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12화 (21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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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운명

쩌저적!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얼어붙어 있던 빙판이 갈라졌다. 갈라지는 틈으로 차가운 물살이 파도치며 넘실거렸다.

그 위에 서 있던 넷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피하는 것보다 바닥이 갈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젠장!”

‘화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바이칼은 더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공격을 시작한 물의 정령에게 속으로만 구시렁거렸다.

쥬다스를 바이러스에 감염시킨 원흉에 대해선 그들도 몹시 분개하던 참이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시솝을 처리하는 건 리키가 아니라 자신들이 할 일이었다. 하지만 제국 내에서 날고 긴다는 능력의 소유자인 세 사람은 결국 이번에 쥬다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신들의 무력함에 더욱 화가 났고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물의 정령이 보이는 차가운 태도에도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순 없으니, 어?”

스태프를 꺼내 마법을 시전하려던 바이칼은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이럴 수가! 정령계엔 마력이 없나?’

마력이 전혀 모이지 않았다. 정령계란 오로지 정령의 의지에만 반응하는 세계였으니 타종족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놀라 스태프를 꾹 말아 쥔 그는 이내 머리 위를 덮는 거대한 그림자에 천천히 팔을 내렸다. 허탈한 나머지 입에선 반쯤 진심인 농담이 흘러나왔다.

“이거 게임이 너무 쉽게 끝나지 말입니다.”

“포기하지 마. 아직이다.”

그리 말하는 에단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웬만한 동산보다 높은 파도가 그들의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자연의 분노 앞에선 마법이고 뭐고 소용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저항을 포기한 바이칼의 어깨에서 작은 무언가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플루비?!”

조그마한 와이번은 용감하게 달려가 덮쳐오는 파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파도가 일행을 덮치기 전, 순식간에 전부 흡수해 버렸다.

스펀지처럼 쭉쭉 물을 빨아들인 플루비는 거대한 용의 모습을 갖추고 루니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캬아아아!”

「…….」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를 쳐다본 루니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동그란 물방울들이 퐁퐁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보기엔 제법 아름답기까지 했으나 고작 장식 따위로 방울을 만들어냈을 린 없다고 여긴 에단이 앞으로 둥실둥실 날아온 방울을 검으로 베어 터뜨렸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폭탄처럼 터져 나갔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에단이 제대로 막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함께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파괴력이었다.

그걸 본 바이칼은 질린 얼굴로 서 있다가 플루비를 향해 소리쳤다.

“플루비, 피해!”

“끼오웅?”

하지만 몸집이 커진 플루비는 솟아오르는 방울 폭탄을 피하기 어려웠다. 펑펑 터지는 방울들에 여기저기 비늘이 깨지고 화상자국이 생겼다.

결국 플루비는 온몸을 공격하는 물방울들을 견디다 못해 브레스를 훅 내뿜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기둥이 루니를 덮쳤다. 막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브레스에 직격당한 그를 보며 혹시나 싶었던 바이칼은 곧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절로 경악이 튀어나왔다. 루니는 브레스에 머리털끝 하나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꼭 물이 가득 찬 양동이에 불붙은 성냥 하나를 떨어뜨린 것처럼 그렇게 멀쩡했다.

오히려 그를 덮친 브레스가 깨끗하게 소멸해 버렸다.

루니는 천천히 손을 뻗어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그 주변을 감싼 물줄기가 마치 용트림을 하듯 꿈틀거렸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그를 생각하여 마지막 기회를 주지.」

일행이야 목숨을 위협 당했다지만 루니에겐 장난에 불과한 순간이었다.

물의 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불필요한 잡음 없이도 순식간에 넷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루니가 그리하지 않고 이처럼 경고를 한 이유는 계약자가 그들의 안전을 늘 염원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동시에 진동했다. 우르릉, 큰 천둥이 울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방을 적시는 장대비에 플루비가 조금씩 상처를 회복하여 낑낑거렸다.

「돌아가라.」

“싫습니다.”

즉답이었다. 에단은 망설임 없이 답한 후 루니를 마주보았다.

“……그분께서 이곳에 남으신다면.”

단호함을 담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본 루니가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우리도 이곳에 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충분히 살아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가지 않겠다면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뿐이다. 루니는 자신의 계약자에게 그들을 데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꿈틀거리던 물줄기가 뱀처럼 입을 쩍 벌렸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살기등등한 물줄기를 보며 에단이 다시 답했다.

“쥬다스 님을 돌려주시기 전까진 한발 짝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유감이로군.」

그 말과 함께 물줄기가 기다렸다는 듯 쏘아져 나갔다.

빗속에서 먹이를 사냥하는 뱀처럼 사납게 달려드는 물 덩어리를 막기 위해 에단이 검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후웅!

녹색 바람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공격을 무마시켰다.

그의 앞을 막아선 이를 발견한 루니가 황급히 모든 물의 기운을 흩어버렸다. 물줄기며 방울들이 순식간에 형체를 잃고 사라져 버렸다. 오로지 하늘에서 퍼붓는 빗줄기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이런.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여직 싸우고 있는 것이야?”

따뜻한 음성이 꼭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크리스티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들 막무가내로구나.”

“…….”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에단도, 바이칼도 벼락 맞은 듯 자리에 굳어버렸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하듯 정지해 버린 전원을 빙 둘러본 쥬다스가 가만히 턱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으음,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쥬다스…… 님.”

“그래, 크리스티나야. 다치지 않아 다행이구나.”

창백한 안색으로도 자신들의 안위를 생각해 주는 그를 향해 에단과 바이칼이 자리에 털썩 무릎 꿇었다.

“일어나거라. 바닥이 차단다.”

“죄송합니다, 전하.”

에단은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고 바이칼이 먼저 고개 숙여 사죄를 표했다.

다른 설명 없이도 아이들의 자괴감을 꿰뚫어 본 쥬다스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 잘못이 아니야.”

“하오나.”

“고맙다.”

사과를 했는데 도리어 감사가 돌아오는 바람에 바이칼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지쳐 보이는 얼굴이 불안했다.

“전하.”

“놀랐지 무어냐. 너희가 이곳에서 저 아이에게 대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말에 다들 양순하게 쥬다스를 바라보고 있는 루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에라도 죽일 듯 굴던 조금 전과 달리 공격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루니를 보며 쥬다스는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처럼 살며시 웃었다.

“루니는……. 평소에는 온순한데 화가 나면 아주 무섭거든.”

「……무섭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음. 하지만 조금 진정할 필요는 있겠어, 루니.”

잔뜩 예민해져 계약자의 동의도 없이 손님들을 전부 죽이려고 했던 루니는 풀죽은 얼굴로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은 동시에 같은 힌트를 얻고 일순 숨을 멈추었다.

‘루니.’

평소에도 쥬다스가 종종 부르던 정령의 이름이었다. 게다가 같은 물의 정령이었고 그가 나타나자마자 돌변하는 태도까지.

‘하지만 그건 저런 모습이 아니라, 좀 더 동물 같은…….’

설마 하던 걸 확신으로 바꾼 건 그 순간 훅 하고 모습을 바꾼 루니였다.

외형을 푸른 늑대로 되돌린 루니는 주인을 따르는 개처럼 쥬다스의 발치에 엎드렸다.

“……저 지금 뭔가 이상한 가설이 떠오르려고 하는데요.”

“넣어둬.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속닥거리는 바이칼에게 칼 같이 자르긴 했지만 에단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쥬다스가 물의 정령왕의 계약자였다는 건 가히 충격적인 진실이었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에단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쥬다스를 향해 물었다.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 들었습니다.”

“알고 있었느냐.”

“예, 송구하오나 이곳에서 나가기 어려우시다는 말도.”

“글쎄다. 지금 정령계를 떠나면 살 수 있으리란 장담은 못하겠구나.”

자기 목숨을 놓고도 태연자약한 그를 보며 크리스티나가 울컥하여 입을 열었다.

“어찌 그리 간단히 말씀하십니까. 궁으로 돌아가 치유술사들에게 치료를 받으신다면.”

“이건 병이 아니란다.”

시솝이 만들도록 한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병과는 달랐다. 한번 감염되면 몸이 스스로를 적으로 인식해 파괴해 버린다.

치료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원천 제거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아직까지 개발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몸이 스스로 망가지고 있는 것이니 치료를 해봤자 금방 다시 상하게 될 테지.”

“나, 나한테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가 있을 거야!”

쥬다스는 안절부절 못하고 서있다 불쑥 끼어든 리키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리키의 손등 위에 앉아있던 분홍빛 정령이 사락 날아올랐다.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던 건 제이니까. 다시 없앨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나비처럼 살랑거리며 쥬다스에게 날아든 제이가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또 허튼수작 부리는 건 아니겠지?”

문득 바이칼이 불신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사실 더 악질적인 바이러스를 숨겨놨다든가 하는.”

“그런 거 없어! 바이러스를 만들라고 시킨 건 시솝이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시솝 같은 소릴 하고 자빠졌네. 애초에 주군께서 곤경에 처하신 건 네놈 때문이잖아? 처음부터 주구장창 거짓말만 늘어놓은 자식을 어떻게 믿으라고.”

“그, 그건.”

리키는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술만 달싹였다.

“확실히 제이에겐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겠지. 제거까진 무리라도 말이다.”

서로 투닥거리던 두 사람은 쥬다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제이를 손바닥에 얹은 채 차분히 말했다.

“부탁하마.”

그가 직접 제이를 활용하는 걸 부탁한 이상 바이칼도 더 이상 빈정거릴 수 없었다.

더 방해하는 사람이 없자 리키는 곧장 제이를 불렀다.

“제이!”

「네, 주인님.」

“바이러스에 대한 데이터를 검색해. 혹시 제거할 수 있어?”

「해당 바이러스 제거에 대한 권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권한 같으니.’

다시 권한 타령을 해대는 제이를 보며 리키가 머리를 짚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는 순간 제이가 다시 분홍빛으로 반짝이며 검색 결과를 알려주었다.

「대신 바이러스 원격조종이 가능합니다.」

“……원격조종?”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리키는 이마에서 손을 내리며 제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쥬다스의 손바닥 위에 다소곳이 서있던 제이는 기계적인 음성으로 주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주인님께서는 현재 저를 통해 감염자에게 퍼져 있는 바이러스를 조종하여 특정 신체부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원격조종기능을 사용하면 감염자의 특정 신체부위를 훨씬 빠르게 괴사시킬 수 있습니다.」

“뭐야, 그게!”

리키는 질색하여 펄쩍 뛰었다. 끔찍한 설명이었다. 원하는 신체부위를 공격하도록 명령해서 그 부위를 괴사시켜 버린다니. 그냥 서서히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 더 잔인했다.

그러나 제이의 설명은 끝나지 않았다.

「원격조종으로 목표를 괴사시킨 후, 바이러스는 자동 소멸합니다. 현재까진 유일한 바이러스 제거 방법입니다.」

“팔이나 다리를 내어주고 목숨을 살리란 소리야?”

「원하신다면 장기도 괜찮습니다.」

제이는 산뜻하게 덧붙였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무거운 침묵이 이를 듣고 있던 일행 사이로 내려앉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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