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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복잡하게 이리저리 얽힌 공중도로를 잠시 바라보며 어떤 길이 좋을지 고민하는 일행 사이에서 가야는 홀로 다른 의미로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이것들은. 하늘이 다 가려지잖아.”
“어차피 투명해서 아래에서 봤을 땐 아무것도 안 보이던데요.”
바이칼의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에 가야가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투명한 것과 맑은 건 다른 문제야. 난 하늘 속성을 가진 정령이라 예민하다고. 저렇게 하늘이 가려져있으면 멀미가 난단 말이다.”
“멀미까지요? 하늘 조금 가려진 게 대체 뭐라고.”
여전히 인간 입장에선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야는 공중도로 따위 전부 부숴 버리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음산하게 말했다.
“너네 같으면 스프 위에 투명한 기름덩어리가 두껍게 끼어 있으면 먹고 싶겠냐?”
“……이해했습니다. 어후, 비유가 참 찰지시네요.”
“헹. 아무튼 거슬려. 이렇게 파괴 본능이 끓어오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나처럼 순한 용을 자극하다니 제법이군’ 따위의 중얼거림과 함께 가야 공중도로를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그뿐 아니라 쥬다스가 데리고 있는 정령들은 전부 미드가르드의 내부로 깊이 들어갈수록 불편해하고 있었다. 평소 떠들썩하던 분위기와 상쾌한 웃음소리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침묵하는 시간이 더욱 잦아졌다.
쥬다스는 그런 정령들을 한번 조용히 응시하곤 흠 하고 턱을 짚었다.
“도로를 파괴해 버리면 이곳 주민들에게 너무 큰 피해가 갈 것 같구나.”
도로 아래로는 척박한 땅이 이어졌다. 도시와 도시 사이는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가득하여 말이 달릴 공간도 없고 위험하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이 공중도로는 모든 도시와 이어져 있는데다 땅에서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편리한 수단이다.
그런 수단을 부숴 버린다면 거주자들의 삶에 막대한 불편을 안겨주는 꼴이다.
쥬다스는 시솝을 만나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을 뿐 미드가르드를 공격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시솝의 관심은 확실히 끌겠지만.”
그는 아쉬움을 표현하며 조용히 웃었다.
“오래 머물 것은 아니니 조금만 참아주련.”
“응. 그러지 뭐. 얼른 끝내고 여길 뜨자.”
청룡을 떼쓰는 아이 달래듯 다독여준 쥬다스가 눈앞의 갈림길을 슥 둘러보았다. 무려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길만 해도 8갈래였다. 어느 길이 어느 도시로 이어진다는 표지판이야 적혀 있었지만
그들은 지금 특정 장소로 향하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시솝을 만나기 위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시솝은 미드가르드를 관리하는 ‘운영자’일 뿐 왕이 아니었으니 따로 궁전이나 처소가 정해져있지 않았다. 때문에 수도로 간다 한들 시솝을 만난다는 보장은 없다.
쥬다스는 잠시 갈림길을 살피다 이내 손에서 들고 있던 황룡쇄를 놓았다.
텅! 데구르르.
검은 지팡이로 탈바꿈한 황룡쇄는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 빙글빙글 돌다 멈추었다. 쥬다스는 이를 집어 들고 지팡이 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형님? 설마 이쪽 길로 정하신 이유가…….”
그는 아니겠지 싶은 얼굴로 묻는 동생을 향해 태연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차피 우린 시솝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질 않느냐.”
“……형님께서 그런 방법도 쓰시는군요.”
쥬다스라면 늘 현명하고 깊은 생각을 통해 움직인다 여겨왔기에 이번 선택은 더욱 의외였다.
세이지뿐 아니라 다른 수하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나같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일행을 돌아보며 쥬다스는 지팡이를 손바닥 안에서 빙글 굴려 보였다.
“막대 굴리기나 동전 뒤집기. 꼭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지. 살면서 영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문제가 생긴다면, 때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답일 때가 있단다.”
“아.”
바이칼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동조를 표했다.
“생각해 보면 저도 그런 적 많습니다. 가령 학교에서 다지선다형 시험을 볼 때 답을 모르겠으면 펜을 굴려서 찍는다거나.”
“……그럴 때 사용하라고 만든 펜이 아닐 텐데?”
학원 루바흐에서 입학 기념으로 나누어주는 펜을 가져다 엉뚱한 용도로 사용했다는 소리에 에단이 지그시 그를 응시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런 게 다 편견입니다, 편견. 펜으로 글씨만 쓰라는 법이 어디 적혀 있기라도 하답니까?”
“꼭 법으로 알려줘야만 따를 셈인가.”
“명장의 검을 장식용으로 벽에 걸어둘 수도 있고! 사전으로 파리를 때려잡을 수도 있고! 코를 파서 끈끈이풀 대신 사용해도 되고!”
“바이칼 경, 그건 좀 더럽…….”
별 생각 없이 듣고 있던 세이지가 슬금슬금 그 곁에서 멀어졌다. 그와 더불어 크리스티나의 경멸 어린 눈초리가 화살처럼 날아가 박혔다.
“아니. 바이칼이 한 얘기처럼 사실 시험 볼 때에도 ‘찍기’는 좋은 전략이야.”
“예?”
자기가 말해놓고도 내심 민망했던 바이칼이 수그렸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를 전부 풀기 위해선 답을 모르는 문제는 빨리 찍고 넘어가는 게 효율적이지.”
“그, 그렇죠. 모르는 문제에 막혀 끙끙대느니 훨씬 효율적이죠!”
“물론 정답을 알고 넘어가는 게 가장 이상적이긴 하다만.”
“…….”
바이칼은 화색이 돌던 낯빛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으음, 이상은 이상일 뿐이니 말이다.”
소위 전 과목 올백, 문과 수석으로 조기 졸업하여 학교 신화를 이룩한 천재의 위로는 결국 바이칼을 두 번 죽이고야 말았다.
일행은 그렇게 한참 떠들썩하게 분위기를 유지하며 걸었다. 길을 따라 가다가 다시 또 네 갈래, 다섯 갈래 국수면발처럼 쫙쫙 찢어지는 갈림길을 만나면 한 사람씩 알고 있는 찍기 방법을 사용해서 길을 골랐다.
그렇게 가다 보니 슬슬 투명한 터널 너머로 거대한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내리막길이군요.”
“우와. 이렇게 보니까 꼭 도시로 이어진 미끄럼틀 같아요.”
아이의 표현은 별것 아닌 사물에도 촉촉한 환상을 부여했다. 모두 그 말에 공감하며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내리막길에 첫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삐!”
별안간 바이칼의 어깨에서 플루비가 폴짝 뛰어내렸다. 그간 놀아달라고 땡깡도 안 피우고 얌전히 잘 버티고 있던 꼬마 와이번이 보여준 갑작스런 단독 행동에 바이칼이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그의 손아귀에 긴 꼬리를 탁 붙들리자 플루비가 주홍빛 눈을 불만스럽게 치켜떴다.
“삐액!”
“어쭈? 반항이냐. 오늘은 간식 먹기 싫은가 보네.”
“……!”
도리도리!
꼬리를 잡혀 거꾸로 매달린 플루비는 그 와중에 착실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송곳니 집어넣습니다, 실시.”
“삐이이…….”
와이번의 짧은 반항은 그렇게 끝났다. 바이칼은 플루비의 꼬리를 놔주었다. 바닥에 톡 착지한 플루비가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뒤에 뭐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다들 따라서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사람의 시력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용이랍시고 가야가 대신 플루비의 심리를 대략적으로나마 읽어주었다.
“플루비가 많이 불안한 모양인데.”
“갑자기 웬 불안이요?”
“시끄럽잖아.”
“하루 이틀 떠드는 것도 아닌데.”
“그거 말고.”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한 얼굴이자 가야가 의아한 얼굴로 귀를 가리켰다.
“뭐야, 지금 이 소리 안 들려? 인간이라 인식하기까지 좀 걸리나.”
“소리라면.”
부아아앙!
더 말을 잇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벌떼가 한꺼번에 날갯짓하는 소리 같은 요란한 소음이 그의 귓가에도 잡혔다. 놀라 귀를 까딱인 플루비가 두 발로 일어서서 바이칼의 다리를 꾹 붙들었다.
“어, 들립니다.”
“저도요.”
“들리는군.”
바이칼, 세이지, 에단 순으로 거의 동시에 중얼거렸다. 살짝 불어오기 시작한 미풍에 크리스티나의 긴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렸다. 자신의 머리카락 가닥을 손으로 훑어본 크리스티나가 진지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째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바이칼이 중얼거리는 순간, 먼 교차로에서부터 은빛으로 빛나는 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빠르게 그들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저게 뭐죠?”
“일단 동물은 아닌데.”
“기계인가.”
잘 관리받고 자란 말 한 마리를 연상시키는 매끈한 몸체에 바퀴는 없었다. 살짝 공중에 부유한 채로 질주하고 있었는데 표면이 윤택한 게 마치 단단한 철갑을 두른 듯 했다. 멀리서 봐서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였다.
바이칼은 슬쩍 스태프를 꺼내 들며 마법진을 그릴 준비를 시작했다.
“뭐가 됐든 속도가 너무 빠른데요? 이대로라면.”
공중도로는 지상의 길과 달리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터널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투명한 막을 깨뜨리지 않고서야 오로지 직진과 후진밖에 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이대로라면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실드를 발동할 시간까진 없을 것 같은데.’
폭발 마법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달려오던 물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켜, 비켜비켜비켜! 비키라고!》
“사방이 막힌 터널에서 어디로 비키냐! 댁이 멈추쇼!”
울컥한 바이칼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 지르자 안에서도 용케 그걸 들었는지 꽥 하는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난 이거 못 멈춘단 말이야!》
‘그럼 그걸 왜 타고 있는 건데―?!’
그러는 사이에도 물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땐 말 한 마리 정도라고 느꼈는데 가까워져서 보니 면적도 제법 넓었다. 그 안에 사람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바이칼은 마법을 사용하기 두 배로 찝찝해졌다.
“공격 마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단다.”
“옙. 알겠습니다.”
다행히 쥬다스에게 다른 방법이 있었다. 바이칼은 자세히 묻지도 않고 곧장 배열하던 마력을 회수했다.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플루비만이 바이칼의 다리 뒤에 숨어 삑삑 울어댔다.
쥬다스는 가볍게 손을 저어 자신의 정령에게 소망을 전달했다.
“루니.”
타앗!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푸른 늑대가 달려오던 물체의 앞을 가로막았다.
《뜨허어억! 부딪힌드아아아! 아빠!》
부딪친다고 느낀 탑승자가 부친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푸른 늑대와 충돌한 순간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기계가 자리에 멈춰 섰다.
“커다란 비눗방울 같네요.”
세이지가 어색하게 웃으며 이를 묘사했다. 미끄럼틀에 이어 아이다운 적절한 묘사였다.
정체 모를 물체는 커다랗고 두터운 물방울 안에 달려오던 그대로 갇혀있었다. 공기를 담은 비눗방울이 아니라 물이 가득 들어찬 원형의 방울이었다.
퐁!
방울이 터지며 터널 바닥에 물이 촤르륵 쏟아졌다. 에단과 바이칼은 푹 젖은 물체를 앞에 두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상관으로부터 눈짓을 받은 바이칼이 푹 젖은 물체에 다가가 똑똑 노크했다.
“이보십쇼? 저기요? 안에 잘 살아계십니까?”
《…….》
멀리서 소리 지를 땐 잘만 주거니 받거니 해놓고 이제 와서 묵묵부답이었다.
바이칼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어랍쇼? 설마 죽었나?”
“……너무 놀라서 기절했을 순 있겠지.”
에단이 한숨을 길게 뱉고는 검을 빼들었다.
“단장, 뭐 하시려고요?”
“자네 말대로 심장마비가 와서 죽었으면 곤란하지 않겠나.”
“그렇다고 저걸 벱니까?! 잘못 잘라서 속에 든 사람까지 다치면 어쩌시려고요?”
“약간만 도려내면 돼.”
“잘못 충격을 주면 폭발하는 기계일지도 모르는데요.”
“그러면 자네는 또 뭐가 나타날지 모르는 도로 한가운데에 이걸 버려두고 가자는 의견인가.”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쥬다스가 물체의 표면에 손바닥을 가볍게 얹었다. 찬물을 사용했음에도 금방 온수로 변해버릴 만큼 표면이 뜨끈하게 달구어져 있었다.
‘틈이 있어.’
그는 미드가르드에서 사용하는 수준만큼은 아니더라도 개발품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손잡이를 당기거나 버튼을 누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그의 예상대로 바람이 파고들어 틈을 벌리자 물체의 윗부분이 주전자 뚜껑처럼 덜컥 열렸다.
치이익!
과열된 내부에서 김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크고 둥그런 헬멧을 눌러쓴 소년이 그 안에 죽은 듯이 널브러져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