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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운명
그 목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들렸다. 오로지 정신력으로 눈을 떴기 때문인지 아픈 가슴보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졸음이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이봐, 멍뭉아. 손님들이 주인을 만나겠다고 온 모양인데?”
‘손님?’
몽롱해진 머릿속으로 그 단어만 화살처럼 와 박혔다.
쥬다스는 그제야 라그나로크에 함께 있었던 친우들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푸른 늑대가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돌려보내겠다.」
“잠…….”
잠깐 기다리라고 하려 했는데 하필 숨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루니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작은 기침과 함께 목을 막고 있던 핏물을 뱉어낸 쥬다스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어그러지는 시야를 견디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려야만 했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유니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넌 지금 나은 게 아니라 감염진행이 멈췄을 뿐이야. 무리하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유니.”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 본 유니는 말려도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말을 멈추었다.
평소 온화한 분위기에 송아지처럼 순한 성격을 가진 그였지만 한 번 정한 건 결코 바꾸지 않는 쇠심줄 같은 고집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정령들은 알고 있었다.
‘내 상태가 불안정한 만큼 지금은 루니도 자기제어가 힘들 터.’
물의 정령왕인 루니는 본래 자비롭지 않은 정령이다.
처음 이그레트가 루니를 보고 고고한 한 마리의 늑대를 떠올린 건 그런 성정 탓이었다.
그와 계약하며 성격이 몹시 물러지긴 했지만 루니에겐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자비나 사랑 따위가 없었다.
다른 속성 정령과 다르게 과거 그는 심지어 아무리 자기 계약자라고 해도 절대 애정을 주지 않았다.
인간보다 고귀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알려진 고대종족 드래곤을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세상 만물에 차갑고 변덕스럽게 구는 바다와도 같았다.
애초에 물의 정령왕이 누군가를 가호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자체가 특례 중의 특례.
한번 신경에 거슬리면 성난 파도와 같이 물불 가리지 않고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그게 바로 이그레트와 계약하기 전 잔혹하고도 무자비한 물의 왕이 가진 본성이었다.
“……네게 부탁이 있어.”
그런 정령들을 한눈에 사로잡은 존재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바람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잠시 후,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바람이 팟 하늘을 가르며 정령계 밖으로 사라졌다.
* * *
한참 동안 에단을 비롯한 네 사람을 안내하던 라그리마는 붉은 나비와 흰 새가 날아다니는 어느 눈 덮인 언덕에서 이동을 멈췄다.
하늘은 여전히 호수처럼 물로 뒤덮여 찰랑거렸으며 언덕 아래로는 얼어붙은 냇물이 보였다. 굽이치는 물살이며 폭포가 전부 투명하게 얼어 반짝였다.
그런데도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과 얼어붙은 냇물, 그리고 찰랑이는 맑은 하늘. 하얀 눈이 덮인 언덕에선 색색의 꽃과 녹색 풀들이 자랐다.
일행은 정령계란 온도와 상식의 경계를 벗어난 공간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구마.」
언덕 위에서 라그리마가 손을 뻗어 아래를 가리켰다.
「그는 저 냇물 너머에 있구마.」
냇물 너머에는 특별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머물만한 집은 물론이고 지나간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가시덩굴 밭만이 보일 뿐이었다.
“……저 가시덩굴 속으로 들어가라고?”
「흐흑. 나는 더 이상 갈 수 없구마. 무섭구마.」
라그리마는 겁에 질린 생쥐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바이칼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끙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냇물 너머로 펼쳐진 가시덩굴은 무서울 정도로 울창했으며 뾰족뾰족한 가시가 가득해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흡사 이빨을 드러낸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라그리마가 두려워하는 건 고작 가시 따위가 아니었다.
「왕께서 분노했구마. 그에게 가까이 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하구마.」
“시솝을 처리했다 싶었더니 이젠 또 정령왕의 분노라니. 젠장, 뭐가 이렇게 꼬였지.”
살면서 정령왕이라곤 책에서 읽은 단편적인 정보를 접한 게 전부인 바이칼이 머리를 헤집으며 한탄했다.
「지금이라도 좋구마. 정령계에서 나가게 해줄 수 있구마.」
“안 나가.”
「단호하구마…….」
바이칼의 거절에 훌쩍이며 주변을 맴도는 라그리마를 힐끗 쳐다본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서 무의미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뭐구마?」
“쥬다스 님께선 왜 정령왕들과 얽히신 거지?”
「훌쩍, 왜냐니?」
라그리마는 황당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소매를 들어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닦아봤자 금방 또 주르륵 눈물이 흘러 소매만 적시는 꼴이 되었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눈가를 훔쳤다.
“정령왕은 일반 정령들과 달라. 계약자가 관련된 일이 아닌 이상 그들이 직접 나서는 일은 없다고 들었다.”
「잘 알고 있구마?」
“그런데 왜 하필 지금.”
크리스티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대면할 수 있을 거라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존재들을 향해 의구심과 적대감이 뒤섞인 마음을 품었다. 라그나로크가 무너지며 정령계로 이동한 자체는 그가 다루던 4속성 정령들을 떠올리면 아예 연관이 없는 상황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뜬금없이 쥬다스를 데려가 버린 정령왕들의 행동에 대해선 손톱만큼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혹시 이번 일에 그들의 계약자가 정말로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계약자라면.”
“속세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린 이그레트 말입니다. 그가 사실 정령계에 와 있었다고 치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이해가 가네요.”
평소 이그레트에 관련된 일화며 기록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바이칼이 그럴듯한 추측을 해냈다.
“그럼 그는 왜 쥬다스 님을 데려간 거지?”
“글쎄요. 뭐 나쁜 뜻은 아닐 것 같습니다. 치료해 주려는 걸지도 모르고요.”
일행은 아예 ‘이그레트가 쥬다스를 데려간 것이다’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듣던 라그리마는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하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본인이 말하지 않은 걸 굳이 내가 밝힐 필요는 없겠구마.’
「어쨌든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구마.」
“아, 라그리마. 당신은 여기에 남아 있으려고?”
「나도 물의 정령이구마. 정령이라면 절대 왕에게 거역할 수 없구마.」
눈물의 정령은 촉촉한 눈알을 빛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정령계에서 나가는 일은 도와주고 싶구마.」
“헤에. 처음엔 무섭게 생겨서 놀랐었는데. 당신 착한 정령이구나.”
리키의 칭찬에 라그리마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필요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인간이 오래 정령계에 머물면 안 되구마.」
“그야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좋진 않겠지만. 오래 머물면 어떻게 되는데?”
「정령에게 동화되는 거구마. 육신을 잃고 영혼만 남는 거구마. 정령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구마.」
“크으. 거 무섭구만.”
바이칼이 피식 웃었다. 그를 비롯한 일행은 지금이 충분히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한 상태였다.
하지만 누구도 도망치겠다거나 포기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마워, 라그리마.”
진심 어린 감사와 함께 그들은 언덕을 내려갔다. 얼어붙은 빙판을 건너기 위해 발을 내딛는 넷을 바라보며 라그리마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부디, 왕이여.」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스산하게 주변을 적시기 시작한 물의 기운을 감지한 라그리마가 애절하게 중얼거렸다.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눈물의 정령에겐 간절한 소망이었다.
‘왕께는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중하다는 걸 알고 있구마. 그렇지만.’
그들 역시 그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임을 알아주소서.
정령의 소망을 뒤로 한 에단 일행은 빙판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얼어붙은 냇물 한 가운데서 눈보라가 몰아쳤다. 순식간에 거대한 얼음기둥이 솟구쳐 올라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얼굴을 매섭게 때려대는 눈보라를 팔을 들어 막은 에단이 머리 위로 높이 솟은 얼음기둥을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그 위에 누군가 사뿐히 서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없는 그조차도 알 수 있었다. 정령계에 와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강대한 힘이 그로부터 느껴졌다. 마치 물속에 풍덩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본능적으로 느껴진 물의 기운이다.
“물의 왕이십니까?”
담담한 질문에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뚝 그쳤다. 얼음기둥 위에 서 있던 푸른 머리의 남자가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동자를 슥 내려 에단을 응시했다. 바람은 그쳤지만 싸늘한 냉기가 주변을 휘감았다.
「돌아가라.」
정령계라는 특수한 상황 덕에 누구나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흠칫 몸을 굳혔다. 대화 의사가 전혀 없는 차가운 분노가 깃들어 있는 음성이었다.
「너희의 세계와 통하는 문을 열어주지.」
“돌아가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 답한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즉시 말을 이었다.
“쥬다스 님을 돌려주십시오. 그러면 즉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하. ‘돌려달라’?」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탄식과 함께 물의 왕이 얼음기둥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즉사할 수도 있는 굉장한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마치 새가 바닥에 착지하듯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그분을 데려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도움을 주신 건 감사드리오나 저희끼리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에단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보며 강하게 덧붙였다.
“반드시, 함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마주선 루니는 무감정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곤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 인간들은 항상 그랬지.」
“……?”
「필요로 하고 곁에 두려고 한다.」
그 사탕발린 말에 그가 얼마나 설레 했던가. 또 얼마만큼 기대하고 얼마만큼 실망해야 했던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루니는 그를 되찾으러왔다고 말하는 에단 역시 믿지 않았다.
「하지만 너흰 스스로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지.」
“그게 무슨.”
「그러다 그가 조금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 등을 돌려.」
루니는 생각했다. 아마도 그들 역시, 그가 자신들이 알던 제국 1황자란 존재가 아니라 평민 출신의 정령사, ‘이그레트’였단 사실을 알고 나면 변하고 말 것이라고.
그래서 더욱 정령들과 함께 있는 그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돌려달라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는 죽는다. 그 사실은 알고 있는가?」
“무슨…….”
「그 정도의 상처를 입혀놓고도 잘도 그런 뻔뻔한 말을 입에 담는군.」
에단은 망연히 입을 다물었고, 그의 한 발짝 뒤에 서있던 크리스티나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의 상태가 그 정도로 심각했을 줄은 누구도 몰랐다. 한순간에 그들을 자괴감으로 몰아넣은 루니는 으르렁거리듯 낮게 읊조렸다.
「그를 ‘돌려줘야 할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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