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13화 (21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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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운명

리키마저 할 말을 잃고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물론 그냥 목숨을 잃는 것보다야 신체 한 부분을 내어주고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편이 나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신체는 기계가 아니므로 한 번 잃고 난 뒤엔 재생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치유술사라 하더라도 괴사한 부위를 되살리진 못한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정령계에 머물렀다간 영영 빠져나가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만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아무런 말이 없자 제이는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바이러스와 동시에 사멸시킬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손, 발, 팔, 다리, 머리 중 선택 가능합니다. 장기일 경우 중요도가 올라가므로 비교적 좁은 범위인 심장, 위장, 폐, 간…….」

“으음, 그만하면 되었다. 결국 생존에 위협이 갈 정도의 피해를 입히는 게 이 바이러스의 목적이로구나.”

「대인살상무기니까요.」

기계형 정령 제이는 감정을 배제하고 따박따박 사실만을 알려주었다.

‘돌겠네.’

이도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바이칼이 손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판에 찍은 듯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에단과 크리스티나를 힐끗거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수하로서 주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선 팔이라도 한 짝 버리라고 충언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죽어도 못해.’

그들은 정답을 알아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어쩌면 이대로 정령계에 남는 편이 나으실지도.’

만일 팔을 잃는다면 황제와 귀족 세력들은 순례의 길을 무사히 마치지 못하고 불구가 된 그를 불명예스럽다 여길 것이다.

세 명의 수하는 그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처절한 환경에 놓여 힘겹게 쌓아온 모든 위업이 파도에 모래성 휩쓸리듯 흩어져 버리는 경험을 하게하고 싶지 않았다. 검을 바쳐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야 그를 떠나지 않겠지만 그 자신에겐 다시금 지독한 악몽과도 같은 굴레일 게 틀림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눈물의 정령 라그리마로부터 설명을 듣기로, 정령계는 마치 인간이 상상하는 천국과도 같았다.

다칠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다. 조화로운 자연의 기운으로 가득 차 늘 꽃이 피고 냇물이 흐르며 선선한 바람이 분다. 지금처럼 몸이 아파 고통스러워하거나 배를 곯아 힘겨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바로 이 정령계였다.

그들은 정령계에 인간이 오래 머물 경우 육신을 잃고 정령화가 된다는 사실도 들어 알고 있었다.

셋의 대표로 에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뭔가 결심한 표정이로구나.”

에단이 입을 떼자마자 쥬다스는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본 듯 답했다. 그리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게 진지하게 고뇌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씀인즉.”

“나는 이미 답을 정했으니 말이야.”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을 하나하나 마주 보며 쥬다스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제 결정을 말해주었다.

“돌아가자.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처음부터 그는 정령계에 남을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세 명의 수하도 반발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따르겠습니다.”

더 낫고 자시고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발치에 엎드려 있던 루니가 콧잔등을 실룩이며 살며시 그의 옷깃을 물었다. 끼잉! 낑! 코로 내는 울음소리에 쥬다스는 미안함을 담아 푸른 늑대의 머리를 다독였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리키가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장기는 무리지만 팔 정도는 금방 만들 수 있어. 우리 미드가르드에서 만드는 의수는 진짜 팔처럼 움직이거든.”

“참 신기한 기술력이로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팔을 뗄 생각은 없단다.”

“어? 하지만 바이러스를 제거하지 않고 나가면 당신은.”

땅에서 뿌리 뽑은 나무처럼 바이러스에 잠식당해 죽게 된다. 뒷말을 삼키고 눈치를 보는 아이에게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서 일단은 도움을 청하긴 했다만.”

“도움? 누구에게?”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묵묵히 주인의 결정을 따르고자 한 다른 세 사람도 리키와 마찬가지로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 순간 몰아치던 폭우가 거짓말처럼 뚝 그치고 새의 깃털 같은 실바람이 살며시 불어왔다. 그렇게나 주구장창 비를 맞았는데도 바람이 불자 옷이나 머리는 물기 하나 없이 뽀송하게 말라 산뜻함을 주었다.

크리스티나는 잘 마른 머리카락을 무심코 손가락에 감아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를 말려준 바람이 애들 웃는 소리를 내며 까르륵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물이 무거운 중압감을 풍기는 신사라면 바람은 장난꾸러기 아이였다.

자연물에서 고유의 성격을 느끼다니, 확실히 정령계는 상식으로 이해할 공간이 아니었다.

“마침 저기 오는구나.”

“예?”

후우웅!

그가 가리킨 곳에 녹색 바람이 살아있는 새처럼 날아들어 바닥에 복잡한 진을 하나 그렸다.

다른 세계에서 정령계로 이어지는 소환진이었다. 그 소환진 한가운데에서 눈부시게 하얀 털을 가진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집은 황소보다 크고 머리엔 유니콘의 뿔이 달렸으며 긴 흰색 털은 잘 관리받은 귀족 여인의 머릿결처럼 매끄럽게 찰랑였다.

“……수호견 헤브라시스.”

그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본 에단이 탄성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의 이름을 듣자 흰 짐승은 콧김을 푸륵 뿜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성녀의 수호견이 있다는 건.’

즉 성녀도 함께 왔다는 뜻이다. 그 추측대로 헤브의 몸집에 가려져 있던 가녀린 여인이 앞으로 천천히 나섰다.

여인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흑발을 세 갈래로 묶어 내리고 월계수가 새겨진 단정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초점이 없는 하늘색 눈동자를 들어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형제자매님들께 축복이 함께하길.”

“맙소사. 성녀께서 어찌 이런 곳까지 걸음하셨습니까?”

바이칼이 경악하여 물었다. 역사상 고결하고 신성한 성녀가 교황청에서 벗어나지 않고 질서를 지킨다는 불문율을 어긴 전례는 없었다.

전례를 따지자면 이번이 최초인 셈이다.

“예. 아시다시피 성 위그드라실의 이름을 이은 자녀가 엘리시움에 머무는 것은 본래대로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지요.”

“그럼 왜…….”

“하나 나는 곤궁에 처한 벗을 외면하면서까지 원리원칙을 고집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지는 않답니다.”

쥬다스가 유니에게 따로 부탁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의 전언을 담은 바람의 정령이 교황청으로 찾아들자, 성녀 위그드라실은 벗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고 선뜻 그 부름에 응했다.

“청을 들어주어 고맙습니다, 위그드라실.”

“……나의 벗, 쥬다스. 캄캄한 죽음이 풀숲에 도사린 뱀처럼 그대의 목전까지 드리웠으니.”

성녀는 쥬다스의 감사인사를 듣고서야 그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수호견 헤브라시스가 그녀의 지팡이가 되어 가는 걸음걸음을 지켜주었다. 마침내 쥬다스의 앞으로 다가온 위그드라실은 차가운 손길로 그의 뺨을 짚었다.

“이런 아프고 고된 시기에 벗으로 떠올려주어 나 역시 고마울 따름이랍니다.”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시린 손끝에서 화롯불처럼 따스한 걱정이 느껴졌다.

정령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듣고 왔지만 위그드라실은 직접 벗의 상태를 진단하고자 했다. 그러자 강대한 신성력이 물결치듯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쥬다스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으며 답했다.

“정화의 축복을 가진 당신이라면 생명을 해하는 바이러스를 깨끗이 태워 버릴 수 있으리라 멋대로 추측하였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자 다른 이들도 안개 낀 듯 갑갑했던 머릿속이 확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신성력은 쉽게 말해 신이 살아있는 자들에게 베푸는 자비, 즉 생명에 대한 신의 사랑을 담은 힘이다. 루바르잔 제국 국교의 대상이자 교황청에서 굳건히 믿고 있는 신은 만물을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을 미쁜 자식처럼 여긴다 했다.

그래서 사제들은 치유술사와 달리 상처를 낫게 하진 못하지만 몸에 걸린 상태 이상이나 저주, 해로운 질병을 거두어가는 정화의 축복을 내릴 수 있었다.

그중 성녀 위그드라실이 내리는 축복은 온몸이 썩어문드러지는 불치병도 순식간에 낫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후후, 지혜로우신 분. 맞습니다. 나는 당신을 괴롭게 만드는 원흉을 정화할 수 있어요.”

“……!”

지켜보던 네 사람 사이에 소리 없는 탄성이 스쳐 지나갔다.

위그드라실의 말대로라면 쥬다스가 목숨이나 신체 일부를 잃지 않고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채 안심하기도 전에 성녀가 신성력을 사용하기 위한 조건을 덧붙였다.

“다만 이건 병이 아니라 ‘바이러스’라는 무기에 의한 공격이므로. 그 작은 바이러스 알갱이들이 온몸에 퍼져 있는 상태로는 어렵습니다.”

“하면.”

“일망타진이라고 하죠. 한 번에 성화로 불태울 수 있도록 그 바이러스들을 몰아주세요. 기왕이면 작으면서도 생명력이 집결되는 중심부.”

뺨을 어루만지던 하얀 손가락이 서서히 밑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쥬다스의 가슴께를 짚은 채 나직하게 말을 맺었다.

“심장으로.”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에단이 소리를 높일 뻔했으나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저었다. 제이를 통해 바이러스를 원격조종하는 일은 그 부위를 괴사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만에 하나 타이밍이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정화하기 전에 심장이 먼저 터져 죽을 수도 있었다.

“기사여, 그대의 검에 축복을 걸어드리겠습니다.”

반발하는 에단을 향해 돌아선 성녀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그러자 그가 가지고 있던 검에서 은은한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에단은 검을 검집에서 빼 들었다.

스릉!

살벌한 소리와 함께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꼭 금속이 아니라 빛으로 만든 검과도 같았다.

“정화의 축복이 걸린 검은 정확히 부정한 것만을 파괴합니다. 그것으로 바이러스가 모인 부위를 찌르면…….”

“싫습니다.”

쩡!

성난 손길에 의해 검이 그대로 흙바닥에 푹 꽂혔다. 에단은 검을 땅에 꽂은 채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버렸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위그드라실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다시 한 번 강하게 제 뜻을 표명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로.”

“거 아무리 낫게 하려는 목적이라지만 어떻게 주군을 찌릅니까? 완벽히 낫는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랬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바이칼도 어깨를 으쓱하며 에단의 의견에 동조했다.

“차라리 여기서 지내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데요. 전하의 곁엔 저 살벌한 늑대 정령도 있으니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가만히 있다가 느닷없이 바이칼에게 살벌하다고 지목당한 루니가 불만스럽게 크르릉 목을 울렸다.

“무리해서 제국으로 돌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마지막으로 무겁게 입을 연 크리스티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의 단호한 눈빛을 마주한 쥬다스는 문득 생각했다.

‘진정 모든 게 달라졌구나.’

과거 그가 만났던 인연은 전부 그에게 무언가를 원했다. 사람들은 그가 남들보다 더 가졌으니, 남들보다 더 강한 힘이 있으니 당연히 베풀고 희생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강요했다.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세 아이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좋은 사제지간으로 남은 콜마저도 처음엔 그에게서 힘을 얻길 바라 찾아왔다.

그가 바란 건 그저 편안함과 다정함, 언제고 기댈 수 있고 언제고 편안히 연락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상냥함.

하지만 정작 다가오는 자들은 전부 외면과 능력으로 경매하듯 그를 만나려 들었다. 앞에선 엎드리고 돌아서면 그 등에 칼을 박는 게 전생의 그가 만난 인간이었다.

그는 문득 처음 ‘쥬다스’로서 눈을 떴을 때 우연찮게 점쟁이 노파로부터 받았던 점괘를 떠올렸다.

‘결국 내게 모여든 3개의 검이 심장을 찌를 것이라 했던가.’

흥미본위로 본 점이라 줄곧 잊고 있었던 것이 왜 하필 지금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사실 노파가 예언한 점괘는 제법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결국 황태자위에 올라 태양이라 일컬어지는 황제의 후계가 되었고, 4대 정령왕에게 위험한 순간마다 늘 가호를 받았다. 그리고 루바흐 학원에서 그에게 검을 바친 3명의 인재를 만났다.

거기까지 생각한 쥬다스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한 가지, 당신이 틀렸어.’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땅에 꽂힌 에단의 검을 스스로 손에 쥐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번 에피소드도 슬슬 막바지를 향해 가는 군요! ㅎㅎ

곧 장마시작이라는데 시원하게 퍼부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밤인데도 너무 덥네요. ㅠ.ㅠ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함께 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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