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03화 (20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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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내심 감탄하던 리키는 힐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두색 하늘…….”

날씨를 조종하던 미드가르드에서조차 본 적 없는 기이한 색상의 하늘이었다.

게다가 그 위로 파스텔처럼 번지는 파란 노을이 더욱 꿈결 같은 신비감을 조성했다.

갈대들도 평범한 갈색이 아니라 은빛으로 반짝였다. 상황은 상황이었지만 풍경만큼은 마치 천상에라도 온 양 아름다웠다.

“이쪽에 길이 있습니다! 좀 수상쩍긴 해도 갈대밭으로 들어갈 순 없으니 일단 길을 따라 가볼까요?”

바이칼이 갈대밭 사이에 놓인 오솔길을 하나 발견해 냈다. 지푸라기와 함께 큼직한 자갈이 깔린 아기자기한 오솔길이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들은 오솔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은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키만큼 자라난 갈대밭은 줄곧 시야를 방해했고, 때문에 그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작은 오솔길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미리 내다보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자 길목 한가운데를 가득 메우고 있는 노란 비둘기 떼가 보였다.

그 사이에 쭈그려 앉아 모이를 뿌리고 있던 사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어라,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푸드덕!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비둘기들이 살짝 날갯짓을 하다 다시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본 플루비가 바이칼의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려 비둘기 떼 사이에 끼어들었다.

“구구구구.”

“꾸구구?”

“구구구구구구.”

자연스럽게 비둘기 언어를 따라하기 시작한 플루비를 보고 바이칼이 이마를 짚었다.

‘오 쉣. 쟨 진짜 자기가 비둘긴 줄 아나 봐.’

블루 와이번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었을까 심히 걱정이 되었지만 그 마음도 모르고 플루비는 꼬리를 살랑이며 모이를 쪼아댔다.

기꺼이 모이를 더 뿌려준 사내가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이렇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오순도순 손에 손잡고 나타나시다니. 사이가 정말 좋나 봅니다.”

그들이 정말 손을 잡고 나타난 건 아니었지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함께 이동한 건 사실이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자 사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기껏 초대를 받아서 왔으면 좀 반응을 보여주시지. 혼자 떠드니까 심심하잖아요.”

“……당신이 시솝입니까?”

에단이 대표로 그의 정체를 물었다. 굳이 숨길 생각도 없었던 사내는 손가락으로 O 모양을 만들며 씩 웃었다.

“딩동댕~! 미드가르드의 시솝, 오딘 슬레이프입니다.”

방정맞기까지 한 어조였지만 그 내용은 하나도 가볍지 않았다. 모두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졌다.

가장 시솝과의 만남을 기대했던 리키가 다급히 그 사실을 재확인했다.

“시솝이라고? 정말?”

“정말이죠. 여러분을 이곳 라그나로크까지 데려다놓고 거짓말 치겠어요?”

그에게선 시솝의 위엄이라곤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300년을 넘게 집권했다던 정보대로 늙어보이지도 않았다.

오딘 슬레이프는 기껏해야 30살이나 막 되었을까 싶은 젊은 청년의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잔디밭처럼 짧게 친 머리도 평범한 금발이었다.

에단이 그를 향해 다시 날카롭게 물었다.

“주군은 어디 계신 겁니까?”

“아, 당신들 주인은 지금 따로 만나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따로 만나다니, 누굴?”

“음? 그야 당연히.”

그다음 이어지는 말은 모인 이들 중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시솝이죠.”

“당신이 시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만나고 있는 건 ‘오딘 헨리’. 내가 사용하는 메인 모델입니다. 따지자면 지금 당신들을 만나고 있는 ‘오딘 슬레이프’는 서브 모델이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음,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슬레이프는 잠시 말을 끊고 들고 있던 모이봉투를 뒤적거렸다.

“나 ‘오딘’은 사용하는 육체가 여러 개라는 뜻이죠.”

그는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한 줌 가득 뿌려주며 히죽 웃었다.

퍼득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비둘기의 노란 깃털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육체가 여러 개라니?”

“에, 호기심이 많은 손님들이네요. 여러분이 이해하실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입니다. 나는 하나의 정신으로 여러 개의 육체를 사용하고 있죠.”

“……!”

그 대답에 따라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영생을 목적으로 온 리키는 안색을 환하게 밝혔으며 나머지 일행은 경악과 불신이 뒤섞인 눈으로 굳어버렸다.

‘그건 마치.’

설명대로라면 시솝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신에 가까웠다. 인간이 하나의 정신으로 여러 개의 몸을 움직이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령에게 영혼을 판 사령술사들도 새 몸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은 어렵게나마 가능했지만 동시에 여러 육체를 제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육신에 구애받지 않는 삶, 그걸 손에 넣은 순간부터 시솝은 인외 존재가 되었다.

“참, 어때요? 이곳 라그나로크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여긴……. 꼭 ‘박스’ 같군요. 혹 가상공간입니까?”

“오우, 눈치가 빠르네요! 라그나로크를 만들 때 루바르잔 제국에서 사용하는 박스기술을 조금 응용해 봤어요. 프로그램을 입력하기에 정말 편리하더라고요. 이 원리를 개발한 루바르잔 마법사들은 정말 천재에요.”

시솝은 진심으로 루바르잔의 마법사들을 칭찬했다.

“하지만 땡! 이곳은 가상공간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박스는 정신체로 움직이는 가짜공간이지만, 라그나로크는 엄연히 육체를 가지고 움직이는 ‘진짜’다. 시솝은 그 사실을 강조했다.

“여기선 죽으면 진짜 죽어요.”

태평하게 죽음을 언급하는 시솝의 어투에 세이지는 살짝 소름이 끼쳤다.

‘300년. 그 긴 세월 동안 여러 개의 육체를 가지고 끝없이 생명을 연장시켜 온 저자는 지금 무엇을 바라는 걸까.’

도전자가 나타났단 소문을 들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웃었나? 아니면 지금처럼 태평했을까?

세이지는 도저히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떤 답을 떠올려도 등골을 타고 흐른 소름이 가라앉지 않았다.

“형님을 어쩔 셈입니까?”

“응?”

“데려다가 뭘 하려는 거죠? 설마 해칠 셈이라면!”

“어허이. 걱정도 팔자시군요. 자자, 진정하세요.”

세이지가 불신하는 기색을 보이자 시솝은 모이 봉투에서 손을 빼고 툭툭 털었다.

“확실히 말하죠. 저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여기 있는 누구도 죽이지 않아요.”

“그럼 왜 우릴 이곳에 초대한 겁니까?”

“어, 뭐 이것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사실 당신들은 그냥 그를 데려오기 위한 곁다리였어요. 오징어 몸통을 먹고 싶어서 샀더니 딸려온 다리들이랄까? 내가 관심이 생긴 건 당신들의 주인뿐입니다.”

묘하게 현실적인 비유에 듣는 이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져갔다.

“그래서 방해받기 싫어서 그를 따로 만나고 있는 중인 거고요. 그러니까 괜한 걱정은 마세요. 스트레스는 심장에 좋지 않습니다.”

그 말에 에단과 바이칼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적어도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다. 그들이 보기에 시솝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럼 그분께 왜 관심이 생긴 거죠?”

“그거야말로 간단합니다.”

오딘 슬레이프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그들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모이를 주워 먹던 비둘기들은 날지 않고 푸득푸득 그를 피해 뛰어다녔다.

“그가 있어야 세상은 좀 더 완벽해질 수 있기 때문이죠.”

“……?”

듣는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연의 사랑을 받는 자.’

라그나로크를 창조해 내며 자신이 기계 그 자체가 되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정보를 모조리 흡수해 낸 시솝은 결국 치열한 계산 끝에 쥬다스의 정체를 도출해 냈다.

계약한 정령이 아니라면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영혼의 이름을 기계가 읽어낸 것이다.

도전자의 정체를 알아내자마자 시솝은 결단했다.

‘그를 라그나로크에 초대하자.’

처음부터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세상은 기계만으로 완벽해질 수가 없었다.

그 한계에 부딪혀 가고 있던 미드가르드엔 쥬다스가 가진 거대한 힘이 꼭 필요했다.

“시솝.”

일행에게 다가온 오딘의 앞에 리키가 나섰다.

“내 아버지 로키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로키…….”

시솝의 표정에 처음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리키가 그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가늠하기도 전에 오딘 슬레이프는 다시금 히죽 웃었다.

“물론 기억합니다. 로키 파르바우티, 정보관리 스탭. 당신이 그의 아들이군요?”

“네! 저는 리키. 리키 파르바우티입니다.”

“그렇습니까, 리키. 당신 아버지에겐 신형 내비게이션 개발을 맡겨두었었죠. 하하. 로키는 정말 보기 드물게 훌륭한 개발자였어요.”

아버지에 대한 칭찬이 나오자 아이의 얼굴에 기쁜 빛이 감돌았다. 오딘은 웃는 얼굴 그대로 차갑게 말문을 맺었다.

“금방 죽어버렸지만.”

파리 목숨 거론하듯 무감정한 어투였다.

리키는 울컥하여 소리쳤다.

“아버진 시솝이 맡긴 일을 하다 살해당하셨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골드 등급도 아니고 스탭씩이나 되는 사람이 꼴사납게 살해당할 줄이야. 실망이 꽤 컸습니다만.”

“그런!”

“어차피 죽은 사람을 살리는 법은 없으니까요. 아쉽게 됐죠.”

여러모로 충격적인 말의 연속이었다. 시솝조차 죽은 자를 살리는 방법이 없다고 단정지어 버리자 리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핑 도는 느낌이었지만 리키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알고 있어.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만들려는 거잖아.’

심지어 사령에 관해서도 조사해 봤지만 영혼을 잡아먹는 그 악독한 사령술조차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을 대상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포기해 버렸다.

일단 다른 방법도 찾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영생이 필요했다.

“시솝처럼 영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응? 영생 말입니까?”

시솝은 푸핫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하긴, 그런 건 없어요.”

“네에? 하지만 시솝께선!”

“내가 영생을 사는 것처럼 보이나요?”

오딘 슬레이프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천만에! 나는.’

속을 긁는 절규와 달리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건 그저 무덤덤한 음성뿐이었다.

“살아가는 게 아닌 기계가 됐을 뿐인데.”

“그럼 저도 기계로 만들어주세요!”

그 의미의 무게를 알지 못한 아이의 소원은 징그러울 정도로 순수했다. 시솝은 순간 경멸 어린 눈빛을 보냈다가 이내 싱긋 웃었다.

“어렵진 않습니다만.”

“정말……!”

“대신 당신이 가진 내비게이션을 내게 넘겨주세요.”

시솝이 내민 손바닥을 눈앞에 둔 리키가 입을 합 다물었다.

“모델 J0527. 로키가 만든 나의 신형 내비게이션 말입니다.”

“그건 왜……?”

“본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제품입니다. 그 내비게이션은 대단히 위험한 기능을 탑재하고 있어요.”

모든 걸 꿰뚫어보는 눈이 리키를 내려다보았다.

“‘바이러스’라는.”

시솝은 정확히 제이를 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리키는 라그나로크에 들어오기 전 쥬다스가 했던 질문을 기억해 냈다.

‘너는 원하는 걸 얻는 대신에 시솝에게 그 바이러스를 넘길 생각이 있느냐?’

그 질문에 리키는 단호히 줄 수 없다고 답했다.

‘바이러스라서가 아니야. 제이는 이제 하나뿐인 내 가족이란 말이야.’

‘영생을 살게 해주는 조건이라고 해도?’

그 질문에도 아이는 제이를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처음 리키가 일행에 합류했을 때 쥬다스와 나누었던 약속도 떠올랐다.

‘단,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겠느냐?’

‘응. 뭔데?’

‘어떤 경우에서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부드럽게 자신을 바라보던 금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리키는 입을 꾹 다물고 제이를 손등에서 꺼냈다.

“제이.”

「네,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연분홍색 빛무리를 뿌리며 자그마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게 약속할 수 있겠니?’

리키는 그 질문에 뭐라고 답했는지도 똑똑히 기억했다.

“설정 모드. 트랜스퍼(Tranfer:이적).”

그의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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