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04화 (20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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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트랜스퍼, 즉 기계형 정령이 소속을 옮기는 시스템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기계형 정령들은 정령 자신의 선택이 아닌 사람의 필요에 따라 주인을 바꿀 수 있다.

그 기능을 선택하는 건 이전 주인뿐이다.

주인이 트랜스퍼를 사용하지 않고 사망하거나 사라져 버린다면 그 정령은 영원히 주인을 잃고 버려지는 셈이다.

그렇게 버려진 정령은 대개 폐기처분된다.

「트랜스퍼 기능이 실행되었습니다. 이 기능은 주인님의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중대한 시스템입니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계속 진행.”

사무적으로 트랜스퍼 시스템을 작동시킨 제이는 잠시 렉이 걸린 기계처럼 멈칫 리키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연분홍빛 눈동자를 깜빡임과 동시에 다시 진행 절차를 밟아갔다.

「트랜스퍼할 대상을 지정해 주십시오.」

“대상은…….”

리키의 눈길이 앞에 서 있는 오딘 슬레이프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미드가르드의 시솝은 별다른 재촉 없이 리키를 기다렸다. 그는 사실 당장 바이러스를 손에 넣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원래는 몇 년 더 뒤에 천천히 찾을 생각이었다.

아예 리키가 제 아비처럼 살해를 당하든 아니면 수명을 다하든 간에 사망한 다음에 버려진 내비게이션을 취하는 방법도 나쁘진 않았다.

기왕 눈앞까지 찾아온 데다 영생을 살고 싶다고 소망하니 충동적으로 내건 거래였을 뿐이다.

그러나 리키가 오딘을 가리켜 지정하려던 순간 누군가 불쑥 중간에 끼어들었다.

“잠깐!”

다름 아닌 바이칼이었다. 바이칼을 비롯한 쥬다스의 측근들은 시솝과 리키 사이에 벌어지는 거래 장면을 찜찜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남의 일인데 끼어서 말려야 하나 그냥 알아서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나 섣불리 판단이 서질 않던 참에 결국 참다 참다 바이칼이 나선 것이다.

「타인의 개입으로 트랜스퍼 시스템이 잠금 상태가 되었습니다. 5분 뒤 다시 시도해 주세요.」

“아니, 아으! 이게 무슨 짓이야?”

주인이 바뀌는 트랜스퍼 시스템은 기계형 정령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보안이 철저했다.

잠금 상태가 되어 5분간 정령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리키가 갑자기 끼어든 바이칼을 향해 짜증스런 시선을 던졌다.

“잠금이란 기능도 있었어? 그건 몰랐네. 미안.”

“지금 사람 놀려? 댁 때문에 시솝께서 기다리시게 됐잖아!”

“아, 그렇지.”

바이칼은 시솝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그만 결례를.”

“괜찮아요. 뭐 5분 정도야.”

급할 게 전혀 없는 오딘 슬레이프의 표정은 변함없이 태평했다. 오히려 이들의 대립을 흥미롭게 관찰 중이었다.

“이봐. 그때 주군께 드렸던 약속은 거짓말이었나?”

“생각이 바뀌었어. 어차피 바이러스를 넘기든 말든 너희들이랑 상관없잖아.”

“어. 바이러스고 나발이고 그런 건 난 모르겠고.”

바이칼은 리키의 덜미를 잡아 채 낮은 목소리로 질타했다.

“내가 열 받는 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야. 아니,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던 건가.”

“……그래서?”

리키는 그의 사나운 태도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덩달아 눈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약속 같은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사람은 다 변해. 약속도 결국 사람이 한 말인데 영원히 지켜진다고 믿는 쪽이 바보 아냐? 너희들도 지금은 그렇지만 좀 더 지나고 보면 분명히!”

“똥 싸고 있네.”

결국 바이칼의 입에선 귀족답지 않은 험한 언사가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네 똥을 치우는 게 왜 믿었던 사람 몫인데?”

“뭐?”

“그딴 식으로 말 같지도 않은 자기합리화하지 마.”

그는 끌어당겼던 리키의 덜미를 거칠게 팍 놔주었다.

“네가 병신이 됐다고 해서 남도 병신이리라 멋대로 생각하지 말라고.”

“……!”

쿠당탕!

아무리 기사단 내에서 체력적으로 허약하다 놀림받는 마법기사라지만 열아홉 살의 손아귀 힘은 고작 열세 살 소년에게 비하면 꽃가지를 꺾는 태풍처럼 강했다.

밀쳐 넘어진 리키는 이를 악 물었다.

‘왜 나만.’

세상엔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더 많은데 어째서 자신만 비난받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곧 억울함으로 이어졌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제이가 그의 코앞으로 팔랑 날아들었다.

리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정령과 눈을 마주했다.

잠금이 풀린 제이는 주인의 안위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제이.”

「네.」

키리는 연한 분홍색으로 빛나는 제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트랜스퍼 진행해. 대상은 시솝 오딘.”

차가운 명령어가 떨어졌다.

슬레이프라느니 헨리라는 모델명은 붙일 필요도 없었다.

제이는 전방 탐색에서 간단히 ‘시솝’을 발견해 냈고 트랜스퍼 기능을 작동시켰다.

기껏 한 소리 해주었더니 무시하고 트랜스퍼를 진행해 버린 리키를 보며 바이칼이 입을 떡 벌렸다.

‘아오, 저 징하게 제멋대로인 자식!’

주군이 없는 상황에서 바이러스를 건네는 걸 말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딱히 막으라는 명령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떡하니 눈앞에서 약속을 어기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했다.

입을 틀어막아서라도 말렸어야 했나 살짝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프로그램을 실행시킨 제이는 연분홍색 빛무리를 흩뿌리며 시솝에게로 날아가 버렸다.

「리키 파르바우티 님께서 트랜스퍼를 신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합니다.”

시솝은 기꺼이 리키의 성의를 받아들였다. 그걸로 절차는 끝났다.

원주인은 이적을 신청했고 새 주인은 수락했으니 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곧 리키의 손등에 박혀 있던 내비게이션 구슬이 물에 설탕 녹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시솝의 손등 위로 그 구슬이 옮겨갔다.

「트랜스퍼가 완료되었습니다.」

제이의 사무적인 음성이 적막을 뚫고 울려 퍼졌다.

시솝은 손등에 제이를 얹고 흥미로운 눈으로 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당신 차례예요, 시솝.”

오딘 슬레이프는 다시 리키에게로 슥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실험을 좀 해볼까 하는데요.”

“실험이라니?”

“성능 실험 말입니다. 당신 아버지가 제대로 바이러스를 제작하긴 한 건지 궁금하잖아요.”

“그……!”

웃음기 실린 의심에 리키로서는 이도저도 반응하기 애매했다.

아버지가 악성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제작에 실패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건 그의 능력을 의심받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똥 씹은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이는 아이를 보며 시솝은 키득키득 웃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에단이 나직하게 물었다.

“만일 제대로 만들어진 바이러스를 실행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이쿠. 그런 것도 모르고 이 어린 친구를 도와줬습니까? 여러모로 재미있는 조합이네요.”

시솝은 제이를 손등에 얹은 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어주었다.

“바이러스는 병균이에요.”

그는 바이러스에 대해서 동화책을 읽듯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아주 지독한 병균이죠. 생물화학무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작고도 악랄한 병균은 호흡기를 통해 간단히 사람의 몸을 감염시킨답니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을?’

질문한 에단뿐 아니라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시솝이 노리는 목적이 점점 명확해질수록 불길한 마음이 커져갔다.

“사람의 몸은 원래 병균에 저항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죠? 면역력이라고 부르는 정밀하고도 안정적인 체계 말입니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들어간 순간 몸은 점차 착오를 일으킬 거예요.”

“착오를 일으킨다?”

“네에. 기계가 오류를 일으키듯이, 몸속의 모든 세포가 자기 자신을 ‘적’으로 인식해 버리는 겁니다.”

말문이 막힌 에단이 입을 다물자 시솝이 싱긋 눈을 접으며 물었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몸이 스스로를 적으로 인식하다니, 쉬이 상상할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일행을 뒤로 한 채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에단은 서서히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 대신 세이지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그 말은 몸이……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살이라도 한다는 뜻인가요?”

“딩동댕!”

짝짝!

시솝은 장난스럽게 손뼉을 쳤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곧 몸속에서 소리 없는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스스로 공격하는 거예요. 위장을, 혈관을, 심장을.”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모두 바이러스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를 넘겨준 리키의 표정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감염자는 자신이 왜 아픈지 이유도 모른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겠죠.”

슈욱!

그 순간 시솝의 손에서 제이가 사라졌다.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춰 버린 제이를 찾아 두리번거린 리키가 이내 하얗게 질린 채로 시솝에게 달려갔다.

“잠깐, 잠깐만요, 시솝! 제이를 어디로 보낸 겁니까?”

“오딘 헨리에게로 전송했습니다.”

“어? 헨리? 그건 지금 쥬다스 님과 만나고 있는…….”

바이칼이 무심코 중얼거리다 흠칫 멈추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던 불길함이 확신으로 변화하던 순간 검 손잡이를 잡고 있던 에단이 벼락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깡!

웃고 있던 시솝의 목에 에단의 검이 반쯤 꽂히다 말았다.

사람의 피부가 아닌 철덩어리에 검을 쑤셔 박은 듯 손아귀가 아려왔다.

만일 신체형 이능력자인 에단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휘두른 검이었다면 이미 칼이 부러지고 손목이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런, 벌써 잊으셨습니까? 저는 지금부터 바이러스의 성능을 실험해 볼 겁니다.”

칼이 꽂혀 갈라진 목 틈새에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솝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꽂힌 검을 천천히 뽑아냈다.

파직- 파지직!

반쯤 잘린 목에선 붉은 피 대신 시퍼런 스파크가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여러 부품으로 만들어진 모델일 뿐인 ‘오딘 슬레이프’는 목이 조금 잘렸다고 해서 작동을 멈추진 않았다.

“감히 그분께 무슨 짓을!”

“분명 아무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분개한 루바르잔 기사들과 리키의 다그침에도 시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목이 덜렁거려 자꾸만 꺾어지려는 머리를 손으로 붙들어 고정시킨 그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라? 이건 실험이지, 해치려는 목적이 아닌데요. 나는 그가 바이러스 따위에 당할 거란 생각은 절대 안 하거든요.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바이러스는 리키 당신이 제공했다고요.”

“그런…….”

“그가 버텨낸다면 바이러스의 백신을 얻는 셈이고. 혹시라도 버텨내지 못한다면 인간을 확실히 말살시킬 수 있는 좋은 무기를 손에 얻은 셈이 되겠네요.”

인류 최강의 존재. 모든 데이터를 통틀어 지금껏 ‘이그레트’보다 강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보다 더 좋은 표본은 세상에 없다.

‘그는 나와 비슷해.’

사실 시솝은 두 번의 삶을 살고 있는 ‘이그레트’에게 동질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삶은 한 번뿐이다. 그 절대적인 규칙을 깨부순 것도 모자라 자연에게 사랑받는 유일한 존재.

300년 이상을 시솝으로 군림해 온 오딘은 이미 인간을 뛰어넘는 특별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그레트’는 특별했다.

“앞으로는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세상이 펼쳐질 겁니다.”

미드가르드의 시솝이 바라는 건.

“평화를 위해서.”

금속처럼 차가운 이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헉 이번 챕터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네요. 중간에 한 번 챕터를 잘라야하나[email protected]ㅅ@....

오늘 하루도 즐거우셨나요? 날씨가 더워져서 그런가 낮잠이 늘어서 죽겠습니다. 커피가지곤 잠이 깨지 않아요. ㅠㅠ 어디 잠깨는 특효약 없을까요? (...)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함께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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