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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한편, 쥬다스는 자신의 전생까지 꿰뚫어 본 오딘 헨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사실 쥬다스는 그의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정령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그레트’라 불려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의 전생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는 시솝의 기계 시스템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정밀한 것이리라 추측했다.
시솝이 가진 정보가 어느 정도인진 몰라도 평범한 인간들의 상식은 뛰어넘은 모양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힐끗 돌아보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실체화한 정령들이 흉흉한 기세로 그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자연계 정령뿐 아니라 최근 계약한 동물계 정령 가야도 함께였다.
라그나로크, 시솝이 직접 만들어낸 인공 공간인 만큼 이 안에서 정령들의 힘은 상당히 제약을 받고 있었다. 녹아들 자연이 없으며 살아 있는 생명이라곤 외부인들이 전부다. 자연계를 지배하는 정령왕이라 해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호칭은 ‘쥬다스’로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쥬다스 님. 그럼 이제.”
헨리는 낮은 돌기둥에 기대다시피 앉았다. 천장 없이 뻥 뚫린 하늘에서 녹색 햇살이 은은하게 내려와 그들을 비추었다.
그 빛은 신비로워 마치 신들이 사는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싸우러 온 목적이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절 찾으셨는지?”
목적을 묻는 질문에 쥬다스는 차분히 대답했다.
“당신은 왕이 아닙니다.”
“그렇죠. 나는 ‘시솝’일 뿐이에요.”
시솝이란 운영자, 즉 미드가르드 내 최고 권한을 가진 1인자를 의미한다.
그는 군주가 아니니 나라를 다스릴 의무가 없고 대의가 없으며 물을 책임이 없다. 단지 운영자로서 원하는 대로 관리 체재를 운영할 뿐이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편리를 제공하는 게 나의 역할이죠.”
“당신이 추구하는 자유는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러나 시솝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나라에서 ‘추방’해 버리면 된다.
원하는 대로 사람들에게 등급을 매기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또 다른 독재였다.
그 사실을 집어 묻는 쥬다스의 질문에 오딘 헨리는 싱긋 웃었다.
“그거야 사람마다 다르겠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는 것이 자유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자유를 누리려면 다른 누군가는 억압당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물건으로 만들어버린 결과물, ‘노예’처럼.”
“아! 그 얘기 들었습니다. 시장을 아예 철폐해 버리셨다고요.”
“예.”
쥬다스는 물끄러미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웃고 있으나 그 안에 깃든 차가움은 분노보다 매서웠다.
“탓하지 않으십니까?”
“응? 제가 쥬다스 님을 탓해야 합니까? 왜요?”
“나는 당신이 추구한 자유를 부숴 버렸습니다.”
“아하.”
헨리는 입가를 짚으며 키득거렸다.
“쥬다스 님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설령 이 자리에서 저를 부순다고 해도 탓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요.”
“왜입니까?”
“강하니까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즉답이 튀어나왔다.
오딘 헨리는 솔직한 성격이었다. 애초에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야망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말마따나 그는 1인자였고, 강했기 때문이었다.
시솝은 그 가치관을 그대로 쥬다스에게도 적용시켰다.
“시솝.”
쥬다스는 명료하게 이를 정리했다.
“당신이 추구하는 자유란 결국 강자를 위한 자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맞습니다.”
가볍게 인정한 헨리가 이어서 덧붙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를 나눠 갖죠. 자원도, 영토도, 사랑도. 인구가 많을수록 자유를 더 많이 나눌 수밖에 없어요.”
온전히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누구나 자유를 꿈꾼다. 누군가는 죽은 부모를 다시 만나는 게 꿈일 수 있고, 누군가는 배를 곯지 않고 따뜻한 집에서 사는 게 꿈일 수도 있다.
혹은 일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술을 마시며 노는 걸 자유라 칭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당신의 나라.”
헨리는 손가락으로 쥬다스를 찌르듯 가리켰다.
“루바르잔 제국, 거기서도 마찬가집니다. 귀족층이 많은 걸 누리는 바람에 빈민이 생기잖아요. 어떤 형태로든 강자가 하나를 가지면 약자가 하나를 빼앗겨야 하는 구조인 겁니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전혀 다릅니다.”
그 논리에 쥬다스는 전면으로 부정했다. 헨리가 흥미롭게 바라보자 그는 덤덤한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루바르잔에는 분명 귀족과 평민의 격차가 존재하나 이는 신분에 따른 차이입니다. 여기에는 지켜야 할 질서와 인간에 대한 존중이 분명히 들어가 있습니다. 제국의 지배층은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짓밟는 것이 아닌, 모든 제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오, 바로 그겁니다. 제가 거슬리는 부분이요.”
“……?”
“우리가 왜 나눠야 하죠?”
갑자기 끼어든 말에 그가 멈칫 입을 다물자 시솝 오딘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쓸데없이 모든 사람을 존중하느라 자원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 요는, 효율적인 삶을 위해선 인구를 줄이면 된다.”
지금 시솝은 쥬다스가 그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결과지를 말하고 있었다.
쥬다스는 작게 탄식을 삼켰다.
“간단하지 않습니까? 머릿수를 줄이면 당연히 나눌 필요도 없어지겠죠.”
“소수를 위해 다수를 죽이겠다는 겁니까?”
“물론이죠. 인간은 강하고 우수한 인자만 남기면 됩니다.”
오딘 헨리는 그리 말하며 자연에게 가호 받는 유일한 인간에게 눈짓했다.
“당신처럼요.”
“……아무래도.”
후웅!
날선 녹색 바람이 쥬다스의 손끝에 모여들었다. 숨기는 건 어려울지 몰라도 정령왕의 힘을 사용하는 데엔 자연물 따위는 필요 없었다.
순결하고 맑은 바람이 순식간에 새의 날개깃처럼 그 주변을 감싸 안았다.
“시솝과 나는 결코 합일될 수 없는 이념을 가진 모양입니다.”
“그래요? 저는 오히려 지금 우리가 닮아 있다는 걸 더 확신하게 되었는데요.”
적대감을 드러낸 정령왕의 계약자를 보면서도 시솝은 태연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이념을 위해 약자를 죽이려는 저와.”
그는 기대고 있던 돌기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쥬다스의 힘에 대응하기라도 하듯 분홍색 기류가 그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념을 위해 저를 막으려는 쥬다스 님.”
자석의 N극과 N극이 만나면 서로 격렬하게 밀어내듯, 동류끼리 융합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헨리는 자신이 쥬다스와 그런 관계라 생각했다.
「트랜스퍼가 완료되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주인님?」
그의 손등 위에 나타난 연분홍빛 정령이 파라락 날아올랐다. 익숙한 정령임을 알아본 토니가 앗 하고 소리쳤다.
「제이다요!」
「……정말이네?」
제이라고 이름을 부르지 말라며 토니를 구박했던 유니마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눈을 깜빡였다.
리키의 정령이라고 알고 있던 제이가 느닷없이 시솝의 손에서 나타나자 정령들 사이에 당혹감이 번져갔다.
「우잉. 근데 제이가 왜 저기 있다요?」
「계약자가 바뀐 모양이에요.」
「뭐야. 언제 그럴 틈이 있었어?」
정령에게 있어 계약자란 영혼과 영혼이 묶이는 매우 특별한 존재다.
심지어 계약자가 스스로 파기를 원해 계약관계가 끊기는 경우라도 정령은 전 계약자에 대해 특별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곤 한다.
정령은 기계나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종족이었다. 그들에겐 감정이 있으며 계약자에 대해 품는 감정은 인간이 연인에게 느끼는 사랑보다 훨씬 깊고도 진했다. 연인과 헤어진 사람이 당장 새로운 이성과 인연을 맺기란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번 계약자를 잃은 정령이 새 계약자를 만나게 되는 건 이별에 대한 슬픔이 어느 정도 희석된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카니는 다홍빛 눈망울을 살짝 내리깔았다.
「슬퍼 보이네요. 저 아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같은 정령들끼리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제이는 자신의 전 계약자와 헤어진 걸 비통해하고 있었다. 다만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지 못할 뿐이다. 그녀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정령이었으니까.
‘리키.’
쥬다스도 역시 제이를 알아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어린아이는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악수를 두고 만 것이다. 이건 어리다고 해서 저지를 수 있는 실수 따위가 아니었다.
‘네 선택을 믿고자 하였거늘.’
세상에 처음부터 악인인 자는 없다. 누구나 자신의 선택으로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선행을 이루기도 한다.
쥬다스는 리키가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곧장 이를 파괴하거나 빼앗는 대신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할지 기다렸다. 마치 사야 황후와의 대립에서 세이지의 선택을 지켜봤을 때처럼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리키는 바이러스를 시솝에게 넘겼다.
어떤 선택이 옳고 그르다곤 함부로 판단할 순 없으나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리키가 선택한 건 자신의 소원을 위해 타인의 목숨 따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악행이었다.
“저는 이제 이 바이러스를 실행시킬 겁니다.”
제이를 손바닥에 얹은 채 시솝이 말했다.
“바이러스가 퍼지면 제 바람대로 수많은 인간이 죽어 나가겠죠.”
“그건 불가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시선.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쥬다스는 시솝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고요하면서도 섬뜩한 분노를 느낀 헨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핫,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냥 바로 밖에 가지고 나가서 실행시켜도 되지만 제가 굳이 여기서 이러는 이유는.”
오딘 헨리는 공손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 성능을 실험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인류 최강이라는 당신이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인지.”
“나로 실험을 해보겠다?”
“예. 바이러스의 성능이 너무 강하면 다운드레이드가 필요할 테니까요. 인간을 전부 몰살시킬 순 없잖아요.”
시솝은 지극히 기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인간을 그저 닭 우리에서 배양하는 달걀처럼 말하는 그를 보며 쥬다스가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어때요? 물론 강요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실험에 참가하는 게 싫으시다면 차라리 당신과 일행분들을 포함한 우수한 인간 그룹을 이 라그나로크 안에 안전하게 모셔 놓고 바이러스를 살포해 버려도 돼요. 실험 따위 꼭 하지 않아도…….”
“오딘 헨리.”
헨리는 움찔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어투였다.
“내게 실험을 하는 데에 동의하마.”
“…….”
“단, 그 실험이 끝나기 전 너는.”
우우우!
푸른 늑대가 길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반짝이는 얼음알갱이들이 녹색 기류에 섞여 몰려들었다.
그 알갱이들은 유한 물줄기가 아닌 날카로운 얼음 창살로 결합하여 일제히 시솝을 뾰족한 끝을 겨누었다.
“내 손으로 파괴하겠다.”
‘이거이거, 무서운 기세로군. 싸우러 온 게 아니라더니.’
오딘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씩 웃었다.
거래 성립이다.
“J0527. 바이러스 시스템, ‘궁니르’ 발동.”
「계약자의 명령에 의해 히든 시스템 ‘궁니르’를 발동합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제이의 몸에서 동글동글한 방울들이 훅 뿜어져 나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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