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02화 (20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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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자를 노예로 만들어 사고파는 ‘자유’만큼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는 존중받아야 할 자유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억압이 필요한 자유도 분명 있었다.

“망설일 필요 없잖아? 얼른 초대를 수락하자!”

리키는 잔뜩 흥분한 어조로 재촉하며 쥬다스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시솝의 초대장이 눈앞에 있다.

‘드디어, 드디어 시솝을 만날 수 있어!’

꼭 전설 속에 나오는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램프를 손에 쥔 기분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리키는 기대감에 취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리키를 바라보던 쥬다스는 초대장을 열어보지 않고 그대로 반으로 접어버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시솝에게 도전하러 가겠다며?”

크게 당황한 리키가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따지자 쥬다스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서 한 번 더 네 의견을 확인하마.”

“확인? 그딴 게 왜 필요해. 지금 당장…….”

“리키.”

소리를 높이지도, 표정을 굳히지도 않았는데 이름 한 번 불린 걸로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릴 적 사고를 치고 아버지한테 혼나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쥬다스는 담담히 아이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만에 하나 아까 그자의 말대로 네 정령 제이가 정말 시솝이 원하던 ‘바이러스’라면.”

순간 시솝을 만날 수 있다는 흥분으로 과열됐던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냉기가 흘러들어왔다.

“너는 원하는 걸 얻는 대신에 시솝에게 그 바이러스를 넘길 생각이 있느냐?”

“그…… 건.”

리키는 잠시 답을 망설였다.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줄 수 없어.”

그는 저장된 마력을 아끼기 위해 손등 위 기계로 돌아간 제이를 반대 손으로 감쌌다.

“바이러스라서가 아니야. 제이는 이제 하나뿐인 내 가족이란 말이야. 달란다고 어떻게 덜컥 주겠어?”

“영생을 살게 해주는 조건이라고 해도?”

“다, 당연하지.”

목소리가 조금 떨리긴 했지만 대답만큼은 단호했다. 그걸 본 세이지는 이해가 가지 않아 살짝 미간을 좁혔다.

‘뭐지? 분명 굉장히 간절해 보였었는데.’

그리도 간절히 바란 소망을 이루어주는 대가라고 친다면 저렇게 한 치 고민도 없이 걷어찰 수 있을 리가 없다.

세이지는 리키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무언가 숨기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다 문득 이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헨리에게로 시선이 갔다.

‘이 사람은 스탭이랬지. 바이러스니 뭐니 하는 대화를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사실 둘의 대화를 듣고 조금 어리둥절해하거나 놀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래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눈으로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군주제가 아닌 서열제 사회다 보니 타인의 일에 딱히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미 시솝으로부터 무언가 언질을 받은 상태인건지 알 길이 없었다.

세이지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헨리도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싱긋.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상대가 갑자기 웃는 바람에 당황한 세이지는 움찔 시선을 피해버렸다. 형을 따라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걸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이런 처세에는 약했다.

저런 능구렁이 같은 자들을 상대로도 아무렇지 않게 연기하고 결국 제압해버리는 쥬다스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스탭 헨리.”

“결정하셨습니까?”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오우!”

헨리는 과장되게 놀란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빠른 결정이네요! 따로 점검하실 시간은 더 필요 없으신 겁니까?”

“어차피 시솝을 만나고자 함이었으니 준비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아하. 그럼 제가 드린 초대장을 펼쳐주시면 됩니다. 자동으로 라그나로크에 입장하실 수 있을 겁니다.”

빙글빙글 웃는 헨리에게서 시선을 거둔 쥬다스가 반으로 접어둔 초대장을 느릿느릿 펼쳤다.

빳빳한 흰 종이가 접힌 선을 따라 한 겹 한 겹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미드가르드의 인장이 찍힌 용지가 드러나면서 그 안에서 강렬한 마력파동이 일어났다.

파아앗!

마치 박스에 입장할 때처럼 눈부신 하얀 빛이 그들을 삼켰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쥬다스는 빛이 사그러들 때쯤 다시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스탭의 말처럼 어느 틈엔가 자동으로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하하, 놀라셨습니까? 라그나로크에는 무수히 많은 방이 존재합니다. 도전자님의 일행분들은 다른 방에 들어가 계시지요.”

지금 쥬다스의 눈앞에는 오직 스탭 헨리뿐이었다. 그들이 서 있는 장소는 현실세계 같지 않은 기이한 장소였다.

훅 시원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신전 같군.’

하얀 돌기둥과 길게 펼쳐진 대리석이 경건한 신전을 연상케 했다.

뻥 뚫린 기둥 사이사이 엿보이는 연두색 하늘을 배경으로 파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밀밭은 은빛 물결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꿈결처럼 몽환적인 풍광이다.

“왜 우리를 굳이 다른 방에 나눈 겁니까?”

“음, 글쎄요.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일까요? 하핫. 시솝의 도전자는 당신 하나뿐이잖습니까? 나머지는 그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거나 다른 볼일이 있는 어린 친구거나.”

“…….”

그 어린 친구는 도전자님과 목적이 다르니 따로 보는 게 당연히 효율적이죠, 헨리는 대리석 길을 앞서 걸으며 떠들어댔다.

“그런데.”

“……?”

“듣던 것과 태도가 많이 다르시군요.”

“그렇습니까?”

“정보에 의하면 시솝의 도전자는 강하고 오만하며 무서울 정도로 고압적인 이미지라고 하던데요.”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지요.”

쥬다스는 미드가르드에서 보인 태도가 그저 만들어낸 이미지였음을 인정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스탭이 미소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역시 그런 겁니까? 한데 왜 끝까지 그 이미지를 고수하지 않으시는 거죠? 저도 시솝 아래 스탭일 뿐이니 꺾어야 할 대상이 아닙니까?”

“나는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또한.”

쥬다스의 태연한 대답을 들으며 앞서 가던 스탭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스탭이라 불리고 싶은 것 같기에 그리하였을 뿐입니다.”

“아아. 그래서 도전자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은.”

뒤를 돌아보던 헨리가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그의 덥수룩한 뒤통수에 삐죽 튀어나온 꽁지머리가 보였다. 그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내게 장단을 맞춰주셨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서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쥬다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이유까지 설명해 주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분께서 직접 스탭 노릇을 하고 계실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으니까요.”

“푸흐흐.”

헨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곤 자리에 멈춰 섰다.

어느덧 그들은 하얀 신전의 중심부까지 도달해 있었다. 천장 없이 뻥 뚫린 연두색 하늘에선 노란깃털을 가진 새 몇 마리가 지저귀며 날아갔다.

“아이고, 이런. 제가 도전자님을 너무 얕본 모양이네요. 이거 한 방 먹었습니다?”

흘러내린 안경을 제대로 고쳐 쓴 헨리가 쥬다스를 향해 돌아서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시 정식으로 소개하죠.”

“…….”

“미드가르드의 시솝. 오딘 헨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전자님…… 아니.”

헨리가 손가락을 모아 딱 소리를 내자, 쥬다스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반가면이 후두둑 바스러져 버렸다.

바람에 실려 맨얼굴 위로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곳은 라그나로크, 시솝이 기거하는 미드가르드의 심장이다. 가면을 벗어 던진 시솝 앞에서는 그 역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루바르잔의 황태자 전하.”

드디어 쥬다스의 금안을 오롯하게 마주볼 수 있게 된 오딘 헨리가 시원스레 싱긋 웃었다.

“……혹은 대현자 이그레트 님. 어느 쪽이 편하신지?”

* * *

한편, 쥬다스를 제외한 일행은 모두 한 곳에 뭉쳐 있었다.

쥬다스가 초대장을 펼친 순간 갑작스레 장소가 바뀐 데다 정작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일행이 받은 충격은 제법 컸다.

그들은 잠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돈에 빠졌다.

“일단 흩어져서 움직입시다!”

바이칼은 흩어져 주군을 찾자고 주장했고,

“기각한다. 상대가 어떤 자인 줄 알고 경솔하게 움직이자는 거지? 지금 함부로 흩어지면 끝장이다.”

에단은 수하의 주장을 기각한 채 뭉쳐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제이.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위치정보 다운로드가 불가능한 장소입니다. 다운로드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 근처에 뭐가 있는 지도 몰라?”

「경로 탐색이 불가능한 장소입니다. 탐색 권한이 없습니다.」

“아, 그놈의 권한, 권한! 뭔 놈의 권한이 자꾸 없대!”

리키는 제이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그녀의 주먹을 걱정스레 쳐다본 세이지가 조심조심 말을 걸었다.

“형님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오히려 우릴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어…… 음, 확신이라기보단 그냥 믿는 거죠. 형님이시니까.”

세이지의 눈에서 단순하지만 강한 신뢰를 엿본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그분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야. 당연히 믿고 있어. 하지만.’

한때는 그녀도 세이지처럼 맹목적으로 쥬다스를 믿었다. 그분이라면 괜찮아, 그분이 잘못될 리 없어, 그분은 늘 올바른 선택을 해왔으니까 이번에도 역시. 그런 단순한 신뢰였다.

하지만 학원 루바흐 시절 검을 바친 후로부터 해가 지나고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믿음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도 사람이야. 다칠 수 있고, 다치면 아파할 수 있는.’

크리스티나는 그가 이번 여행에서 어떤 역할이든 완벽한 연기를 해낼 때마다 더욱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싫어.”

“네?”

늘 철벽처럼 냉철하던 그녀의 표정이 열아홉 소녀처럼 여문 감정을 내보였다. 크리스티나는 홱 고개를 내저었다.

“싫습니다. 이제 저는 그런.”

“크리스티나.”

“그분께서 괜찮은 척 연기하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바닷빛 눈망울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이지는 이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이의 금안이 제 형이 짓곤 하던 부드러운 빛을 띠자 크리스티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더 이상 무력하게 걱정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혼란에 빠져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3황자에게로 향했다. 소년은 그들을 둘러보며 단호히 제안했다.

“그러니까 다 같이 형님을 찾으러 가요.”

거기에 토를 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흐트러졌던 대열이 정돈되는 걸 본 리키가 제이를 손등에 얹고 중얼거렸다.

“헤에. 그 사람, 저들의 신뢰를 몽땅 받고 있는 건가. 대단하네.”

혼란을 진정시킨 건 세이지였지만 어린 리키의 눈에도 그들이 누굴 의지하고 있는지 정도는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좋은 하루 보내셨나요? ㅎㅎ

저는 모처럼 낮잠을 잤다가 장편 스릴러 판타지(?) 같은 걸 꿈으로 꾸는 바람에.... 고통받고 일어났습니다. ㅠㅠ 어흑.

아직도 뭔가 그 꿈이 잊혀지지가 않네요. 가끔가다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꿈들이 있는데 이건 소재로 쓰라는 계시인가[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쿨럭.

그럼 이번 주도 즐거운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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