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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운명
땅에 박혀 있던 검이 뽑히며 하얗게 타오르는 날이 드러났다. 신성한 불꽃, 성화가 검 전체를 새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쥬다스는 예전에 한 번 이 성화로 정화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기에 제법 익숙했다. 손에 닿아도 전혀 뜨겁지 않은 이 성화는 부정한 존재만을 태우는 따뜻하고도 자비로운 불길이었다.
“전하?”
왜냐고 묻는 듯한 눈길에 답하지 않은 채 그는 리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리키.”
“그, 하, 하지만.”
“부탁한다.”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지 망설이는 리키를 향해 쥬다스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쥬다스는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앞두고도 여전히 차분했다. 꼭 심부름 시키는 어른처럼 그저 그렇게 잔잔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신뢰를 느낀 리키는 울컥 목이 메는 걸 느끼며 자신의 정령을 불렀다.
“……제이.”
작은 분홍색 정령이 포로록 아이에게로 날아들었다.
리키는 떨리는 손으로 제이를 감쌌다.
‘처음부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쥬다스는 리키가 무슨 행동을 해도 원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배신하고 상처를 줬는데도 여전히 다정했다. 처음엔 특이한 사람도 다 있구나 싶었다. 화가 나도 속으로 참기만 하는 바보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쥬다스는 리키가 지금껏 본 중 가장 이타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이타적인 게 아니었다.
‘늘 진심으로 행동한 것뿐이야.’
본심을 숨기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는다.
쥬다스는 강한 자만이 가지고 있는 여유와 포용 속에서 자신이 만난 이들을 언제나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해를 입히더라도,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임을 알았더라도 등을 돌리거나 원수를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전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리키가 했던 배신의 저면에 숨겨져 있던 아빠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과 그 간절함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비참한 소망이었다는 사실을.
또한, 그가 만난 이들이 전부 자신이 손만 까딱이면 목숨을 거둘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걸 알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의 앞에 선 사람들은 여러 의미로 전부 어린아이였다. 그러니 진심으로 화가 나지 않았고 아이가 부리는 장난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분노하는 순간은 아이들의 장난이 선을 넘었을 때다. 바로 시솝이 그를 협박했을 때처럼.
리키는 성화에 감싸인 검을 든 쥬다스가 마치 신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이러스 원격 조종 실행.”
“……!”
명령어가 떨어지자 쥬다스의 세 친우들은 동시에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리키의 입을 막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쥬다스가 직접 내린 결단이기 때문이다. 냉철하기로 유명한 에단조차 눈꺼풀을 바르르 떨 정도로 동요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크리스티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긴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그저 또래의 여린 소녀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목표물을 지정해 주십시오.」
“쥬다스 님!”
그때 바이칼이 불쑥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쥬다스의 금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바이칼은 한 차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입가가 겨우 풀어져 평소다운 장난스런 미소를 씩 그려냈다.
“제국에 돌아가면 저랑 가면 파티 한번 나가시죠.”
“…….”
“제가 또 한 인맥하지 않습니까? 만나는 여자마다 죄다 친구가 되어버려서 비록 제 연애 사업은 망했지만, 미팅 주선엔 자신 있습니다.”
“……바이칼.”
“괜찮은 친구들 다 데려올 테니까 지금처럼 신분 감추고 한번 만나나 보시라고요. 아, 세이지 님도 함께 데려가셔도 좋겠네요. 14살이면 이제 다 크셨구먼요.”
혼자 주절주절 떠드는 바이칼을 멀거니 쳐다보던 쥬다스가 작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는 건 바이칼이 가진 큰 장점이었다. 말은 장난스럽게 했지만 그 속까지 장난인 건 아니었다.
그가 웃자 바이칼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녹색 눈동자를 마주본 쥬다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약속하신 겁니다?”
“그래.”
가면 파티는 말 그대로 신분과 얼굴을 감추고 즐기는 만남의 장이었다.
마치 동화 속 장면처럼 묘하게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가벼운 듯 진솔한 만남을 가능하게 했기에 실제 여기서 이어지는 연인이 상당했다. 평소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그로부터 참여 의사를 따내자 바이칼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꼭, 같이 가시는 겁니다.”
‘살아서.’
대답 대신 스릉 땅을 긁은 뾰족한 검 끝이 하늘로 향했다.
쥬다스는 그 끝을 움직여 정확히 자신에게로 맞추었다. 성스러운 불꽃에 둘러싸인 검에선 예기가 번뜩였다.
「주인님, 목표를 지정해 주십시오.」
제이의 재촉이 이어지자 리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심장으로.”
목표가 정해지자 바이러스가 발동하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을 잠식하고 있던 바이러스가 하나의 장소로 몰려들었다. 생명의 근원이자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심장을 괴사시키기 위해 몰려든 순간, 쥬다스는 세상이 핑 도는 것만 같은 강한 현기증을 느꼈다.
‘안 돼. 진행이 너무 빨라.’
생각했던 것보다 바이러스의 공격이 몹시 빨랐다.
도저히 검을 내지를 만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검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대로라면 성화가 바이러스를 태우기 전에 심장이 먼저 괴사해 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누군가 무너지던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콱
등을 받치고 어깨를 부축한 이들은 한사코 그를 찌르는 걸 반대했던 크리스티나와 바이칼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걸 눈치채고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일에 가담한 것이다.
‘감히 주군을 찌를 수 없다’는 이성적인 판단은 지금 순간 중요하지 않았다.
아차 하는 순간 심장은 괴사할 것이고 그럼 모든 게 끝이다.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검 손잡이를 잡은 채 떨리는 손 위로 단단한 손길이 하나 더 느껴졌다. 흐릿한 시야로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에단이었다.
심장이 공격받은 충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쥬다스의 손을 붙든 에단은 그대로 힘을 가해 검을 내질렀다. 성스러운 불길이 바이러스로 가득 들어찬 심장을 관통한 순간이었다.
화아앗.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사위를 집어삼켰다. 나중에는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감고 있는 건지도 분명치가 않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휘몰아치는 빛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의식하지 못한 사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크리스티나는 누군가의 흐느낌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낯익은 울음소리였다.
「으헝헝헝. 돌아왔구마. 으헝헝헝.」
“……라그리마……?”
온몸이 파랗게 빛나는 눈물의 정령이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다.
「잘했구마. 고생했구마. 다들 너무나도 장하구마.」
크리스티나는 멍하니 일어나 앉았다. 바로 옆에 대 자로 쓰러져 있는 바이칼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그녀보다 한발 늦게 눈을 뜬 에단과 시선이 마주쳤다.
“크리스티나, 전하께선?”
“전하……?”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깨자마자 쥬다스를 찾았다.
눈을 뜬 곳이 어딘가에 대한 의문보다 그에 대한 염려가 우선이었다.
“으으, 누, 눈부셔.”
바이칼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눈이 멀 것만 같던 신성한 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푹신한 카페트와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광활한 도시. 라그나로크로 입장하기 전 들렀던 미드가르드의 콜로세움 최상층이었다.
‘여긴 정령계가 아니다.’
그들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왔다.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그 사실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 세상은 온통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홀로 파랗게 빛나며 주저앉아 울고 있는 라그리마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세 사람은 슬슬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사람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라그나로크에서 먼저 탈출해 갈라졌던 일행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형님…….”
라그리마뿐 아니라 세이지도 울고 있었다.
덜컥 내려앉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크리스티나가 떨리는 입술을 떼었다.
“전하…… 쥬다스 님은……?”
“음? 벌써 일어났구나.”
그녀는 순간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에단과 바이칼의 표정이 자신과 같은 걸 보니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깊은 밤이니 잠든 김에 좀 더 자고 일어나길 바랐건만.”
급한 마음에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창가에 그가 서 있었다.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빛이 아니야.’
그를 둘러싼 빛은 각기 다른 속성을 뜻하는 네 정령이었다.
그중엔 살벌하게 굴었던 루니도 있었다. 계약자의 발치에 엎드린 채 유리알 같이 맑은 눈동자를 굴려 그들을 힐끗 쳐다본 푸른 늑대는 코로 훅 가볍게 한숨을 뱉어냈다.
“위그드라실은 헤브라시스와 함께 교황청으로 먼저 돌아갔단다. 마지막으로 폭발한 빛은 해로운 게 아니라 정화 세례를 받은 셈 치면 된다고 하더구나.”
마음을 놓고 보니 라그리마나 세이지가 흘리는 눈물이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담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그를 감싸고 있는 녹색 바람을 보자마자 목구멍까지 울컥 치솟아 오른 감정을 참지 못했다.
“이런, 어찌 또 우는 게냐? 그렇지 않아도 세이지 저 아이도 영 울음을 그치지 않아 난감하던 차인데.”
늘 도도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무장하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코끝을 발갛게 물들이며 소리 죽여 터뜨린 울음에 쥬다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정녕 전하이십니까?”
“그럼, 환영이라도 될까 봐 그러누?”
장난삼아 한 말이었지만 크리스티나는 눈앞에 선 쥬다스가 진짜로 환영이 되어 사라질까 간절히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이제 아프지 않으신 겁니까?”
“너희가 도와준 덕분에 이리 멀쩡하지 무어냐.”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하마터면 심장이 괴사해 죽을 뻔했다.
태연히 그 사실을 언급한 쥬다스는 손을 뻗어 울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맙구나. 다들 용기를 내주어서.”
털썩.
에단이 먼저 자리에 무릎 꿇었다.
그러자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기사들이 우르르 한 번에 무릎을 꿇었다. 그중엔 조용히 코를 훌쩍이던 콜도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다렸습니다. 스…… 아니, 쥬다스 님.”
무릎 꿇은 이들을 가만히 바라본 쥬다스는 곧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이제 돌아가자.”
우리의 나라로.
제국 북쪽에 위치한 기계국 미드가르드를 마지막으로 순례의 길이 끝났다.
아직 본체가 남아 있던 시솝 오딘은 라그나로크에서 벌어진 사건을 겪고도 완벽히 죽지는 않았다. 대신 라그나로크를 잃고 데이터를 해킹당한 시솝은 더 이상 예전만큼의 권한을 갖지 못했다.
그리고 시솝을 해킹한 리키가 ‘GM’이라는 새로운 운영 체제를 만들어 그에게 대항했다.
사회를 게임으로 표현해 이름 붙여진 GM이란, 어지러운 무법지대에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과 법규를 지정하고 감독하는 운영진을 통칭한다.
아직 GM이 시솝에게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나머지는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이었다.
눈 쌓인 겨울에 순례의 길을 떠났던 루바르잔의 황태자 쥬다스.E 아르키디온은 황궁 정원에 색색들이 낙엽이 질 무렵, 무사히 황궁으로 귀환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저는 새드 울렁증이 있어서...(?)
엔딩은 해피 예약입니다. ^^
챕터로 따지면 완결까지 2~3챕터 가량 남았네요.
자, 마지막까지 달려봅시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