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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그래, 당장은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쥬다스는 그들을 빙글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정하자꾸나. 나는 시장을 철폐하였을 뿐, 너희들을 구매하지 않았다.”
단호한 어조였다. 그 말을 들은 노예들은 일순간 주인에게 버림받은 폐기물이 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대신 너희들의 시간을 구매할까 한다.”
“……?”
“너희는 이제부터 내 소속이 되는 걸 선택할 수 있다. 노예가 아닌 고용인으로서 말이야. 그리하겠느냐?”
노예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주인이 묻는 말에는 대답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입을 열게 했다.
“예.”
주인의 성향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노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의사표현은 ‘예’, ‘아니오’라는 딱 떨어지는 단답형에 불과했다.
“주인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명령이 아니라 권유였지만 그들에겐 이러한 복종이 숨 쉬는 것보다 더 익숙했다. 그들이 새 지위에 적응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미리 예상하고 있던 쥬다스는 기꺼이 다시 한 번 더 이해를 도와주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의 소속은 미드가르드가 아니라 루바르잔으로 전환된다.”
‘루바르잔 제국.’
사실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이상 국적은 아무 상관없었다. 제국이 아니라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약소국으로 간다 해도 노예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힘으로 시장을 폐장시키고 상인들을 모조리 무릎 꿇린 강자가 고작 일개미에 불과한 노예들에겐 어떤 삶을 부여할지 그들로선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 수하들이 너희를 포탈로 안내해줄 것이다. 그들을 따라 먼저 이동하여라. 나는 할 일을 마저 한 후에 돌아갈 테니.”
미리 명을 받고 대기 중이던 기사 다섯이 앞으로 나섰다. 붙잡힌 상인들도 그들이 관리해서 데려가기로 한 상태였다.
이를 보자 노예였던 사람들은 서로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쥬다스의 말대로라면 기사들을 따라가는 게 맞았다. 우물쭈물 이동하기 시작한 그들을 보며 쥬다스가 빙긋 웃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사람들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보이는 따뜻한 미소는 상인들에게 낙인을 찍으며 차갑게 군림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꼭.’
노예를 위해 대신 싸워준 것 같다.
억측이라고 느끼면서도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호의는 따뜻함을 넘어서 뜨겁기까지 했다. 한겨울에 줄곧 찬바람을 맞아 꽁꽁 얼었던 손이 미지근한 물에만 닿아도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하게 달아오르듯이.
두려움 대신 좀 더 특별한 감정이 상품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들은 전부 처음과는 다른 표정으로 안내자들을 따라 우르르 이동했다.
그런데 다른 구성원과 함께 이동하지 않고 홀로 자리에 남은 이가 있었다.
“저는…….”
“아, 네겐 따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다.”
가녀린 두 귀가 흰 나비의 날갯짓처럼 두어 차례 파닥거렸다. 남아 있으란 명을 전달받고 착실히 제 위치를 지키고 선 양 수인족 노예였다. 그녀는 다크초콜릿 색깔의 순박한 눈망울로 쥬다스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네, 주인님. 명령을.”
“우선 통성명이 필요하겠구나. 나는 쥬다스라 한다. 혹 이름이 있느냐?”
“아뇨.”
양 수인족은 담백한 어투로 답했다. 그러자 사람에게 이름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세이지가 의문을 표했다.
“어? 이름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부를 때 뭐라고 호칭하지?”
“이전 주인님들께 불렸던 호칭……이라면.”
그녀는 조금 머뭇거렸다. 창피해서가 아니라 순진해 보이는 세이지에게 무례가 될까 염려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노예의 습성대로 오래 망설이지 않고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놓았다.
“그럼…… ‘이년’이라고…….”
“뭐?”
“‘이년’, ‘양년’, ‘양새끼’…….”
“아니! 아니야. 물어봐서 미안해.”
세이지가 낭패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지나온 삶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법한 호칭이었다. 괜히 그 아픔을 부추긴 꼴이 되었다 생각한 세이지는 굉장히 낯이 뜨거워졌다. 정작 양 수인족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쥬다스가 무언가를 언급했다.
“키리에 엘레이손.”
제국이 믿는 신성을 향한 기도문의 일종이었다. 짤막하지만 그 안에 강한 울림이 깃들어있었다.
“앞으로 네가 해주었으면 하는 일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이 드는구나.”
“제가 하길 바라시는 일이라면…….”
“감정을 노래하는 가수.”
그날 식사 메뉴를 고르듯 단조로운 명령이었다. 거기에 담긴 무게도 채 실감하지 못한 양 수인족 여성은 속으로 다시금 그가 한 말을 중얼거렸다.
‘키리에…… 엘레이손.’
볼을 타고 흘러내린 레몬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짝 흩날렸다.
‘그게 이제부터 내 이름?’
늘 남에게 소유당하는 삶을 살아온 그녀다. 노예의 삶에선 설사 이름이라 해도 주체적으로 소유하는 걸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지금 보니 이렇게 간단히 움켜쥘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상한 떨림.’
그녀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새 리듬을 느꼈다. 두려움 때문에 빠르게 뛰던 심장과는 달랐다. 오히려 조바심 날 정도로 설레기까지 했다.
“이봐. 왜 그래? 설마 주군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바이칼의 딴죽에 양 수인족은 필사적으로 붕붕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이상하게 심장이 떨려서…….”
“그걸 ‘희망’이라고 부르지.”
수하가 더 경박한 말을 나불거리기 전에 에단이 먼저 그녀의 이상 상태를 한 단어로 일축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조금 전 루바르잔으로 떠난 사람들을 떠올렸다. 분명 그들의 얼굴에도 같은 떨림이 깃들어 있었다.
‘나, 이런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야 하는 거구나.’
그녀는 비로소 쥬다스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해보겠느냐?”
그는 할 수 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해볼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선택지를 내주었을 뿐이다.
노예였던 레몬빛 양 수인족은 처음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키리에 엘레이손.
이로써 장차 제국 민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출신 미정의 수인족 ‘아이돌’이 탄생하게 된다.
* * *
다음 날, 쥬다스는 노예 시장을 떠나 본격적으로 미드가르드 중심지로 향했다. 그다지 오래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황량한 사막 같던 길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변화했다.
“혹시 지금 제 눈이 이상합니까? 길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바이칼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물었다.
“안타깝게도 자네의 시력은 정상이군. 하늘로 올라가는 게 맞다.”
“저기 단장? 정상인 걸 알려주셔서 감사한데, 왜 안타까우신지……?”
“내리도록. 더 이상 말을 타고 가는 건 무리다.”
에단은 수하의 강렬한 눈빛을 무시하고서 말에서 내렸다. 상관의 횡포를 하루 이틀 당하는 게 아닌지라 바이칼도 역시 구시렁대면서도 그를 따라 훌쩍 바닥에 착지했다.
길은 부드러운 탄력이 느껴지는 바닥재로 덮인 포장도로였다. 이 도로는 급경사를 이루며 하늘로 높이 향해 있었다.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는 태양빛이 눈부셔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말들을 지킬 사람이 필요할까요?”
황실에서 잘 관리해 키운 혈통 좋은 명마를 아무렇게나 방생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미드가르드에서 볼일을 마치고 제국으로 귀환하려면 다시 말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인원이 줄어드는 건 그거대로 곤란했다.
“여기서 더 머릿수를 줄이는 건 안 된다.”
에단이 강경하게 노예들을 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벌써 기사단 중 5인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아무리 쥬다스가 강한 이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최소한의 호위 병력은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안전을 생각해서도, 또 황태자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그에 대한 예법 측면에서도 일정 수준은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하는 수 없네요. 일단 방생하고 나중에 다시…….”
“허허. 그럴 필요 없소이다.”
“코르토반 님?”
아쉽게 입맛을 다시는 바이칼을 느긋하게 만류한 건 콜이었다.
“정령술사는 좋은 서포터지요.”
콜은 그리 말하며 바람의 정령을 불러 말들의 머리에 앉혀두었다. 정령왕인 유니만큼은 아니어도 콜이 계약한 정령도 최상급의 힘을 가진 존재였다.
황색 바람의 인도를 따라 말들은 마주 없이도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다시 필요할 때 부르면 곧장 달려올 거요.”
“허. 정령술로 그런 일도 가능합니까?”
“자연계정령은 자연 그 자체이니 말이외다. 동물과 소통하는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소? 다만 저 말들이 우리에게 신뢰가 없다면 정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았을 테지요.”
주인에게 신뢰가 있고 잘 훈련된 말들이기에 가능한 기능이었다. 콜의 정령이 풀과 물이 있는 곳에 말들을 데려다놓고 돌볼 테니 이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그들은 경사 급한 도로를 걸어서 오르기 시작했다.
“아오. 이 동네 사람들은 길을 왜 땅에 만들지 않고 이따구로 높이 지었답니까?”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마법기사 입장에선 욕이 저절로 나오는 도로구조였다. 헉헉거리면서도 열심히 불만을 토로하는 바이칼의 어깨에서 플루비가 삑삑 울었다. 쌍으로 시끄럽게 구는 둘을 한심하다는 눈길로 쳐다본 에단이 절도 있게 걸으며 대답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다른 이능은 묻히고 마력을 양분 삼은 과학기술만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나라니까. 혹시 아나?”
“……뭐를요?”
“하늘을 나는 기계라도 발명했을지.”
“풉.”
하도 황당한 나머지 바람 빠지는 비웃음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바이칼은 서슬 퍼런 검은 눈동자에 찔끔하여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에이이. 하늘을 나는 기계요? 상상력이 너무 뛰어나시네요, 단장. 차라리 작은 나라 하나쯤은 날려 버리는 대규모 폭탄을 개발했다고 하십쇼.”
“그도 일리가 있군. 지난 대륙전쟁 역사를 살펴보면 수백 년 전 이미 도시 하나는 충분히 날렸다.”
“예? 마법도 아니고 겨우 화학 폭탄으로 도시를 날렸다고요?”
걸어서 이동하는지라 말을 타는 것보다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서 둘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크리스티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몰랐다는 건 아니겠지? 그대와는 분명 같은 역사 수업을 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와하핫! 그랬죠. 도시를 날렸었죠.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 도시가 날아갔는지는 아나?”
애써 아는 척하려던 바이칼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글쎄요. 어디더라? 해동……아니, 마흐바……?”
쯧, 에단이 혀를 차며 답을 알려주었다.
“레비아탄 왕국.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나라다.”
“예, 뭐. 흠.”
바이칼은 헛기침으로 어물쩍 민망함을 넘겼다.
“그런데 그 정도 힘을 가졌다면서 왜 대륙을 재패하지 못했답니까? 오히려 다른 나라들한테 미움받고 있죠?”
“하, 기가 차는군. 강하다고 해도 제국 아래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상 이들은 절대로 야욕을 드러낼 수 없어.”
“그건 그렇지만.”
“과학은 신성에 반하는 힘. 그들은 결국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만을 위한 전당을 만들었지.”
크리스티나의 냉소적인 답에 이어 에단이 말했다. 슬슬 경사진 길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거리고 있는 허공의 도로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직 인간을 위한 전당 ‘아스가르드’. 그게 바로 미드가르드의 수도다.”
보행자가 추락하지 않도록 터널식으로 지어진 도로가 사방에 쫙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별처럼 반짝이는 표지판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교차로를 보며 누군가 경탄을 터뜨렸다. 지상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공중 도로였다.
이는 마치 하늘을 뒤덮은 투명한 거미줄과도 같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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