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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Kyrie
―황태자가 귀환했다!
소식이 퍼지며 그가 순례의 길에서 행한 온갖 위업이 입에서 입을 타고 이어져 세간을 휩쓸기 시작했다. 천민부터 고위귀족까지 모두가 그를 주시했다. 그가 거쳐 간 모든 지역에 대한 소문이 가을철 무르익은 농작물처럼 번져 나갔다.
그중에는 착취당해 고통받던 영지민들을 구원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타락한 사령술사를 벌했다느니 청룡의 가호를 받게 되었다느니 하는 다소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혹자는 벌써부터 큰 두각을 드러내는 군주의 후계를 찬양했고 다른 누군가는 너무 부풀린 루머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평은 불호보다는 호가 전반적이었다.
발 없는 말이 먼저 제국을 휩쓴 후, 순례의 길을 떠났던 일행이 궁에 돌아오자마자 황제는 쥬다스를 따로 불렀다. 명목은 무사귀환을 축하하는 의미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를 후계자로 양성하기 위한 확인 과정으로, 정이라곤 하나 느낄 수 없는 독대였다.
함께 다녀온 3황자 세이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오로지 황태자인 쥬다스만 불러들인 것만 봐도 그랬다.
포식자는 여전히 메마른 눈을 하고 있었고 시험에 통과한 새끼 사자를 보듯 그렇게 아들을 살펴보았다.
“어디, 네가 얻고자 한 걸 얻었더냐.”
“그 이상을 얻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숨지 않고 필요한 자를 위해 가진 힘을 사용하리라 마음먹고 나선 여행길이었다. 그러나 끝날 무렵 돌이켜 보니 그는 도리어 많은 걸 얻었다.
쥬다스의 대답을 들은 황제 레위스는 그 내용에 관해서 까진 더 캐묻지 않았다.
황자가 세상에 나가 얻은 것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황제는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몸을 기대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레이븐의 영주였던 자를 벌하였다지.”
“예.”
“그 이유는 무엇이냐.”
미리 붙여둔 그림자들로부터 보고를 받아 자세한 정황을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황제는 직접 후계의 저의를 물었다.
이제 막 돌아와 여행복을 갈아입기도 전에 부름받은 쥬다스는 황제가 묻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에게는 권리만 있을 뿐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책임이 없는 권리라. 이를 벌할 까닭으로 삼은 이유는?”
“첫째, 책임이 없이는 아무런 권리도 따르지 않으니 이는 타인으로부터 빼앗은 권리일 것입니다. 둘째, 그런 자가 영토의 주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인즉 제자리에서 본연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는 권위자들에 대한 불명예이며.”
다음으로 이어진 단호한 의견을 들은 황제의 짙은 금안이 미세하게 흥미를 띄었다.
“마지막, 나라의 지배층으로서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평소 온화하고 자비로운 성정이나 벌할 때만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차 없이 벌을 내린다.
황제는 쥬다스가 가진 상벌에 대한 명확한 행동수칙을 높이 평가했다.
‘아직 멀었지만.’
지도자는 좀 더 냉기를 품을 필요가 있다.
레위스는 그리 여겼다. 그의 후계자가 순례의 길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었음을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물렀다.
권좌란 따뜻함이나 부드러움 따위로 유지되는 자리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친우의 목이라도 거침없이 벨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살아남는 냉혹한 자리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황제의 귓가에 이번엔 쥬다스의 질문이 들려왔다.
“해동에 대해선 묻지 않으십니까?”
“…….”
황제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무미건조했고 배부른 사자처럼 나른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의 무관심해 보이는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해동. 그 고요한 동쪽의 나라가 네게 특별히 중한 곳이었던가.”
“제게만, 입니까?”
두 번째로 말문을 닫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황제는 등받이에서 천천히 등을 떼었다. 그러곤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당돌하게 포식자의 의중을 캐내는 아들을 눈에 담았다. 생긴 건 영락없이 자신을 닮았는데 정작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표정만큼은 다른 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럼 폐하께선 아무것도 즐거운 게 없으신가요?’
흑단 같은 머릿결에 연둣빛 나비 장식이 잘 어울리던 여자였다.
약소한 동쪽 나라의 왕녀인 주제에 그녀의 아비보다 당당했고 누구보다 가까이 그의 곁에 다가와 시선을 맞추었다.
분명 다른 눈높이였는데도 같다고 느낄 정도로 그녀는 당돌했다.
‘제가 알려드릴게요. 이 세상이, 이 나라가 특별한 이유는요.’
모두가 피하기 바쁜 차가운 금안을 마주보며 그녀가 아기처럼 까르르 웃었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모든 것이 유일하기 때문이에요. 당신도, 나도.’
‘…….’
‘세상에서 똑같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마치 어제 들었던 목소리처럼 선명하게 뇌리를 맴돌았다. 레위스는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특별했었지.”
그 목소리가 없는 지금은 너무 조용하다. 그녀 말대로 세상에 똑같은 건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그녀와 같은 존재를 찾지 못했다.
마치 잠든 사람처럼 눈을 감고 시야를 차단해 버린 황제를 보며 쥬다스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회피하는 모습으로 충분히 답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상처를 직면하는 건 두려운 일이다. 설령 제국의 지배자라 할지라도 마음의 난 상처 앞에선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너는.”
막 돌아서던 쥬다스의 등 뒤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불쑥 이어졌다.
“이미 죽어버린 꽃을 위해 물을 준 적이 있느냐.”
쥬다스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전생에 함께 살던 메이드 미카가 죽은 후 소원나무 앞에서 울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때 프리드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에게 물었었다. 왜 미카의 죽음에 화를 내지 않느냐고.
“해동은 내게 있어 죽은 꽃을 담고 있던 화분이다.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이유도, 물을 줄 필요도 없어.”
“아뇨, 폐하.”
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황제는 전생의 자신과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위스는 젊은 나이부터 피로 물든 황좌에 앉아 감정을 숨기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대의를 생각해야만 했고 만인이 그의 행보를 주시했다.
그 몸서리쳐지게 아픈 고독과 도망가고 싶은 심정을 쥬다스도 알고 있었다.
“그 꽃이 폐하께 특별하였다면 억지로 잊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던 것인지 돌아보자마자 시선이 마주쳤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화분은 작지 않습니다.”
“작지 않다?”
“예. 꽃은 졌어도 뿌리가 살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을 주면 지금이라도 새 꽃이 다시 피어오를지도 모르지요.”
쥬다스는 그리 말하며 빙긋이 웃어주었다.
“꽃은 당장 피지 않았어도 언제든 피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 레위스의 굳건한 가면에 미세한 금이 갔다. 자신이 하윤 리의 죽음을 외면한 사이 아이가 직접 어미의 누명을 풀고 진실을 밝혀냈다. 물 한 모금 주지 않아도 아이는 죽지 않고 버텨냈고 모두에게 칭송받는 군주의 후계로 자라났다.
황제는 안도함과 동시에 이 순간조차도 ‘황제’일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회의감을 느꼈다.
한번 제어를 잃은 감정은 범람하는 강물처럼 그의 마음을 적셨다.
쥬다스가 자리를 떠난 후에도 황제의 무너진 표정은 쉽사리 감추어지지 않았다.
‘너는……. 어째서 내게 그리 웃어주는 것이냐.’
수년 전, 어린 쥬다스를 후계로 적합하지 않다 판단하였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
그건 결국 비뚤어진 애정이었을 뿐이다.
* * *
황궁에 복귀한 지 한 달 가까이 지났을 무렵, 쥬다스의 앞으로 초대장이 하나 날아왔다.
정식 루트를 통해 전달된 초대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녹색 바람이 물고 날아온 초대장이었다.
「이그레트, 이거!」
유니는 품에 꼬옥 쥐고 온 하얀 편지봉투를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양족 꼬마가 네게 전해달래.」
“양이라면 키리에를 말하는 게로구나.”
「응응. 노래 부르는 여자애.」
키리에는 미드가르드 노예시장에서 만나 제국으로 이주해 온 양 수인족이었다.
목소리에 감정을 동화시키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쥬다스의 후원 하에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그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돌 키리에.’
최근 그녀를 수식하는 단어는 우상을 뜻하는 ‘아이돌’.
아름다운 외형과 목소리로 순식간에 마음을 홀리는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열광했다. 아직 그녀의 노래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은 사람은 없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그녀는 음유시인처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고 가는 곳마다 두터운 팬층을 만들어냈다. 이제 키리에의 노래는 루바르잔 제국에서 새로운 유행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쥬다스는 반가운 마음으로 유니가 전해준 초대장을 열어보았다.
<경애하는 주인님께.>
“원 녀석, 고집도……. 이런 호칭은 사용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편지를 작성하는 양식과 글을 쓰는 방법 등은 분명 그가 후원을 위해 붙여준 스승으로부터 배웠을 테지만 제일 중요한 호칭 문제가 남아 있었다. 쥬다스는 노예시장을 철폐하고 노예들을 제국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그들의 주인이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키리에는 꿋꿋이 그를 주인님이라 불렀다. 어떻게 보면 명령에 따르지 않는 태도가 되는 것임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작부터 그에게 난감함을 선사한 초대장은 단순명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콘서트를 연다는구나.”
「콘서트? 음악회를 말하는 거야?」
제국에선 노래를 부르는 걸 딱히 직업으로 인정하는 풍조가 아니었다.
시와 노래를 읊으며 떠돌아다니는 음유시인들조차 돈을 번다는 목적보다는 예술을 추구하고 방랑하며 세상을 여행하는 목적이 강했다.
돈을 주고 감상하는 음악이라 하면 보통 귀족사회에서 우아하게 즐기는 악기 연주회 정도였다.
평민들은 노래를 즐기기보단 생계를 이어나가느라 바빴다.
“평민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음악회인 모양이야. 수련생이 아닌 가수로서 여는 첫 콘서트라 내가 꼭 와줬으면 한다는구나.”
「가수! 재밌겠다요!」
살찐 고양이처럼 나태하게 늘어져있던 토니가 확 몸을 일으키며 안색을 밝혔다.
궁에 돌아온 이후로는 딱히 흥미를 끌 만한 요소가 없어 지루해하던 참이었다.
「에, 음. 뭐 구경이야 가도 좋겠지만. 이제 여기서 함부로 나갈 수 없는 거 아니야?」
“지난번처럼 여행까진 무리더라도 잠깐 외출하는 정도는 괜찮아.”
어차피 유니가 곁에 있는 이상 어디든 오고 가는 데에 오랜 시간을 잡아먹지 않으니 노래를 감상하고 올 여유는 있을 터였다.
“날짜는 다음 주, 보름달이 뜨는 저녁이라 한다. 그 아이가 어떤 노래를 부를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구나.”
쭈그려 앉은 채 초대장을 들고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유니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근데 이그레트.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지금 뭐 하는 거야?」
평소 같았으면 차분히 독서를 할 시간이었지만 쥬다스는 지금 나무가 가득한 정원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바닥을 가득 메운 낙엽들 사이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살피던 참이었다.
유니가 그를 보며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카니가 대신 상냥한 어조로 대답해 주었다.
「책갈피를 찾는 중이래요.」
「책갈피?」
“하하, 단풍이 아주 예쁘게 들었지 무어냐.”
마침 노랗게 물든 은행잎 하나를 주워든 그가 초대장 사이에 이를 끼웠다. 들고 나온 책 사이사이에는 이미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이 들어차있었다.
명령 한 마디만 하면 금은보화를 녹여 만든 최고급 책갈피를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달라진 듯하면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자신들의 계약자를 물끄러미 쳐다본 유니가 킥킥 웃었다.
「응, 예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25장 : Kyrie'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6월 마지막 주의 시작이기도 하네요. 이제 곧 7월... 이젠 정말 한여름이네요. *_*!
그럼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ㅎ
(오늘 밤에 이어서 남은 분량 다 올리겠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