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94화 (19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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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그날 밤, 기존의 노예들은 모두 철창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역으로 새롭게 노예 낙인이 찍힌 상인들이 대신 그곳에 갇혀 버렸다.

더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개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고, 더러는 묵묵히 좌절했다. 풀려난 노예들은 철창에서 나왔을 뿐 달아나거나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장소가 차가운 철창 안에서 이젠 폐쇄된 시장 바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들은 마치 상단이 망해 처분을 기다리는 상품처럼 옹기종기 모여 눈치를 살폈다.

세이지는 기사들을 도와 천막을 걷다 말고 그런 노예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린아이부터 건장한 성인까지, 족쇄에서 풀려났음에도 주체적인 행동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노예로서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은 세이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형님.”

소위 ‘연극’을 시작한 이후로 쥬다스는 가면을 벗지 않았다. 루바르잔에서 왔을 거라는 심증은 있어도 정확한 물증을 주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보안 장치였다.

“정말 시솝을 만나러 가실 생각이세요?”

“음, 아니.”

설마설마하던 질문에 대해 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아이가 안심하려던 찰나 차분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정확히는 그쪽에서 만나러 오도록 만들어야지.”

“예에?”

“미드가르드의 시솝은 바람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단다. 지금으로선 그의 위치를 알 수 없어.”

괜히 미드가르드의 운영자, 시솝이 아니란 뜻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정보에 능한 바람의 정령왕조차 시솝이 머무는 장소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직접 찾아오도록 도발할 생각이야.”

“도, 도발이요?”

“기왕이면 합리적인 방식으로.”

궁금증이 충분히 해소되진 않았지만 세이지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일일이 방법을 묻는 것보단 직접 눈으로 보는 게 더 나으리란 판단 때문이었다.

동생과의 대화가 끝나자 쥬다스는 홀로 텅 빈 경매장으로 이동했다.

사람이 가득 차 활발하게 노예를 사고팔던 경매장이었지만 지금은 폐쇄되어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부서진 의자와 불이 꺼진 조명기구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가 텅 빈 무대에 발을 딛자 초록색으로 반짝이는 미풍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혔다.

「통칭 ‘시솝 : 오딘’. 정확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어.」

자세한 정보를 얻는 데에 실패한 유니가 쥬다스의 어깨에 내려앉아 투덜거렸다.

「아무리 봐도 수상해. 정식 명칭, 나이, 성별, 거주지 모두 불명! 한 나라의 대표치고는 너무 비밀이 많아. 집권 기간이 무려 300년이 넘는데 그 비밀들이 다 지켜진 것도 이상하고.」

「으엑? 인간이 300년 이상 살았다요?」

「응. 그러니까 수상하단 거야. 너도 알지? 인간의 수명은 아무리 길어봤자 100년도 채우기 힘들어.」

「맞다요. 그때 이그레트가 90살 넘게 산 것도 엄청 오래 산거라고 했는데!」

‘정확히는 92년. 장수하긴 했지.’

전생의 나이를 떠올린 쥬다스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새삼스럽게 열일곱이라는 현생의 나이가 무척 어리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지금 그가 하려는 행동이나 생각하는 모든 게 그 나이 때 할 법한 종류가 아니었다. 속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을 텐데도 군말 없이 자신을 따르는 친우들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이런 일정이 힘들 수 있겠구나.’

그가 무리의 중심에 있는 이상 아무래도 아이들이 그에게 맞추려 노력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쥬다스가 진지하게 일행들의 고충을 헤아리려 노력하는 사이 정령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무엇보다 이 미드가르드란 나라는 정령이 살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라서 돌아다니기 불편하단 말이야.」

「……확실히 거북하다.」

푸른 늑대도 콧등을 찡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사실 이들의 생명 활동이 이루어지는 근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이곳엔 강이 흐르지 않으니.」

「맞아. 자연환경이 너무 열악해. 강은 물론이고 풀과 나무, 흙으로 이루어진 토양 자체가 없어.」

노예시장이 있는 위치까지는 여러 문화가 뒤섞인 지방이었기에 그러한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곧장 그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땅에 깔린 폭신한 바닥재부터 시작해서 높은 건물, 길을 따라 늘어선 조화며 가짜 가로수들까지 전부 인공적인 구조물뿐이었다.

심지어 어떤 지역은 하늘을 뒤덮은 특수 배리어로 햇빛과 구름 대신 그때그때 필요한 날씨를 조작하여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아우우, 암튼 완전 최악이야!」

유니가 볼을 부풀린 채 투정을 부렸다.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이 나라는 자연계 정령술사로선 최악의 상성이었다.

불편해하는 정령들을 진정시키며 달래는 사이 같은 이유로 정령 활용에 곤란을 겪던 콜이 그를 찾아왔다.

“쥬다스 님. 이런 곳에 혼자 계셨습니까?”

콜이 다루는 바람의 상급 정령이 까륵 웃음소리를 흘리며 쥬다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콜은 무대 아래까지 걸어와 단을 오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공손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보는 눈이 없으니 쥬다스도 편하게 대꾸했다.

“아. 그래, 콜.”

“흠흠, 아무래도 이 나라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으시는 편이…….”

“요즘 젊은 아이들은 뭘 하며 노는지 아느냐?”

“예?”

뜬금없는 질문에 다른 걸 물으러 왔던 콜의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젊은…… 아이들이라면, 에단 경이나 바이칼 경 같은 친우들 말씀이십니까?”

콜은 콧등까지 미끄러져 내려온 외알 안경을 다시 제대로 착용하며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어린 스승은 황룡쇄에 기댄 채 제법 진지하게 고뇌하고 있었다.

“귀환하고 나면 이것저것 놀 기회를 마련해 줄까 하고 말이야.”

“놀 기회를?”

“으음. 지금은 내 곁에 있으니 매사 너무 심각하기만 하단 생각이 들어서.”

‘확실히.’

콜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좋게 말하면 자상한 것이겠지만, 쥬다스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과하게 타인을 배려하곤 했다. 여기저기 신경 쓰는 곳이 많고 매사 진지하게 임하는 일면이 강하니 그의 행동에는 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사람은 각 연령대에 알맞은 과업이 있다고 하였다. 젊어서 노는 것도 성장 과업의 일종이지.”

“허허. 듣고 보니 그렇긴 합니다.”

“나 어릴 때야 그저 눈 오면 눈밭에서 뛰고 단풍지면 색이 고운 낙엽 줍는 게 놀이였지. 요즘엔 시대가 변해서 그런 건 영 지루할 것 같아 말이다.”

“……스승님.”

모처럼 ‘쥬다스 님’이 아닌 ‘스승님’이라는 옛 호칭으로 그를 부른 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은 스승님도 어리십니다.”

“응? 그야 물론.”

“아뇨.”

쥬다스도 자신이 새 삶을 살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콜이 말하려는 건 이와 조금 다른 문제였다.

“곁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회를 마련하는 것보단 그들과 함께 어울리십시오.”

“…….”

“스승님, 저는, 이 코르토반 옌이란 못난 제자가 감히 청컨대.”

이젠 색 바랜 종이처럼 오래된 기억 속에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쫓아다닐 적 이후로 처음 청하는 바람이었다.

“부디 당신께서 사는 지금 삶을 온전히 소유하시길.”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콜은 쥬다스가 진정으로 그 삶에 정착하길 원했다. 현재 쥬다스는 전생의 자아를 유지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덕에 많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그러다 보니 정작 스스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치 지금 가면을 쓰고 폭군을 연극하듯 ‘열일곱의 소년’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콜이 짚은 부분은 바로 그 점이었다.

두 사제지간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냥 어리다 여겼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었나.’

어린 강아지처럼 순수한 눈으로 제자가 되겠다며 졸졸 쫓아다니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젠 칠십 넘은 노인이 되었다. 콜의 눈은 여전히 맑고 순박한 빛을 띠었지만 일생의 말년에 도달하여 가지게 된 현명함도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황룡쇄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콜.”

“예.”

“늘 지금처럼 있어다오.”

무대에서 툭 뛰어내린 그가 경매장 밖으로 걸어 나가며 덧붙였다.

“한 50년만 더.”

“허어. 50년 뒤까지 제가 살아 있으면 인간 수명 신기록을 갱신하겠군요.”

“평생 살면서 신기록 정도는 한번 이룩해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거야 하늘이 정할 일이지요. 그런 식으로 떼쓰시면 곤란합니다.”

두 사람은 실없이 웃었다.

“그나저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나를 찾았느냐?”

“헛, 참. 그렇지요. 제가 정신이 이렇게 없습니다.”

콜은 쥬다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아차 싶은 표정으로 하려던 말을 꺼냈다.

“미드가르드의 시솝은 위험한 자입니다. 깊이 관여하지 않으시는 게…….”

이어지는 내용은 유니가 알아온 정보와 거의 동일했다. 거기에 더해 콜은 좀 더 세부적으로 현 시솝에 대해 묘사했다.

“‘오딘’이 현 시솝이 된 이유는 그가 가진 천재적인 재능 덕이라 들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이라.”

“기계를 만들고 개발하는 재능 말입니다. 기계국이라 불리는 미드가르드에서 그야말로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게죠. 300년도 넘게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못 쓰게 된 장기나 신체기관을 새 기계부품으로 교체하여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우엑. 징그러워.」

유니가 학을 떼며 진저리를 쳤지만 콜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말을 맺었다.

“그러니 아마도 이 나라의 시솝은 더 이상 인간이라 보기 어려울 겁니다.”

두 사람은 어느덧 기사들이 열심히 천막을 걷고 있는 위치까지 도달했다.

그 많던 천막을 거의 다 걷어내어 노예 시장은 이제 완전히 황무지처럼 변해버렸다. 사슬에 묶여 철창에 갇힌 상인들만이 그 여진을 느끼게 했다.

“그다지 깊이 관여할 생각은 아닙니다.”

보는 눈이 생기자 쥬다스는 다시 콜에게 존대로 답했다.

“하나…….”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일을 보고도 내 할 일이 아니라 외면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

그 대답을 듣고 나서 콜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생각 중 한 가지는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쥬다스는 착실히 새 삶에 적응해 나가는 중이었다. 이전의 그라면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책임의식이 지금은 존재했다.

“알겠습니다. 무리하진 마십시오.”

콜은 더 만류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두 사람은 상인들이 갇힌 철장을 지나쳐 바이칼과 크리스티나가 서 있는 곳에 도달했다.

“어, 주군! 오셨습니까?”

바이칼이 먼저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세세히 살펴보았느냐?”

“옙. 그동안 취급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병이 생기는 건 기본이고 상처가 정말 많습니다. 증세가 심해 저희 치유술사들로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낡은 천막 아래 옹기종기 모여앉아 멍하니 시간을 때우고 있던 노예들이 다가오는 그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노예들은 풀려났음에도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기껏해야 ‘주인이 바뀌었다’ 정도로 인식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상처를 치료해주고 돌봐주는 낯선 상황에 놀라 하나같이 공포와 의문이 뒤섞여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들이었다.

“게다가 몸보다 문제는 정신입니다. 상인 놈들이 무슨 짓을 해놓은 건지 완전히 세뇌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 전부 자신을 물건이라고 생각하더군요.”

물건이 먼저 주인에게 말을 거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그 절대적인 규칙에 따라 노예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앞에서도 전부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만 살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새 챕터 '23장 : 융합'의 시작입니다. 뭐가 뭐랑 융합될지는 비밀입니..쿨럭. 사실 별 건 아닙니다.ㅎ

새로 등장한 기계국 미드가르드는 어찌 보면 현대와 닮았지만 사실 좀 더 무서운(?) 곳입니다.

소제목 뜻과 함께 여기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

그럼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리며, 좋은 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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