게 전대미문의 파국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 * *
한편, 경매장 외곽의 시장거리에서도 특별한 손님들이 머물고 있었다. 다름 아닌 청룡 가야를 중심으로 나타난 쥬다스의 수하들이었다.
소란이 일어난 경매장 쪽을 힐끔 쳐다본 가야는 지루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뭐야. 저쪽은 재밌어 보이네.”
깔고 앉아 있던 노예상인의 머리를 맨발로 툭툭 건드려 본 그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니들도 좀 발악이란 걸 해봐. 죄 물독에 빠진 쥐새끼도 아니고.”
“네 이 무도한 놈들! 대체 무슨 목적이냐!”
누군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가야는 휙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방석으로 깔고 앉은 자 이외에도 그 주변에는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수많은 노예상인들이 죄다 벼이삭처럼 맥없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찬물에 푹 젖어 물기를 뚝뚝 흘리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질식할 뻔하였다가 힘겹게 입에서 물을 뱉어내는 상인도 있었다.
“왜, 뭘 위해서 노예들을 풀어주려는 거지?”
청룡 가야는 계약자의 바람에 따라 경매장 주변 노예상을 습격했다. 습격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는 무기 하나 없이 카드로 쌓은 성을 무너뜨리듯 단숨에 진열을 무너뜨렸다.
그저 길을 따라 걸으며 눈에 띄는 상인마다 한 명 한 명 손수 멱살을 잡아다 패대기치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폭포수처럼 물을 끼얹었다. 쓰러진 노예상인들의 손발을 묶어 제압하는 건 나머지 기사들의 몫이었다.
위협을 느낀 몇몇 상인이 총을 쏴 댔지만 본신이 청룡인 그에겐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마력탄을 온몸으로 맞으며 뚜벅뚜벅 걸어와 사람들을 패대기치는 가야의 모습은 가히 동방의 야차나 다름없었다.
가야는 공포에 질린 상인들을 상대로 파리 쫓듯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주었다.
“아, 그거? 안 풀어줘도 돼. 귀찮으니까 그냥 풀어주지 마.”
“……?”
기껏 노예상을 습격해서 먼지까지 탈탈 털어놓고 나서 한다는 말이 ‘풀어주지 마’라니?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가야를 보며 상인들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들이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가야는 자리에서 훌쩍 일어섰다.
‘내가 받은 명령은 단 한 가지.’
쥬다스는 노예들을 어떻게 해달란 부탁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노예가 목적이 아니란 말인가?”
“관심 없는데.”
“그럼 왜 이런 짓을…….”
“내 주인이 너희들에게 전해 달라더군.”
정령의 바람은 즉 계약자의 바람. 가야는 충실히 그의 뜻을 이행했다. 뱀눈을 연상케 하는 가느다란 푸른 동공이 바닥에 널브러진 상인들을 주르륵 훑었다.
“오늘부로 이 시장은 철폐한다.”
파격적인 선언에도 청룡의 힘 앞에 굴복한 사람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그가 가진 힘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패자가 승자의 말을 듣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노예든 아니든 차이는 없다. 즉, 너희는 미드가르드의 법도에 따라 모두 한 주인에게 귀속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릴 전부 노예와 같은 취급하겠다는 소리……!”
“불만 있는 놈은 덤벼.”
그 말에 술렁이던 좌중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자 가야는 만족스레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이상, 임무 끝.”
때마침 경매장 상황도 종료되어 그들을 향해 처억 길이 열렸다.
썰물 빠지듯 물러서는 사람들 사이로 하얀 반가면을 쓴 소년이 걸어 나왔다. 물에 쫄딱 젖어 쓰러진 사람들을 발견하고도 거침없는 보폭이었다.
“주인.”
가야가 그를 향해 무릎 꿇고 예를 갖추는 걸 본 상인들의 안색이 거무튀튀하게 물들었다.
‘저자가 주인이라고?’
‘아직 어려 보이는데?’
‘어쩌면 잘 구슬릴 수 있을지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들여다본 쥬다스가 검은 지팡이를 어깨에 툭 걸친 채 서늘하게 웃었다.
“과연. 여기 엎드린 게 전부 사람을 사고팔던 자들인가.”
“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런 일을 벌인 거요? 호인이시구려.”
한 상인이 손발이 묶인 채로 회유를 시도했다. 쥬다스가 그에게 고개를 돌리자 흥미를 끄는 데 성공했다고 느낀 상인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한데 사정 좀 봐주시오. 이 나라에선 노예를 사고파는 게 결코 불법이 아니요.”
“흠. 불법이 아니다?”
“그렇소! 신을 믿는 나라에선 이를 불쾌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알고 있소. 하지만 각 영토에는 그 나라만의 법이 있질 않겠소?”
쥬다스는 계속 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 나라에선 능력이 곧 지위고 돈이요. 무능력한 인간은 결국 무쓸모!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그나마 쓸 만하게 만들어주는 게 우리 상인들이란 말이오.”
“그, 그래!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가 유능하진 않아. 쓸모없는 녀석들은 그렇게라도 해주지 않는다면 죄다 굶어죽을지도 모른다고!”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무릎 꿇긴 했으나 여전히 이를 납득하진 못한 상태였다. 노예를 판 상인들은 한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때 쥬다스가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건.”
차가운 금안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들도 다른 누군가에게 평가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이 했던 말대로라면 유능한 자가 그보다 못한 자를 노예로 삼는 건 당연한 논리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노예에겐 낙인을 찍어 그 소유주를 표시했던가.”
“이, 이럴 수는 없소. 시솝께서도 우리를 노예로는 대하진 않았거늘!”
누군가 공포에 질려 발악하듯 외쳤다. 쥬다스는 그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해 버리고 황룡쇄로 바닥을 툭 찍었다.
치지직!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상인들의 등에 손바닥만 한 동그란 해문양이 그려졌다.
불의 정령이 만들어낸 화염의 낙인이었다. 태양 안에 새겨진 E라는 글자는 그들 자신이 노예들에게 새겼던 그대로 정교하고 선명했다.
“끄아악!”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서 상인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꼴을 지켜본 다른 여행객들이 경악한 눈으로 덜덜 떨었다.
낙인이 찍힌 대상은 상인들뿐으로, 여러 나라에서 노예를 사러 방문한 손님들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같은 꼴이 될지 모른다는 짙은 공포가 그들 사이를 점령했다.
“요, 용서를.”
“저는 오늘 구경 온 것뿐입니다. 노예를 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뭐라 하든 간에 정작 쥬다스는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새처럼 날아든 붉은 정령을 손끝에 얹고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
이런 일을 부탁해서.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영혼이 이어진 계약자의 뜻을 생생히 전달받은 카니는 생긋이 웃었다.
「도움이 되어서 기쁜걸요.」
「응요. 이제야 좀 계약한 보람이 느껴진다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가 멈칫하는 기색을 느낀 카니가 다홍빛 눈망울을 빛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생각할 필요 전혀 없어요. 이그레트가 우리를 친구처럼 여겨주는 마음은 잘 알지만, 으응. 그래도 우린 정령이니까요.」
「인간은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좋아한다요.」
「후후, 우린 그 반대죠.」
정령은 오히려 계약자가 자신을 속박하면 속박할수록 만족을 느낀다. 술사가 자신을 찾고, 이름을 불러주고, 소망을 간절히 바라기만을 기다린다.
곁에 있기만 한다면 기다리는 순간조차 정령에겐 구속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나는 자유롭지 않은 이곳이 너무 좋은걸요.」
「어쩌면 인간들의 ‘노예’라는 개념이 우리에게서 파생된 걸지도 모르지.」
푸른 늑대가 조용히 의견을 덧붙였다. 그만큼이나 정령은 무조건적으로 술사의 소망에 따른다는 뜻이었다.
「단지 우린 자의로 움직이는 것이고, 노예는 강제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
루니는 둘 다 하는 역할은 닮아있다고 느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연 속에 숨긴 채로 그르렁거렸다.
「알겠지, 우린 따르기 싫은 명령을 억지로 따르는 게 아니란 소리다.」
「그러니 부디 원하는 만큼 명령해 줘요.」
카니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볼을 물들인 채 맑게 웃었다. 쥬다스가 굳게 입을 다물고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사이 바람결을 타고 작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노래가 아니라 가사 없이 흥얼거리는 허밍(Humming)이었다.
“뭐지……?”
“갑자기 눈물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등에 낙인을 새기고 절망하던 상인들과 두려움에 질려있던 방문객들, 그리고 쥬다스의 명을 받아 이들을 제압하던 기사들까지 전부 같은 감정에 휩싸여 눈시울을 붉혔다.
그 원인이 소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랑이며 불어온 바람 탓에 점점 노랫소리가 크고 선명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오, 이거 재밌는 능력이네.”
육체가 있긴 해도 정령에 해당하는 가야는 그 노래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노래를 감상했다.
‘이 목소리는.’
‘낮에 만났던 그 양 수인족 노예로군.’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본인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는 눈물방울을 내버려 둔 채 침착하게 그 정체를 유추해 냈다.
‘크응. 그건 그렇고.’
그런 그들보다 조금 뒤에 서있던 바이칼은 코를 훌쩍이며 회색 먹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선율이다…….’
비단 슬픈 감정을 전이시키는 능력이 아니었어도 빠져들 법한 목소리다.
낮에 그녀를 봤을 땐 워낙 자신감 없고 작은 목소리라 몰랐는데, 노래를 한다면 퍽 잘 어울릴 거라던 쥬다스의 말이 백번 공감이 갔다.
후웅!
그때 낯익은 녹색 바람이 쥬다스의 주변을 감쌌다. 그가 손바닥을 내밀자 허공에서 몰려든 바람이 파앗 하고 형체를 이루어냈다.
「이그레트!」
이내 손바닥 위로 톡 내려앉은 유니가 자리에서 빙글 돌며 발랄하게 날개를 파닥였다.
「에헤헤, 다녀왔어!」
“어서 오렴. 유니.”
다정한 환영에 유니는 까르르 웃었다. 활기찬 바람의 목소리에 푸른 늑대도 살며시 꼬리를 흔들었다.
“당신은…….”
가까이에 있던 한 사내가 가면을 벗으며 진중한 태도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쥬다스에게 질문한 건 미드가르드의 귀족이었다. 노예시장을 찾은 귀족이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냈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그대들의 시솝에게 전하여라.”
쥬다스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고압적인 태도로 명했다.
“곧 그가 가진 권위에 저항하는 도전자를 만나게 될지니.”
누구든지 출신지 및 신분을 막론하고 현재 시솝에게 도전하여 이기는 자는 시솝의 권위를 얻을 수 있다.
군주가 아닌 무력에 의한 서열제로 운영되는 미드가르드의 특별한 권력구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시솝에게 도전하는 행위를 두고 ‘게임’이라 불렀다.
“새 게임을 준비하도록 하라.”
수많은 무법자에게 혼란을 안겨줄, 미드가르드의 새 게임을 여는 선포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커헉 분량조절의 실패.... (...)
이걸로 22장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23장 : 융합' 챕터가 이어집니다. ㅎ
어제까지 더워서 허덕였는데 오늘은 비가 내려서 조금 추운 감이 있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시원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