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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콜로세움 1층에 위치한 데스크 앞에는 무법국가라는 별칭이 무색하리만치 사람들이 착실하게 차례를 지켜 줄을 서 있었다.
콜로세움에 온 자들이 전부 골드 등급증을 얻기 위해 모인 사람들인 만큼 여기서만큼은 함부로 큰소리를 치기가 애매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쥬다스도 차분히 그 줄에 합류했다.
「예상 소요 시간은 앞으로 약 1시간 47분입니다.」
딱히 시키지 않아도 제이가 알아서 시간을 계산해 주었다. 지루한 표정으로 앞줄을 내다본 가야가 등을 긁으며 투덜거렸다.
“여긴 다 야행성인가? 밤에도 잘 돌아다니네.”
“보니까 낮에도 사람 많던데요. 그냥 밤낮 구분이 없는 게 아닐까요?”
그들이 며칠간 미드가르드를 돌아다녀본 결과, 대체 잠은 언제 자나 싶을 정도로 늘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응. 각자 활동 시간이 다 달라. 낮이 편한 사람들은 낮에, 밤이 편한 사람들은 밤에 움직이는 거지.”
리키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알려주자 그와 대조적으로 루바르잔 출신 일행들은 찜찜한 기색을 표했다.
‘정말 모든 면에서 제국과는 다르군. 친해질 수 없는 이유를 알겠어.’
루바르잔에선 저녁노을이 지는 순간 모든 업무가 종료된다. 여행객들을 위한 여관이나 특수직종만이 영업을 지속할 뿐 대부분 하던 일을 중단하고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런 루바르잔에서 온 일행들은 생활 패턴만 따져 보아도 대륙 아래위로 가까이 붙어 있는 나라들끼리 전혀 친해지지 못하고 앙숙처럼 싸워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 나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생활양식부터 시작해서 제도, 종교 및 가치관까지 전부.
“음?”
그렇게 담소를 나누며 대기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고 있는 일행 뒤에 새로 줄을 선 사람이 눈가를 찡그렸다.
“가만. 이게 누구야.”
“……?”
“그 대단하신 사기꾼의 아들 아닌가?”
리키를 향해 씹어뱉듯 말하는 자는 거구의 중년 사내였다.
아이가 돌아보자 잘 익은 밀밭처럼 연한 황색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사내는 차가운 분노가 서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로키 파르바우티. 시솝 오딘의 보물을 빼돌리고 도망친 사기꾼 말이네.”
“뭐? 아빠는 사기꾼이 아니야!”
리키가 버럭 소리 질렀지만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이를 듣고 웅성웅성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로키 파르바우티’? 전 정보관리 스탭 이름 아니야?”
“맞아.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죽었지 아마.”
“시솝의 보물을 뒤로 빼돌렸다가 스탭진에서 파문당했다던데.”
“아냐, 그건 다 거짓말이야! 아빠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
억울한 외침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멍청한 꼬마야. 내가 왜 널 알아볼 수 있었던 것 같나?”
먼저 리키를 알아본 사내가 손가락을 들어 분홍빛 정령을 가리켰다.
“저 내비게이션 덕분이지.”
“제이?”
“그래, 그건 사기꾼 로키 놈이 빼돌린 내비게이션이다. 원래는 시솝에게 갔어야 할 모델이지.”
리키라고 몰랐던 사실은 아니었다.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죽는 그 순간까지 곁에 있었다.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사람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저 아버지가 가진 발명품이 탐이 났을 뿐이면서.’
리키는 입을 꾹 다물고 이를 갈았다.
“그리고 나는 그때 로키를 도와 신제품 개발에 참여했던 개발자 동료다.”
“동료라면서 왜 끝까지 아버지를 믿지 않았어? 제이는 아빠가 빼돌린 물건이 아니야. 그게 사실이라면 왜 시솝이 지금 제이를 가지고 있는 날 찾지 않겠냐고!”
말마따나 감히 시솝을 상대로 사기를 친 범죄자의 아이를 아직까지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지난 2년간 시솝을 만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만날 수가 없었다.
“봐. 제이는 구식 모델이야. 로딩도 오래 걸리고 가끔 렉도 먹어. 업데이트도 아직 안 받아서 기능도 몇 개 없고.”
이런 상황에서도 제이는 차분히 그의 손등에 앉아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키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제이를 눈앞에 들어 올렸다.
“2년 전, 아빠가 마지막 생일선물로 나한테 준…….”
“그야 내용물을 뜯어봐야 알 일이지.”
아버지의 동료였다던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리키의 말을 잘랐다.
“그때 우리가 개발하던 기능이 뭔 줄 아나?”
“무슨.”
“바이러스다.”
“……!”
「바이러스. 기계 프로그램에 침투하여 시스템을 감염시키고, 결과적으로 파괴하는 악성 프로그램을 뜻합니다.」
제이가 놀란 리키의 반응을 감지하고 단어 뜻을 알려주었다. 물론 리키는 뜻을 몰라서 놀란 건 아니었다.
“그 빌어먹을 연구가 실패로 끝난 직후 나는 개발자를 때려치우고 지금처럼 승급전에나 참전하게 되었지. 하, 바이러스에서 손을 떼고 나니 어찌나 마음이 편안하던지.”
“실패했다며? 왜 아빠를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거야?”
“실패? 실패한 건 공식적인 발표였을 뿐이지. 로키 그 사기꾼은 빌어먹게도 천재였어. 놈은 바이러스 개발에 성공했다. 그게 바로 네가 들고 있는 그 내비게이션 ‘J’다.”
리키는 멍하니 제이를 내려다보았다. 분홍빛의 정령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솝이 널 내버려 두는 이유는 글쎄. 아마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상하잖아. 그럼 왜 시솝은 아빠한테 바이러스를 개발하라고…….”
이해할 수 없었다. 시솝은 즉 미드가르드의 1인자. 이미 전 영토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바이러스라는 무기를 만들어낼 이유가 도무지 짐작가지 않았다. 리키가 충격에 빠진 사이 남자는 계속 떠들어댔다.
“알 게 뭐냐, 꼬맹아. 보아하니 그 내비게이션을 무기로 승급전에 참전할 생각이었나 본데. 아서라. 당장 그걸 파괴해야 해.”
“제이를…… 파괴하라고?”
“그래. 콜로세움에 참전하기 전에 내가 널 알아봐서 천만다행이로군. 자칫 잘못했다간 바이러스가 유포될 뻔했잖아.”
아버지의 동료였다던 중년 남자는 리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어서 내게 넘겨. 대신 파괴해 주마.”
“싫어.”
“응?”
“싫다고! 제이는 아빠가 내 생일 선물로 준 정령이야. 멋대로 사기꾼이니 바이러스니 떠들어대지 마.”
제이를 감싼 채 으르렁거리는 리키를 본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고집부릴 일인 줄 알아? 당장 그걸 내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바이러스든 뭐든 알 게 뭐야. 애초에 시솝의 물건이었으면 댁같이 배 나온 아저씨 말고 시솝이 직접 나서라고 해!”
“이 망할 꼬맹이가!”
철컥!
말로 해서 들을 것 같지가 않자 사내는 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겨누기도 전 그의 목에 차가운 금속이 와 닿았다.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이 아이는 우리 일행이라서.”
‘검?’
기계 문화로 점철된 미드가르드에선 익숙하지 않은 무기였다.
“이 이상의 무례는 봐주기 어렵구나.”
잠시 목에 닿은 검날을 신경 쓰고 있던 사내는 그 사이 리키의 어깨를 잡아 뒤로 물러서게 한 쥬다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너는 누구냐.”
“흠.”
쥬다스는 답하는 대신 무언가 고민하듯 턱을 짚었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짜증이 치솟은 사내는 자신의 내비게이션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순식간에 전신에 튼튼한 갑주가 생겨났다. 시커먼 전신갑주에 둘러싸인 사내의 모습은 흡사 거대한 몬스터를 보는 듯했다.
우람한 강철 손으로 에단의 검날을 장난감 던지듯 잡아 쳐 낸 그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방해하려 거든 먼저 나를 무릎 꿇려 봐라! 골드 등급 중에서도 20위권 경기를 하러 온 나를 이깟 칼 쪼가리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
쿠웅!
순간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숨을 헉 들이켰다. 제 눈을 의심해서 비비적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말한 대로, 그건 정말로 큰 오산이었다.
“그래. 일단 싸울 수 있어야 이길 수도 있는 거지.”
어차피 칼이든 총이든 쥬다스에게는 전혀 필요 없었다. 이미 사내는 그 앞에 쓰러져 강제로 엎드려 있었다.
땅의 정령이 내리누르는 강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강철갑주에서 우득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면 그 말인즉 나와 싸우고자 한 것인가.”
“끄윽. 수, 숨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고 숨조차 막혀왔다. 죽음을 목전에 둔 공포 탓에 눈물과 함께 침이 질질 흘렀다.
“건방지구나.”
기계보다 무감정한 어조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위압감에 눌려 하나 둘씩 뒷걸음을 치기 시작하던 순간, 누군가 다급히 달려왔다.
“그만!”
꼭 폭탄을 맞은 사람처럼 머리가 덥수룩한 남자가 구경꾼들을 헤집고 불쑥 튀어나왔다.
마른 체형에 안경을 끼고 있었다. 헥헥거리며 숨을 한 차례 고르던 그는 쥬다스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해보였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저는 미드가르드 등급관리 스탭, ‘헨리’입니다.”
‘STAFF.’
그의 목에 걸린 스탭 목걸이를 본 쥬다스가 정령의 힘을 훅 거두어들였다.
바닥에 짓눌린 채 숨이 막혀 있던 사내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그 모습을 힐끗 본 헨리가 쥬다스를 향해 정중하게 제안했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저와 함께 따로 대화를 나누지 않으시겠습니까?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왜, 왜 이런 일에 스탭이 직접 나서는 거지?”
누군가 물었다. 서열싸움을 비롯해 미드가르드 내에 벌어지는 전투는 늘 자율적으로 일어났으며 상부에서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야 응당 스탭으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요.”
헨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솝의 도전자 여러분.”
쥬다스 일행을 돌아보며 묻는 말에 구경꾼들 사이에서 더 이상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헨리는 일행을 데리고 빈방으로 안내했다.
“엥? 이렇게 좁은 방에서 대화합니까?”
바이칼이 불만 섞인 의문을 터뜨렸다. 그럴 만도 한 게 방 안에는 테이블도 의자도,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일행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방이라기보단 그냥 어디 물건 쌓아두는 용도로 쓸 법한 창고 같았다.
“아뇨. 이건 승강기입니다.”
헨리는 이를 몇 초간 대기하면 원하는 층수로 이동할 수 있는 기계라고 설명했다.
그 설명대로 잠시 후 그들은 콜로세움의 꼭대기인 33층으로 올라갔다. 승강기에서 내리자 널따란 공간을 따라 이어진 창문 너머로 비를 흩뿌리는 하늘이 보였다.
헨리는 흐린 하늘을 배경 삼아 그들을 소파에 앉혔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죠. 제가 여러분을 마중 나온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중.’
쥬다스는 그의 표현에 무게를 두었다. 그냥 스탭으로서 등장한 게 아니라 무언가 임무를 받고 나왔다는 뜻이다.
“시솝께서 여러분을 ‘라그나로크’에 초대하셨습니다.”
품에서 초대장을 꺼낸 헨리가 그걸 곧장 쥬다스에게 내밀었다.
“라그나로크라면?”
“시솝께서 머무시는 공간입니다. 미드가르드의 심장이라 할 수 있죠.”
“나라의 심장은 수도 아스가르드가 아닙니까?”
“으음.”
헨리는 곤란한 듯 콧등을 찡그렸다.
“아스가르드는 나라의 수도로서 중요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심장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어찌하시겠습니까? 시솝의 초대에 응할 경우 초대장을 열어보시면 됩니다.”
“거절할 수도 있습니까?”
“에, 그건 의외네요. 도전자인 여러분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물론 거절하셔도 됩니다. 미드가르드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나라니까요.”
쥬다스의 질문에 헨리는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