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09화 (20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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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운명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있던 리키는 그 흐느낌을 들으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하늘에 물고기들이 거꾸로 날아다녔다.

“……꿈?”

포옹!

마치 호수처럼 하늘에 파문이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난 로봇 주제에 무슨 꿈까지 꾸지?’

그렇게 자조하던 순간, 갑자기 바로 옆에서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 아니구마. 여긴 정령계구마.」

“히익!”

리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몸의 윤곽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일어났구마. 다른 친구들은 아직이구마.」

“친구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주변에 쓰러져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바닥은 발목까지 차오른 얕은 물이 찰랑이고 있었는데 크리스털처럼 파랗게 빛나고 있어 눈이 부셨다.

그리고 그 물에 살짝 잠기다시피 누워 있는 세 사람은 리키도 익히 알고 있던 이들이었다.

“시솝의 도전자들.”

에단, 바이칼, 크리스티나였다. 리키는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우린……. 그러니까, 라그나로크가 무너져서.”

「공간이 붕괴됐더구마? 쯧쯧, 왕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다들 그대로 영원히 소멸해 버렸을 거구마.」

“왕이라니?”

「자연계 정령왕 네 분 말이구마.」

몸체가 반투명한 남자가 이상한 말투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정령왕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죽지 않고 여기 있는 거라고? 여기가 어딘데?”

「정령계구마.」

“정령계? 당신도 그럼 정령이야?”

「그렇구마. 내 이름은 라그리마라고 하구마.」

‘유령인 줄 알았는데.’

라그리마라는 정령은 무릎 아래로는 흐릿하게 형체도 없는데다가 동공 없이 눈알 전체가 통째로 파랗게 채워진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몸은 비쳐 그 너머가 보이고 발이 없으니 이동할 땐 허공을 둥둥 떠다닌다.

그야말로 기괴하게 생겨 유령이라고 오해받기 딱 좋은 생김새였다.

다행히 유령에 대한 공포심이 없는 리키는 충격을 받지 않았다.

“저기, 라그리마.”

「왜 부르구마?」

“혹시 그. 한 명 더 있지 않았어? 은색 머리카락에…….”

말을 하려고 보니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느끼기엔 어른이라고 느꼈는데 외형을 떠올려보니  그와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은 소년이었다.

“이름이 ‘쥬다스’ 님이라고 불렸던 것 같아.”

「쥬다스? 그를 찾는 거구마. 그야 물론 당연히 같이 정령계에 도착했구마.」

“정말? 어디? 지금 어디에 있어?”

「…….」

라그리마는 답하지 않고 몇 번 코를 훌쩍였다.

“으으. 젠장, 머리야.”

리키가 다급한 심정으로 대답을 재촉하려던 찰나, 바닥에 엎어져 있던 바이칼이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그를 기점으로 에단과 크리스티나도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함께 공간을 옮겨온 만큼 정신이 드는 기점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리키는 어물어물 그들의 곁에 다가갔다.

“다들 괜찮아?”

“어 씨, 뭐야. 꿈에서도 왜 네놈 면상이 나오냐.”

“삐이이.”

리키를 발견하고 왈칵 표정을 구긴 바이칼의 품에서 어린 와이번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얼씨구, 플루비도 있네. 겁나 웃기는 꿈…….”

“꿈이 아니야.”

“땅과 하늘이 온통 물바다인데 꿈이 아니긴. 하여튼 저 자식은 꿈에서도 재수대가리가 없어.”

적대감 가득한 눈빛을 받은 리키가 담담히 이를 받아들이며 대꾸했다.

“재수대가리 없어서 미안한데, 진짜야. 라그나로크가 무너져서 같이 정령계로 넘어온 거래.”

“누가 그러는데?”

“라그리마란 정령이.”

“라그리마?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충대충 건성으로 대답하던 바이칼의 시선이 문득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푸른빛의 정령과 마주쳤다.

“으아아악!”

「너무하구마. 그렇게 놀랄 건 없구마…….」

그들이 반가워해 줄 줄 알았던 라그리마는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선 바이칼 대신 에단이 라그리마를 날카롭게 훑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리키의 말이 사실인 것 같군. 여긴 꿈이 아니다.”

“눈물의 정령 라그리마. 그대가 있는 걸 보니 여긴 정말 정령계인가?”

크리스티나도 놀라지 않고 상황을 물었다.

혼자 놀라 깨갱했던 바이칼이 플루비를 방패처럼 얼굴 앞에 들어 올리며 덜덜 떨었다.

“여, 여어. 오랜만.”

「오랜만이구마. 여긴 정령계가 맞구마. 정확히는.」

라그리마는 호수처럼 파문을 일으키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물의 영역이구마.」

물로 이루어진 하늘은 지상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지상이라고 해봐야 끝없이 펼쳐진 물뿐이었고 지금 서 있는 그들의 머리통만 비쳐질 뿐이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중요치 않아.”

크리스티나가 다급히 라그리마에게 다가섰다.

“쥬다스 님은 어디에 계신 거지?”

울고 있는 정령은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줄줄 흐르는 눈물이 바닥에서 찰랑이는 물 위로 토독 서너 방울 떨어졌을 무렵, 그는 살짝 소리를 죽여 속삭이듯이 답했다.

「그는 자연계 정령왕들의 곁에 있구마. 지금은 가까이 갈 수 없구마.」

“가까이 갈 수 없다니?”

「왕들께선 지금 몹시 예민하시구마. 다가가면 같은 정령끼리라도 큰일 나구마.」

‘왜 정령왕들이?’

그들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직면한 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투성이였다.

이곳이 정령계란 사실도 믿어지지 않았고 왜 쥬다스를 정령왕들이 손수 데려갔는지도 도무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사…… 하신 건가?”

에단은 지금 상황을 머리로 이해하기 전 주군의 안위부터 물었다.

분명 라그나로크가 무너지기 직전, 그들은 쥬다스가 쓰러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손을 적시던 핏물을 떠올린 크리스티나가 흠칫 몸을 떨며 손을 펼쳐보았다.

지금은 물에 씻겨내려 간 건지 손은 피 한 방울 없이 깨끗했다.

「모르겠구마.」

라그리마는 그리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가 무사하다면 왕들께서 저리 불안해하실 이유가 없겠구마.」

“그게 무슨 뜻이지?”

「절대 좋은 상태일 리가 없다는 거구마.」

팍!

크리스티나가 라그리마의 어깨를 붙들었다. 반투명한 형체라도 그녀의 손에 잡혔다.

“그분을 직접 만나야겠어. 어디로 데려간 건지 말해.”

「내가 데려간 게 아니구마. 왕들께서…….」

“빌어먹을, 왕인지 뭔지 알 게 뭐냔 말이다!”

늘 냉철하고 차분하던 그녀의 욕설에 오히려 바이칼이 놀라 눈을 끔뻑였다.

크리스티나는 라그리마의 어깨를 붙든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탁해.”

「…….」

“어디 계신지만 알려줘.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까.”

고개 숙인 그녀를 보면서도 라그리마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걱정돼서 오긴 했지만. 이것 참 난감하구마.’

눈물의 정령은 루바흐 학원에서 만난 쥬다스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의 영혼은 맑고 아름다웠으며,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끌리는 마약 같은 빛이 있었다. 비단 라그리마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령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홀렸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정령왕들이 그를 독점하고 애지중지하는 심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황이 정말 좋지 않구마.’

처음 쥬다스가 정령계에 도착했을 때 라그리마는 늘 흘리던 눈물도 뚝 그칠 정도로 놀랐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정령인 라그리마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생명 활동은 심장에서 비롯된다.

왕들이 데려온 쥬다스는 그 심장이 차갑게 정지해 있었다.

‘심장이 멈춘 인간은, 즉 죽은 자. 그걸 자연이 용납하지 않고 억지로 붙들고 있을 뿐이니.’

자연의 왕들은 인간을 정령계로 데려올 만큼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영혼이 몸에서 떠나지 않았으니 완전히 죽은 건 아니었지만, 심장이 정지한 시점에서 생명 활동도 함께 정지했다고 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빠진 계약자를 두고 정령왕들은 죽은 새끼를 품에 데려다 핥는 어미 짐승처럼 예민해져 있었다.

누가 근처에 다가오기라도 한다면 계약자를 해칠까 두려워 그 즉시 산산이 찢어 죽일 게 분명했다.

그랬다. 지금 정령왕들이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안내해 주긴 하겠구마. 하지만 잘 듣구마.」

눈물의 정령인 라그리마는 지금 세 사람이 느끼는 참담함을 누구보다 잘 공감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안색이 굳은 그들 대신 펑펑 울고 있는 라그리마는 결국 크리스티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정령왕이 분노하면 인간 따윈 단숨에 죽일 수 있구마. 왕들께서 너희들을 정령계에 데려온 이유는 그가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소망했기 때문이구마.」

쥬다스는 심장이 멎는 고통에서도 끝까지 친우들을 생각했다.

자신을 따라 무너지는 라그나로크에 다시 들어온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기를.

쥬다스를 가호하던 정령들은 그 소망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과 리키를 정령계로 함께 데려오긴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정령왕들이 그들의 남은 안위까지 챙겨줄 이유는 없었다.

「알겠구마? 절대 왕들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되구마. 너희가 괜히 고집부리다 여기서 헛되이 죽으면 그가 얼마나 슬프겠구마.」

“…….”

세 사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었다. 쥬다스가 걱정된다고 해서 무턱대고 정령왕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된다.

「그럼 따라오구마.」

“나, 나도 같이 가.”

리키가 따라붙자 바이칼이 흡사 악귀처럼 눈을 부라렸다.

“네가 왜? 가서 뭐 하려고?”

“어차피 여긴 정령계라잖아. 혼자 남아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그리고 나도.”

“너도 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애초에 돌아보지도 않고 라그리마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나마 싸늘한 시선이라도 말을 들어주는 바이칼에게 리키는 속으로 감사하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한테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사과는 개뿔이. 누가 그런 사과 받고 싶다고 했냐? 네 마음 편해지려고 하는 사과면 집어치워.”

바이칼은 진솔한 성격인 만큼 비난할 때도 신랄했다.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

“뭐가 아니야. 보나마나 네 녀석은 또 애처럼 징징징…….”

“끝까지!”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치는 리키를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끝까지 손을 내밀어줬어. 내가 로봇인 걸 알고도, 내가 잘못한 걸 알면서도.”

버리지 않았다. 홀로 두고 떠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눈물겹게 고마워서 꼭 무사를 확인하고 인사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거야.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허어.”

“만일 그가 원한다면 평생 종노릇을 해서라도 진 빚은 갚을 거야.”

일종의 보답이었다. 리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종으로 받아주기나 한대? 하여튼 자식 뻔뻔하긴.”

툴툴거리면서도 바이칼의 눈은 더 이상 혐오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런 건 직접 주군께 여쭤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이칼도 입을 다물고 부지런히 에단과 크리스티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리키는 그들의 뒤꽁무니에 따라붙어 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게. 직접 만나서 물어보면 당신은 뭐라고 답할까?’

차라리 호되게 혼이라도 났으면 좋겠다. 그가 처음 아버지 로키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보통 아이들처럼 몽둥이로 볼기짝을 두드려 맞았던 게 떠올랐다. 그때만큼 눈물 쏙 빠지게 혼나도 좋으니까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세 사람과 인공지능 로봇, 그리고 한 정령은 다 함께 하늘과 땅이 전부 물로 뒤덮인 세계를 걸어갔다.

소중한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두번째 통수...! (?)

이렇게 저는 주인공을 두 번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주인공은 자고로 굴려야 제맛이죠. ...쿨럭.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ㅎ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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