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98화 (19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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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영생.

이제 막 13살 꼬마가 바랄 법한 소망이 아니다. 그리 여기면서도 쥬다스는 그 말이 어떤 생각에서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심지어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다시 태어났어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끝에서 머리가 하얗게 세고 온몸이 병들어 기력을 잃어가던 순간 그는 다가오는 죽음과 적나라하게 마주했다. 죽음은 아무리 강한 힘로 막아보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이 한 번도 손에 넣어보지 못한 영원이란 개념을 죽음으로서 깨닫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한 번 죽은 인간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이 소중했는지도 아무 상관없이 영원토록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죽음을 두고 영원한 상실이라 부르기도 했다.

‘저 아이는 주변에서 그러한 큰 상실을 느낀 적이 있구나.’

쥬다스는 리키의 소중한 존재가 죽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냈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소중히 여기던 자가 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순간은 대부분 크나큰 공포로 남게 마련이다.

그가 시선을 내리고 침묵하자 바이칼이 휘파람을 휙 불어 정적을 깨뜨렸다.

“어이쿠. 포부가 대단하네. 시솝이 영생을 산다는 건 어떻게 확신해?”

“시솝은 이미 인간의 수명을 넘어선 지 오래야.”

리키는 단호하게 답했다.

“영생이 아니라도 좋아. 그는 수명을 늘리는 법을 알고 있을 거야. 그거면 돼.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계속 살아 있기만 하면.”

“왜 그렇게까지 오래 살고 싶어 하는데?”

“그건…….”

사실 이유는 명확했다. 리키는 무릎위에 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살아 있기만 하면 아빠를 되살릴 수 있어.’

과학과 마법, 그게 아니라면 모든 나라에서 금기로 지정한 사령술을 이용해서라도 어떻게든 돌이킬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리키는 영생에 가까운 시간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걸 오늘 막 처음 본 타인들에게 설명하긴 힘들었다.

“그, 그건 너희 목적과 관계없잖아? 내가 하려던 말은, 아으, 어차피 시솝을 찾을 거면 같이 찾자고!”

“흐음.”

쥬다스는 수락하는 말 대신 식탁에 턱을 괸 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금안과 시선이 마주친 리키가 움찔 어깨를 좁혔다.

“왜…… 왜?”

“꼭 우리가 무슨 목적으로 시솝을 찾는 건지 알고 있다는 투로구나.”

“아.”

리키는 긴장했던 숨을 내뱉으며 왼손에 끼고 있던 손등장갑을 벗었다.

“그야 당연하지. 미드가르드에서 지금 너희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드물걸?”

그 말과 함께 손등이 불쑥 내밀어졌다. 소년의 손등에는 둥근 전구처럼 생긴 연분홍색 구체가 박혀 있었다. 꼭 살아 있는 심장을 손등에 박은 것처럼 구체가 천천히 박동하고 있었다.

“이걸 봐.”

위이잉-

리키가 손등에 박힌 연분홍색 구체에 마력을 주입하자 묘한 진동음과 함께 구체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반짝이는 분홍빛 정령이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언제나 주인님의 편안한 하루를 위해 일하는 내비게이션, Navi.J0527입니다. 현재 기온 23도, 날씨도 쾌적하네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비날개처럼 팔랑이는 4장의 연분홍색 날개, 길게 늘어뜨려 흩날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손가락만 한 크기로 주인의 곁을 맴도는 모습까지. 영락없이 정령의 모습이었다.

「어머. 저 애도 정령인가요?」

「맞는 것 같은데.」

「이상하다요. 저런 정령은 본 적 없다요.」

「수상하군.」

다른 정령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생김새와 품고 있는 기운까지는 다른 정령과 비슷했지만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좀 더 봐야 알겠지만 쟤, 일단 확실히 정령이야.」

자연계 정령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리키의 분홍빛 정령은 방글방글 웃기만 했다. 리키는 그녀에게 일상적인 태도로 명령했다.

“제이. 오늘의 핫이슈를 검색해 줘.”

「네, 주인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상냥하게 대답한 분홍빛 정령은 잠시 후 스프레이를 뿌리듯 스르륵 허공에다가 빛줄기를 이어 한 장면을 그려냈다.

[노예 시장 철폐 사건.]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제목 밑에는 폐허가 된 노예시장과 쥬다스 일행의 모습, 그리고 그가 말했던 ‘시솝에게 도전한다’는 이야기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입체 영상으로 자신들의 행적을 확인한 세이지가 신기한 눈으로 분홍빛 정령을 올려다보았다.

“와. 이건 통신구 같은 역할인가요?”

“내비게이션이야. 기계형 정령이라고 들었어.”

「뭐야. 기계형 정령도 있었어?」

유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던 바람의 정령조차 몰랐던 사실이었다.

미드가르드에서 ‘내비게이션’이라는 정령이 출시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기도 했고, 또 자연환경을 말살시킴으로 인해 바람이 접근하기 어려워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충격받은 바람의 정령의 곁에 날아든 카니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아마도 저 내비게이션, 인간이 만들어낸 정령이 아닐까 해요.」

「인간이 정령을 만들어 낸다고?」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죠. 따지자면 물질계 정령에 속하겠네요.」

물질계 정령 역시 주로 인간의 소망에 의해 태어난다. 강하게 바라는 마음을 빌어, 소중히 아껴주었던 마음을 모체 삼아 그렇게 물질에 깃들어 실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성향이 조금 다르긴 했으나 기계형 정령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라고 자연계 정령들은 짐작했다.

「으응, 그렇지만 생명력이 전혀 느껴지질 않으니 조금 무섭긴 해요.」

「꼭 인형을 보는 느낌이다요.」

토니가 날개를 바르르 떨며 쥬다스의 옷깃에 매달렸다. 정령들이 충격 받은 만큼 쥬다스 역시 이 기이한 현상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자 리키가 손으로 휙 영상을 가리켜보였다.

“봐. 이런 식으로 미드가르드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너희에 대해서 모를 리가.”

“그 아이. 기계형 정령이라면 네가 직접 만든 게냐?”

“어? 제이(J) 말이야?”

영상을 종료시킨 제이가 파다닥 날아 리키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리키는 자신의 정령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제이는 우리 아빠가 만들었어. 그래서 좀…… 구식이긴 한데. 업그레이드만 제때 해주면 불편하진 않아! 아빠가 생일 선물로 준 내비게이션이라 정도 많이 들었고.”

「현재 밀린 업그레이드가 총 5건 남았습니다.」

“……기다려. 좀 이따 해줄게.”

리키가 들어가 있으라고 명령하자 분홍빛 정령은 마치 개가 제집을 찾아 들어가듯 팟 손등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라진 정령의 자취를 쫓아 손등을 내려다보던 리키는 다시 고개를 들고 쥬다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에휴, 업그레이드 적용이 점점 버거워지긴 하지만. 최신 내비게이션은 엄청나게 비싸서 살 엄두도 안 나.”

“…….”

“미드가르드를 여행할 거라면 하나쯤 구매해 두는 걸 추천해. 뭐 나랑 동행할 거라면 굳이 살 필요 없고. 헤헤.”

‘정령을 구매하고 판매한다라.’

자연계 정령들과 계약한 정령술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기계형 정령은 스스로 계약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돈을 주고 구매한 사람에게 강제로 귀속된다는 뜻이다.

노예 시장을 봤을 때만큼이나 불합리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정령들의 세계는 인간인 그가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게 기계형 정령들이 살아가는 형태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가 존중이고 어디까지가 방관인지 점점 판단하기 어렵구나.’

쥬다스는 미드가르드의 문화를 접하면 접할수록 골치가 아파지는 걸 느끼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때? 어차피 너희들은 강하니까 나 같은 꼬마 하나쯤 낀다고 겁먹진 않을 거 아냐?”

“허 참. 거 당돌한 녀석이네.”

자기 입으로 자신을 꼬마라고 칭할 정도면 상당히 영악하단 뜻이었다.

혀를 찬 바이칼이 슬쩍 에단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때와 변함없이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5년 지기 친구의 눈으로 그 안에 묻어둔 짜증을 솎아낼 수 있었다.

‘역시 엄청 싫어하시는군.’

예전부터 제멋대로 구는 꼬마는 에단의 성미와는 아예 맞지 않았다.

평소 야생마처럼 날뛰곤 하는 바이칼이 그 앞에서만큼은 방정맞은 행동을 자제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에단은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다. 어찌 보면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남들과 자신 간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었다.

그는 특히 주군에게 피해를 끼친다거나 함부로 대하는 자가 생기면 칼같이 대응했다.

루바흐 학원을 다닐 적에 쥬다스가 초기 입지를 다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한 게 바로 이러한 에단의 숨은 노력들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주군의 목을 노린데다가 제멋대로 굴고 있는 리키를 참아주고 있는 건 순전히 명령 때문이었다.

쥬다스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벌써 리키의 목을 날려도 스무 번은 더 날렸을지도 몰랐다.

제 목의 안녕이 몇 번이나 위협받았는지 모르는 리키는 서슬 퍼런 눈길을 받으면서도 쥬다스에게 동행제의를 거듭했다.

“내가 지금까지 돌아다니면서 알아낸 정보 중에, 시솝이 관심가질 만한 주제가 몇 가지 있어. 나한텐 힘이 없어서 저지르지 못했던 일들이지만 노예 시장을 철폐해 버린 당신들이라면 가능하잖아?”

다시 손등장갑을 착용하여 내비게이션을 가린 리키는 고개까지 숙여가며 간절히 부탁했다.

“모아둔 정보를 전부 그쪽한테 제공할게. 숙식 비용도 꼬박꼬박 낼게. 그냥 시솝의 초대장이 오면 같이 데려가주기만 하면 돼. 응?”

쥬다스 일행으로서도 미드가르드에 대해 안내를 해줄 사람이 들어온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리키의 말마따나 고작 열세 살 꼬마 하나를 두려워해서 결정을 고민하는 건 아니었다. 쥬다스는 아이가 시솝을 만나 하려는 일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영생. 그리고 죽은 자를 되살리는 일. 그건 인간이 바라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소중한 자의 죽음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되살리길 바라게 된다.

쥬다스는 아이가 바라는 게 비단 영생뿐 아니라 누군가를 되살리는 것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잠시 리키를 바라보던 쥬다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 같이 가보자꾸나.”

“정말?! 열심히 협력할게요!”

“단,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겠느냐?”

“응. 뭔데?”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던 리키는 돌아온 답변에 멈칫 밝게 웃고 있던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곧장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쥬다스는 머뭇거리는 아이를 향해 한 번 더 질문했다.

“내게 약속할 수 있겠느냐?”

“……물론이지.”

리키는 눈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아. 약속할게.”

‘어차피 약속 따윈 전부 거짓말이니까.’

불편한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리키는 장갑을 낀 손을 당당히 앞으로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손에 상대 역시 부드럽게 응해왔다.

“이제부터 우린 같은 편이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6월의 첫 시작이네요. ㅎㅎ 봄이 왔다, 따뜻하다 얘기하던 게 엇그제같은데 벌써 여름에 속하는 6월달이라니...ㄷㄷㄷ

과연 그마만큼 더워지기도 했고요.ㅠ

강해지는 더위 조심하시고, 이번 달도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ㅎ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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