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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레트-210화 (21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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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운명

정령들이 사는 세상은 육신을 가진 자들의 세상과 차원적으로 다르다.

일단 먹고 먹히는 생태계와 다르게 정령계에선 먹이 개념이 없다. 먹을 필요가 없으니 동식물은 자라지 않으며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곰팡이조차 슬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마냥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살아 있는 생물 대신 온갖 종류의 정령들이 돌아다니며 자연의 생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정령계에서는 공간과 거리에 대한 개념도 인간의 기준과 달랐다.

물의 기운이 가득한 물의 영역과 불의 기운으로 매워진 불의 영역은 국경선 긋듯 나누어진 게 아니라 그저 자연물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끝없이 흐르는 강물인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야트막한 둔덕이 나타나 땅의 축복을 머금은 꽃을 피운다.

그 사이로 날아다니는 불의 나비와 바람의 새들은 춤추듯 어우러져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정령계, 모든 자연이 조화롭게 뒤섞인 세상이다.

「이제 어떡하지…….」

유니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물방울 하나를 품에 끌어안고 우울하게 얼굴을 묻었다.

물방울에선 차갑고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시원한 녹색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끊임없이 흩날렸다.

정령계로 돌아온 그들은 계약자의 곁에 소환되었던 때와 다르게 평범한 사람의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이그레트’와의 계약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유니는 크기만 커졌을 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인간 소녀의 외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정령계로 데려오고 말았어.」

살아 있는 자를 정령계로 데려와선 안 된다. 그건 각 차원을 살아가는 존재들 사이에서 정해진 규칙이었다.

그러나 이를 어긴다고 해서 정령들이 벌을 받게 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끌려 들어온 자들에게 발생한다.

‘정령화.’

정령계는 즉 정령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세계.

살아 있는 인간이 정령계로 들어와 일정 기한을 넘긴 채 오래 머물고 있으면 그는 정령과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건 살아 있는 자에게 죽음을 의미한다. 정령과 동화된 인간은 다시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육신을 잃어버리고 영혼만 남아 영원히 정령들과 함께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규칙을 어기고 정령계에 살게 된 자가 몇 존재했다.

「하지만 이대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낸다고 해도.」

「……그건 안 돼요.」

내내 조용하던 카니가 유니의 말을 막았다.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을 굽이굽이 늘어뜨린 카니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다소 식어 있었지만 여전히 따뜻한 계약자의 체온이 손바닥에 맞닿았다.

은발의 소년은 꼭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자리에 누워 있었다. 카니는 그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며 나직하게 말했다.

「절대로.」

맑은 다홍빛 눈동자에 슬픔이 내려앉았다가 이슬처럼 사라졌다.

「절대 보내지 않아.」

그 차가운 세상으로.

어차피 그의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는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즉시 그를 죽게 만들 게 분명했다. 치료를 하고 싶어도 한번 감염된 이상 그 자신이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이라 방법이 없었다.

정령들 입장에선 그냥 죽게 놔둘 바엔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정령계에 묶어두는 편이 나았다.

「응.」

유니도 물방울을 내려놓고 카니의 옆으로 가볍게 날아왔다.

「나도 마찬가지야. 적어도 이곳에선 괴롭지 않겠지.」

육신의 아픔도 배신의 괴로움도 없는 곳. 어쩌면 진작 이렇게 됐어야했는지도 모른다. 유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거기 둘, 정신 좀 똑바로 차려봐. 왜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원래 과묵한 루니는 그렇다 쳐도 매사 정신 사납게 조잘거리고 통통 튀던 토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더욱 분위기가 어두웠다.

정령계로 돌아오면서 늑대의 모습에서 푸른 머리를 가진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화한 루니는 유니의 타박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저 주인을 지키는 개처럼 자리에 서있을 뿐이다.

대답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 루니를 보며 유니가 푸욱 한숨을 쉬던 순간이었다.

「……있지.」

멍하니 그 곁에 주저앉아 계약자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던 토니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만일 싫어하면 어떡한다요?」

「으음, 이그레트라면 싫어할지도.」

곧장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대꾸하는 유니를 보며 토니가 훌쩍거렸다.

「나요는 무섭다요.」

「뭐가 그렇게 무서워?」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이그레트를 보는 것도.」

“욕심쟁이네, 너.”

가만히 듣고 있던 가야가 손을 뻗어 토니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헤집었다.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서 죽거나, 아님 영원히 여기에 남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잖냐?”

「그치만그치만! 이제 막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인간 친구들이 생겼는데!」

토니는 버둥거리며 가야의 손바닥 아래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청룡은 집요하게 토니의 황토색 머리카락을 내리눌렀다.

「이런 건 이그레트가 바라던 게 아니다요.」

결국 토니는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도 헤집어서 까치집이 되어버린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가야가 손을 떼었다.

“알아. 그래도 주인은 너희들의 결정에 화를 내진 않을 거다.”

엄밀히 따지자면 자연계 정령이 아닌 신수에 해당하는 가야도 정령계에 초대된 입장이었다. 그는 울고 있는 토니를 향해 한숨처럼 덧붙였다.

“니들도 그가 언제까지나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데려오려던 것도 아니었어.」

“데려올 생각은 있었단 거네?”

「응. 그가 원하는 삶을 살고 난 후에.」

초록빛의 정령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때 데려오려고 했어. 아직은 아니야.」

“바보냐. 니들.”

「……?」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없어.”

자연계 정령들에 비해 훨씬 인간과 가까운 삶을 살아온 가야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계약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삶은 그냥 삶일 뿐이지. 힘들든 어렵든, 뜻대로 살아지지 않아도 그냥 사는 것. 그게 인간이라고.”

탁!

부드럽게 잠든 계약자의 머리를 쓸어주려던 가야의 손이 누군가에게 꽉 붙들렸다.

조각상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루니였다. 늑대의 모습이었을 때보다 훨씬 난폭하고 위험해 보이는 눈빛에 가야가 움찔 손을 뺐다.

「……그래서 네놈이 하고 싶은 말은.」

물의 정령에게서 맹수가 으르렁대듯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이대로 죽게 놔뒀어야했다는 건가. ‘청룡’.」

“엉? 우리 멍뭉이 삐졌냐.”

분노하여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는 상대를 보며 가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너넬 탓하는 건 아냐. 이번 상황은 공간이 무너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으니까. 다만 너무 욕심 부리지 말란 소릴 하고 싶은 거지.”

「신수 따위가.」

“뭐?”

명백히 깔아보는 말에 이번엔 가야의 표정도 굳었다.

「자연의 왕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다.」

“거참, 좋은 뜻에서 조언을 해줘도…….”

「필요 없어.」

“아, 그러셔?”

둘 사이에 날 선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같은 계약자를 두고도 적의를 불태우는 루니와 가야를 유니가 당황한 얼굴로 번갈아보았다.

「야, 야. 너희 왜 싸워.」

「애초에 계약자의 핏줄이기만 하면 꼬리를 흔드는 신수와는 계약의 무게부터 다르다는 걸 잊고 있었군.」

“뭐래. 너희도 계약자를 바꾸는 건 똑같잖아? 계약하지 않고선 이 꿈동산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주제에.”

가뜩이나 예민해진 상태에서 일어난 말다툼은 점점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말로만 끝나지 않고 제대로 한 판 붙을 요량인 듯 루니와 가야의 주변으로 물의 기운이 몰려들었다.

유니는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는 토니와 쥬다스에게 달라붙어 다른 데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카니를 돌아보곤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하필 한번 핀트가 나가면 이그레트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는 루니가 폭풍의 중심이었다. 유니는 말리는 건 빠르게 포기하고 소리쳤다.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바보들아!」

자연계 정령이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므로 이 싸움은 무조건 가야가 불리했다. 그러나 가야도 오랜 세월 살아오며 하늘을 지배해 온 청룡이었다. 승패 여부를 떠나 루니를 곤욕에 치르게 할 정도는 되었다.

둘 사이로 몰려든 어마어마한 기운에 땅과 하늘이 동시에 진동했다.

고여 있던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고 하늘에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올랐다. 우르릉 울린 천둥번개 사이로 거대한 용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우으으, 정말! 몰라, 물 한 방울이라도 이쪽으로 튀어봐.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가시눈을 뜨고 쥬다스를 지킬 바람을 불러 모으던 유니가 핫 고개를 돌렸다.

놀란 그녀의 손바닥에서 모여들었던 바람이 새의 깃털처럼 이리저리 흩어졌다. 유니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졌다.

“루니. 가야.”

멈칫!

잔뜩 적개심에 달아 있던 두 정령이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죽은 듯 누워 있던 소년이 어느 틈엔가 눈을 뜨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만들 하려무나. 그러다 둘 다 다치겠어.”

「이그레트으으!」

울먹이던 토니가 가장 먼저 그에게 안겨들었다. 난처한 미소와 함께 토니를 토닥거려 준 쥬다스를 향해 카니가 한발 늦게 팔을 뻗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한 번 멈췄던 심장은 정령계로 와 자연의 기운을 얻어 가까스로 제 기능을 되찾긴 했지만 고통은 여전히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바이러스가 퍼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 의식을 되찾고 움직이기 시작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 들을 것도 없이 파앗 늑대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꾼 루니가 곧장 계약자를 향해 뛰어갔다.

“참 나, 누가 누구한테 꼬리를 흔든다는 건지…….”

그 모습을 본 가야가 투덜거리며 그 뒤를 쫓아갔다.

“루니.”

그의 앞까지 뛰어간 루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춰 섰다. 척 보기에도 쥬다스의 상태는 매우 나빴다.

차라리 토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안겨들 수 있다면 좋으련만,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빛 눈동자는 이미 걱정에 잔뜩 잠겨 있었다.

“많이 화가 나 보이더구나.”

루니는 그 앞에 시무룩하게 귀를 접고 앉았다. 차갑게 식은 손끝이 그런 푸른 늑대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착하지. 화내지 마.”

「……알았다.」

유순한 대답에 쥬다스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여긴.”

「정령계야.」

가볍게 날개를 팔락여 그의 곁에 다가온 유니가 슬픈 눈으로 알려주었다.

손가락만 한 작은 크기였을 때완 다르게 보통 소녀만큼 커다래진 지금은 어깨에 앉는 대신 허공에 동실동실 떠다녔다.

「라그나로크는 파괴됐어.」

“그랬구나.”

「그리고 너, 심장이 멈췄었어.」

그 사실까진 몰랐던 쥬다스가 손으로 제 가슴을 짚어 보았다. 미약하게 뛰는 심장에선 여전히 찌르는 듯한 고통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건 정령계에 들어왔기 때문인가.’

쥬다스는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유추해냈다.

‘그렇다는 건.’

그는 멍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이곳을 나가면 죽겠구나.”

「그러니까 가선 안 돼.」

고개를 저은 유니가 그의 소맷자락을 꼬옥 붙들었다.

「여기에 있어.」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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