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06화 (20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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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융합

바이러스는 마치 피처럼 붉은 방울이었다. 그것은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순식간에 다량으로 증식해서 허공에 붕 떠올랐다.

쥬다스는 그것들의 움직임을 잠시 관찰했다.

‘……저게 바이러스인가.’

겉보기로는 단단한 쇠구슬 같기도 하고 핏방울 같기도 하였다.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떠다니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초파리 떼와 비슷하단 생각도 들었다.

그게 한낱 벌레 따위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 활동을 막아버리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란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쥬다스는 가만히 구경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일단 미리 생성해 둔 얼음조각들을 시솝을 향해 내리꽂았다.

그러나 오딘 헨리는 웃는 낯과는 달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특히 장소가 라그나로크, 오딘의 지배하에 있는 특수공간이었기 때문에 그의 간단한 의지만으로도 온갖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오딘은 순식간에 자신을 보호할 마력 배리어를 생성해 냈다. 창처럼 날카로운 얼음조각이 일제히 날아가 반투명한 배리어에 박혔다. 단 일격에 달걀 깨지듯 쩌저적 깨져 버린 배리어를 힐끗 쳐다본 오딘이 여유롭게 손을 들어올렸다.

“오, 놀랍네요. 다중속성 정령술사는 동시에 여러 가지 힘을 다룰 수 있습니까?”

파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오르는 불덩이가 그의 손 안에  잡혔다. 불이 아니라 대포알을 붙잡은 것처럼 손이 터져 버렸다.

하지만 시솝의 몸은 살아 있는 인체가 아니었다. 손이 산산조각 났지만 피가 흐르는 대신 시퍼런 스파크가 이리저리 튀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 반대쪽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곤 고장 난 팔을 통째로 뽑아버렸다. 그러자 곧장 새로운 팔이 생성되어 빈자리에 착 붙었다. 시솝에게 있어 새 팔을 연결하는 건 실밥이 터진 인형을 꿰매는 일보다 간단한 과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물과 불, 두 정령을 시솝에게 붙여둔 쥬다스는 바람을 이용해 바이러스 쪽에 접근한 상태였다. 오딘은 정령들의 공격을 설렁설렁 막으며 그 모습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원리는 호흡기.’

즉 공기를 차단하면 된다.

쥬다스가 바이러스를 막는 데에 바람의 정령인 유니를 선택한 이유였다.

바람은 바이러스들이 퍼지지 않도록 휘감아 한 군데로 뭉치게 했다. 그나마 방금 뽑아낸 바이러스들은 눈에 보이는 붉은 결정이라 처리가 수월한 편이었다.

문제는 끊임없이 바이러스를 살포하는 내비게이션 제이였다.

「이래서야 끝이 없겠는데?」

「우앙. 꼭 식물계 정령 라플레시아를 보는 것 같다요!」

붉은 바이러스 덩어리들을 포자처럼 허공에 뿜어내는 제이를 보며 토니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라플레시아란 말 그대로 꽃들의 여왕 격인 신수를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동물계 정령 가야처럼 식물계에도 정령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거대한 꽃을 피우는 라플레시아는 그 씨앗도 꽃잎만큼이나 붉다. 민들레 씨처럼 바람에 의해 날아가는 라플레시아 씨앗은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날아간 씨앗은 각 환경에 맞게 변화하여 식물이 더 이상 필요 없는 땅에선 말라죽고 필요한 땅에 도달하면 갖가지 식물로 자라나 숲을 이루고 망가진 자연을 회복시킨다.

「토니치곤 제법 괜찮은 비유네. 문제는 저 애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생물이 아니란 거지만.」

유니는 팔짱을 낀 채 어찌 해야 하나 싶은 얼굴로 제이를 노려보았다.

「저 앨 파괴해야 끝나려나…….」

하지만 저 가엾은 기계형 정령은 죄가 없질 않나. 나쁜 건 그녀를 병기로 만들어버린 인간이었다.

유니가 알기로 ‘이그레트’는 절대 그런 존재를 해치지 않았다. 자신이 손해를 입더라도 고스란히 당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곤 했다.

유니는 이번에도 그가 그런 선택을 내릴까 염려되어 최대한 빨리 적합한 해결책을 찾고자 머리를 싸맸다.

그러나 그건 지금의 그에겐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유니.”

「……어? 으응?」

고민에 빠져 응답이 반 박자 늦은 유니에게 쥬다스가 마음속으로 자신의 소망을 전달했다.

‘제이를 파괴하자.’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로 빠른 결단이었다. 조금 의외긴 했지만 그를 걱정하던 정령으로선 환영인 선택지다.

바람의 정령은 계약자의 마음이 돌아서기 전에 잽싸게 움직였다.

후웅!

곧 주변으로 몰려든 녹색 바람이 거대한 토네이도를 일으켰다.

불과 물의 합동공세에 벌써 몇 번이고 몸의 부품을 갈아치운 오딘이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고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어라, 이번엔 토네이도입니까? 역시 자연의 왕쯤 되면 아무리 계산해도 소용없군요. 애초에 정령왕은 데이터가 너무 없어서 예측하기도 힘들고요.”

“정령왕만?”

“―?!”

갑자기 시야에 불쑥 끼어든 검은 머리의 사내를 보고 시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동에서 건너온 신수 가야였다. 오딘보다 키가 훨씬 큰 가야는 몹시 귀찮다는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본 후 깔끔하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청룡인 가야의 주먹은 거의 대포알에 맞은 듯한 충격을 전해주었다.

“고작 300년 살아놓고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 애송아.”

슈우우!

맞은 부위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천 년  묵은 용의 진심 어린 충고에 시솝은 찌그러진 배를 멍하니 쳐다보다 잔기침을 내뱉으며 웃었다.

“아…… 켁켁. 동물계 정령님? 동물이라 그런가, 진짜 인정사정없네요.”

“웃기지 마.”

“농담 아닌데. 봐요, 저 지금 진짜 눈물까지 나요.”

오딘의 엄살에 가야가 눈살을 팍 찌푸렸다.

“그 정돈 너한테 별거 아닌 거 다 알아. 이 요망한 기계 괴물 같으니.”

“콜록! 좀 전엔 애송이라고 하셨으면서 이번엔 괴물이라뇨? 별명은 어울리는 걸로 한 가지만 정해주시죠.”

“싫어. 콱 무지개빛깔로 일곱 가지도 넘게 중구난방으로 지어버릴 테다.”

“우와, 정말 너무하네.”

그러는 사이에 거대한 토네이도는 신전의 돌기둥, 금간 벽, 하늘의 파란 구름 등 모든 걸 집어삼키며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가야의 근접공격으로 움직임을 멈춘 오딘 헨리를 뜨거운 불기둥이 화악 덮쳤다.

‘확실히 굉장하군.’

오딘은 슬슬 오작동을 일으키는 육체를 감지하며 속으로 경탄했다. 아무리 시솝의 공간이라 해도 더 이상 버티기는 무리였다.

게다가 이번 열기는 꽤나 지독했다. 지옥의 겁화처럼 살갗을 활활 태우는 불길 속에서 그는 잠시 고민했다.

‘새 모델을 꺼내야 하나. 새 계정 파기 귀찮은데……. 하지만 예측한 수치보다 쥬다스 님의 능력치가 너무 높아. 이대로는 바이러스 실험까지 견디지 못할지도…… 응?’

태연하게 상대의 무력을 재평가하고 있던 시솝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는 제이의 동력구슬이 달린 손등을 홱 들어 올렸다.

“……뭐야, 이건.”

처음으로 오딘의 입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곧 그에게서 가야조차도 움찔할 정도의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처음엔 분명 연한 분홍색이었던 제이의 구슬이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색깔로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이내 버그를 알리는 이상한 글자가 주르륵 구슬 위로 떠올랐다.

오딘은 마치 몸속에 생쥐가 한 마리 기어들어와 휘젓고 다니는 것만 같은 기이한 역겨움을 느끼고 머리를 감쌌다.

「사용자의 문서파일이 외부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사용자의 제어기능이 마비됩니다. 사용자의 운영체재에 침입한 프로그램이 발견되었습니다.」

오딘의 눈앞으로 제이가 아닌 시솝의 직속 내비게이션이 나타나 끊임없이 경고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현재 상황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이를 으득 갈았다.

‘해킹(Hacking)!’

설마하니 로키가 바이러스 안에 해킹 프로그램을 함께 설치해 뒀을 거란 짐작은 하지 못한 시솝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예측하려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수작이었다.

기계가 가장 취약한 허점이 바로 보안 시스템이었으니 평소 같았으면 제이를 리키로부터 트랜스퍼받기 전에 정밀 검사를 돌려봤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는 당장 이그레트라는 변수에 홀릴 대로 홀려 있던 상태였다.

“이 내가, 해킹을 당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 한들 시솝은 미드가르드의 1인자이자 기계와 한 몸이 된 절대자였다.

기계가 있는 곳에선 그는 어디든지 신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아무나 그의 시스템을 뚫고 휘저을 만한 해킹 프로그램을 개발하진 못했다.

오딘이 머리를 감싸 쥐고 씹어 뱉듯이 그 빌어먹을 해킹 프로그램 개발자의 이름을 읊조렸다.

“‘로키’……!”

오딘에겐 불행히도 로키는 천재였다. 바이러스를 만들란 지시를 받은 로키는 감히 시솝의 명에 거역하지 못하고 임무에 착수했으나, 그의 뜻에 온전히 따른 건 아니었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당신이 원하는 차가운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순 없어, 오딘.’

꼭 로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오딘은 헛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다리는 결국 바닥에 털썩 무릎 꿇고 말았다.

「쟤 갑자기 왜 저런다요?」

「몰라. 아무튼 기회인 것 같네. 토니!」

「엣, 알았다요!」

일단 할 일이 정해지자 두 정령은 언제 싸웠냐는 듯 호흡이 척척 맞았다.

유니는 토니가 만들어낸 알록달록한 조약돌을 바람으로 만두피처럼 휘감았다. 그러곤 정확히 시솝이 손등에 장착한 제이의 구슬을 노렸다.

쩌엉!

구슬이 깨지자 파랗게 변했던 색깔이 지지직 노이즈를 일으키며 빛을 잃어갔다.

「본체에 큰 손상을 입었습니다. 작동을 정지합…… 니…….」

본체를 잃은 제이는 말도 다 끝마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바람으로 한 곳에 뭉쳐둔 바이러스들은 카니의 뜨거운 불길이 집어삼켰다. 타오르다 못해 용암처럼 이글이글 끓다시피 하는 시뻘건 불길 속에서 바이러스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녹아 없어졌다.

매섭게 휘몰아쳐 신전을 무너뜨린 토네이도가 잦아들고, 그 사이로 쥬다스가 무릎 꿇은 시솝을 향해 걸어왔다.

“실험은 실패했다.”

“…….”

“중간에 갑자기 행동을 멈췄더구나. 충분히 다른 방도를 찾을 시간이 있었을 텐데도.”

오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깨어진 구슬과 검게 그을려 너덜너덜해진 피부를 가만히 바라본 쥬다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손바닥 안으로 몰려든 열기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꿈틀거렸다.

고개 숙이고 있던 오딘의 입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하하.”

“무엇이 그리도 우습더냐.”

“아니. 쥬다스 님, 당신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습니다. 지금 우스운 건…….”

오딘 헨리는 망연자실하여 중얼거렸다.

“이제 곧 그 망할 꼬맹이에게 지배당할 제 자신이죠.”

“……?”

순간 상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쥬다스가 화염을 손안에 감싸 쥔 채 멈칫했다.

“해킹입니다. 기계 운영체재를 파고들어 지배하는 방식이죠. 바보같이 그 꼬마의 아비 놈이 만들어낸 함정에 빠지고 말았네요.”

시솝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불에 반쯤 타 갈라진 얼굴 사이로 녹아내린 금속 부품이 보였다.

“내비게이션 J0527이 가짜 트랜스퍼를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제 권한을 가지고 리키라는 꼬마에게로 돌아갔겠네요.”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무리 시솝이라도 블루스크린이 뜨면 화가 나죠(...)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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