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97화 (19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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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아이의 이름은 리키.

올해로 열셋이 된 리키는 미드가르드의 하나뿐인 계절 ‘봄’에 태어났다.

봄이라곤 해도 실제 자연환경이 만들어내는 기후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온도, 같은 날씨, 같은 하늘 아래에서 아이는 태어나 13년간 자랐다.

‘리키.’

기억이란 걸 갖게 된 첫 순간부터 리키의 가족은 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사랑으로 돌봤기 때문에 전혀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

무척 유능한 발명가였던 리키의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기계로 친구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리키는 행복했다.

‘있잖아. 아빠가 없으면 난 어떡하지?’

어느 날 리키가 그렇게 물었을 때 아버지는 웃으며 답했다.

‘없긴 왜 없어. 리키도 알잖니? 아빠는 강해.’

‘응. 하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죽는대. 만약 내가 엄청 오래오래 살아서 100살이 되면, 그때 아빤 없을 거잖아.’

‘이런, 리키.’

우울해하는 아이를 품안에 힘주어 꼭 안은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었다.

‘그럼 아빠가 120살까지 살아줄게.’

‘어……?’

‘리키가 100살에 죽으면 아빠는 120살에 죽고, 리키가 200살에 죽으면 아빠는 220살에 죽을 거야.’

서로 똑 닮은 밀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시선을 맞부딪혔다.

‘약속할게. 절대 먼저 안 죽어. 그럼 안심이지?’

‘정말?’

‘아빠가 이제까지 거짓말한 적 있니?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네 편이야. 리키. 널 혼자 두지 않을게.’

그러나 그 약속은 이미 2년 전에 깨어졌다.

리키는 꿈에서 깨어나는 몽롱한 와중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

거짓말 안 한다는 이야기도 거짓말. 절대로 먼저 죽지 않겠다는 말도 거짓말.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까지도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잠에서 깼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이기 싫었다. 2년 전 사고 이후로 새벽마다 찾아오는 무기력증이 오늘도 어김없이 온몸을 번데기고치처럼 휘감았다.

도로록.

정신은 깼지만 여전히 눈은 감고 있던 리키의 귓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평소 집에서 듣던 익숙한 문소리도 아니었을 뿐더러, 이제 더 이상 아이에게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저렇게 무방비하게 발소리를 대놓고 나타나는 침입자라니? 당황하던 리키는 곧 잠결에 반쯤 잠겨 있던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아니지. 침입자가 아니라 내가 낯선 장소에 있는 거야. 여긴 내 방 침대가 아니야.’

이불은 너무 얇아서 거슬리고 베개도 너무 높아서 불편했다. 꾸고 싶지 않았던 꿈을 꿔서 그런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울렁거리는 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리키는 일단 실눈을 뜨고 낯선 상대의 행동을 살폈다. 마침 상대방은 침대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뭘 하려는 거지?’

다행히도 상대는 맨손이었다. 게다가 좀 더 체격이 크긴 했어도 리키 자신과 그다지 나이 차이가 많아보이지도 않는 소년이었다.

그가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일단 제압하는 데에 무리가 없으리라 판단이 섰다. 리키는 이런 때를 대비하여 방범용으로 발목에 걸고 다니던 투명 발찌가 제 위치에 잘 걸려 있는지 확인했다.

리키는 상대가 이불보에 손을 뻗는 틈을 타 날렵하게 몸을 일으켜 굴렀다. 그러면서 훈련한 동작대로 투명 발찌에 마력을 불어넣어 이를 발동시켰다.

철컥!

“움직이지 마.”

어느 틈엔가 발찌가 총으로 변해 있었다. 리키는 낯선 이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최대한 성질 더럽게 보이는 말투로 그를 협박했다.

“허튼 수작 부리면 쏠 거야. 묻는 말에만 대답해.”

“…….”

“누구야, 너.”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이라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총에 머리를 맡긴 상태에서도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전자란다.”

“도전이라니, 나한테 뭘 도전하게?”

“네가 아니라 시솝을 만나서 하려는 일이지.”

“시솝?!”

갑자기 스케일이 달라지는 대화에 리키가 히익 숨을 삼켰다. 자신을 시솝의 도전자라 소개한 낯선 상대는 뒤통수에 총구를 맞댄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다루지 못하는 기계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바람에 치일 뻔했던 이이기도 한단다.”

“뭐?”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테지.”

크르르!

섬뜩한 소리가 밑에서 들려왔다. 분명 처음엔 있는 줄도 몰랐던 푸른 늑대가 소년의 곁에 선 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만 같은 험악한 태세에 리키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도로 질주…… 치일 뻔……. 아!’

생각났다. 리키는 사색이 되어 맥없이 총구를 바닥으로 내렸다.

“맞아. 2호가 폭주해 버려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정말 죽는구나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앞에 사람들이 잔뜩 나타나서.”

“기억나느냐?”

“근데 그 뒤로는 대체 어떻게 된……!”

리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어보려는 찰나 초승달 같은 불빛이 번쩍 어둠을 가르고 빛났다.

퍼억!

알싸한 통증이 리키의 오른손을 가격했다. 동시에 손에서 놓친 총이 바닥에 떨어져 빙글빙글 돌며 벽까지 가 부딪혔다.

리키가 무엇으로부터 공격받았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긴 도가 형형히 빛나는 날을 완전히 드러냈다. 그게 곧장 리키의 목으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에단.”

“……예.”

에단은 주인의 명에 깔끔히 승복했다. 그러나 검을 거두었을 뿐, 여전히 리키를 향해서는 서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 휘두른 검에 그대로 목이 날아갈 뻔한 리키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바닥에 흐물흐물 주저앉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하나 다짜고짜 총부터 겨눈 네 잘못도 있으니 앞으로는 조심하려무나.”

슬슬 동이 터오고 있었다. 어둑어둑하던 방 안에 창문을 타고 물안개처럼 촉촉하고 묽은 햇살이 번졌다.

희미한 태양빛 아래 드러난 소년의 금안이 부드럽게 리키를 마주보았다.

“미, 미안.”

리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했다.

“으으, 정말 미안. 난 내가 자는 사이 납치라도 당한 건 줄 알고…….”

“괜찮다. 아가. 우리도 더는 괘념치 않으마.”

소년, 쥬다스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본 리키가 사과하던 중이란 사실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전혀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데도, 이상하게 아버지가 떠오르는 미소였다.

잠시 후 완전히 동이 터 아침이 되었을 무렵, 숙소에 머물고 있던 일행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

엉뚱한 만남으로 쥬다스 일행 사이에 끼어들게 된 리키가 따뜻한 우유를 홀짝이며 눈치를 살폈다. 그들이 하룻밤을 묵은 장소는 근처 도시에 있는 커다란 숙박시설이었다. 무려 방 하나가 열 명이 넘는 대인원이 머물기에도 불편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

쥬다스가 폭주한 기계 장치 안에서 기절한 리키를 데리고 와 아무 경계도 하지 않고 돌보아주었단 얘기를 들은 리키는 대단히 민망해졌다.

은인도 몰라보고 총부터 들이댔으니 그의 수하에게 칼침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뻔했다.

‘그나저나 시솝의 도전자라더니 엄청 여유롭네.’

한자리에 모여서 작전회의라도 하려는 줄 알았더니 다들 한갓지게 빵에 잼이나 바르고 있었다.

가끔 에단이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만 빼면 불편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냥 여행 온 사람들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리키는 우유에 입술을 담근 채 힐끗 쥬다스를 훔쳐보았다.

“주인, 플루비한테 빵 먹여도 돼?”

“너무 많이 주면 탈이 나니 적당히만 주렴.”

그 곁에는 가야가 빵을 조각조각 찢어 손바닥 위로 모으고 있었다.

루바르잔 출신으로 구성된 일행 가운데 유독 이질적인 생김새였다. 리키는 그의 검은 머리와 복숭아색 피부, 품이 넓은 의상 등을 보고 해동 출신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쥬다스를 향해 주인이라고 부르는 걸 듣고 노예인가 싶었는데 하는 태도는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주인을 존중하고 있긴 하지만 노예가 가져야 할 공손함과 명령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움직임이 전혀 아니었다.

‘반말하는 거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둘이 친구 사이 같기도 한데. 컨셉인가?’

졸지에 가야는 리키의 머릿속에서 특이한 컨셉을 좋아하는 매니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플루비. 아침 먹자.”

“꾸구구구.”

빵을 찢고 있을 때부터 이미 가야의 곁에 붙어있던 플루비가 애교랍시고 비둘기 소리를 따라하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리키는 그 광경에서 도통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괴상한 생물체…….’

생긴 건 영락없이 전설 속에 나오는 드래곤이지만 크기가 닭 한 마리만큼 작았다. 짐승의 새끼가 끼잉끼잉 우는 것과 흡사하게 삑삑 소리를 내며 울지만 지금처럼 비둘기 소리를 따라 하기도 한다.

가뜩이나 기계와 사람이 지배한 미드가르드에서 한 번도 야생동물을 만난 적 없는 리키는 특이한 외향을 가진 플루비가 마냥 신기했다.

“플루비의 종족명은 와이번이란다.”

“콜록!”

리키는 우유에 입술을 담근 채 마시지는 않고 멍하니 있다가 흠칫 놀라 사래에 들리고 말았다. 입을 틀어막고 우유를 뿜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리키를 보며 쥬다스가 미안함을 담아 웃었다.

“이런, 괜찮으냐?”

“어, 으, 네.”

리키는 존대도 아니고 하대도 아닌 애매한 화법을 사용했다. 처음엔 나쁜 뜻으로 침입한 사람인 줄 알고 험악하게 굴었지만 자신을 구해줬다는 은인에게 계속 함부로 대할 이유는 없었다.

나이도 조금이나마 쥬다스가 더 많았고 일행 중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걸로 보아 지위도 높아 보였다. 그러다 보니 평생 쓰지도 않던 존대가 입안에서 저절로 맴돌았다.

뿐만 아니라, 나이나 지위 등을 떠나서 그에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저기요, 분명 시솝을 만나러 갈 거라고 했지?”

리키는 입가를 타고 흐른 우유를 소매로 슥슥 닦으며 말했다. 어중간한 화법이긴 했으나 뜻은 통했기에 쥬다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야.”

“음?”

“나도 시솝을 찾아다니던 중이었어. 2년 동안.”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바이칼이 빵에 버터를 바르다 말고 불쑥 끼어들었다.

“미드가르드인 사이에서도 시솝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나 봐?”

“당연하지. 시솝은 미드가르드에서 모든 자유를 손에 쥔 일인자야. 굳이 자기 위치를 구구절절 알릴 이유가 없잖아.”

“하긴. 위치를 공개하면 사람들이 엄청 귀찮게 굴겠지.”

쥬다스도 시솝의 그러한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 또한 전생의 삶에서 사람에게 지쳐 도망치듯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않고 은거해 버렸었기 때문이다.

‘이그레트’가 사망한 지 17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그가 살아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시솝을 찾아다니는 미드가르드인들처럼 루바르잔 제국에서도 ‘이그레트’를 찾는 걸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분명 존재했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떠올린 쥬다스가 쓴웃음을 삼키는 사이 바이칼이 다시 리키를 향해 물었다.

“근데 너 같은 꼬마가 무슨 목적으로 시솝을 찾는 건데?”

“시솝은 영생을 손에 넣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리키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찾아서 꼭 알아낼 거야.”

그의 밀빛 눈동자가 강한 열망을 품고 이글거렸다.

“영생을 사는 방법.”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업로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5월의 마지막 월요일이네요.ㅎ 날씨도 이젠 완전히 여름이 되었습니다. 지나가다 충동구매한 선풍기가 빨리 배송오기만을 바라며....(...)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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