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16화 (21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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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Kyrie

그날 저녁, 쥬다스는 초대장을 다른 친우들에게도 공개했다.

키리에가 초대한 건 쥬다스뿐만이 아니라 그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대상이었다.

일상적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러 왔다가 뜬금없이 콘서트 초대장을 눈앞에 둔 바이칼이 포크를 입에 문 채 중얼거렸다.

“공연이요? 적혀 있는 장소가 마침 수도의 강변이라 멀리 나갈 필요는 없겠네요.”

귀족들의 우아한 음악회와 다르게 키리에가 공연장으로 잡은 장소는 홀이 아닌 널따란 강변 한복판이었다.

“뭐 저야 멀든 가깝든 상관없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바이칼은 쥬다스와 에단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예상대로 에단은 무척 반대하고 싶어 죽겠는 얼굴을 하고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주군의 결정에 토를 달기 어려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단장을 대신해 바이칼이 한숨을 푹 내쉬며 나섰다.

“환궁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다시 궁 밖으로 나가시는 건, 어흠,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직 용태가 완벽히 좋아지신 게 아니라 지금은 쉬셔야 할 때입니다.”

보고서 작성과 쥬다스가 해야 할 밀린 업무를 돕는다는 핑계로 아직 자택으로 돌아가지 않은 크리스티나도 진지하게 한마디 거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쥬다스는 일전 미드가르드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바람에 심하게 상했던 몸 상태를 아직 회복 중에 있었다.

더 이상 아프진 않았고 상처도 말끔히 나았지만 사람의 건강이란 아무리 좋은 약과 술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기계 고치듯 뚝딱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귀환 후 한 달간 무리한 일정을 잡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이거 참. 누가 들으면 중한 환자인 줄 알겠구나.”

“……중하지 않았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곡을 찌르다 못해 매섭기까지 한 에단의 낮은 질문에 쥬다스는 난처하게 손을 내저었다.

“으음. 그런 게 아니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이젠 본래의 건강을 거의 되찾은 상태라 걱정할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친우들의 걱정은 그가 보기에 과한 감이 강했다.

지난 여행을 다녀오면서부터 그의 주변인들은 극히 안전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바라보듯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늘 그를 바라보았다. 호들갑도 그런 호들갑이 없었다. 과보호로 치자면 그의 네 정령왕보다 더 막강했다.

“아무튼 모처럼 초청까지 받았으니 산책 삼아 다녀올 생각이야. 되짚어보면 우리가 그동안 함께 공연을 감상한 적은 없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그들은 군신관계이기도 했지만 믿음을 나눈 친우이기도 했다. 학교를 다닐 적엔 학업에 바빠 음악회나 서커스 같은 공연을 보러 갈 시간이 없었고 졸업 후엔 각기 맡은 업무를 해결하느라 더욱 염두에 두지 못했다.

노는 일도 놀아본 이들이 잘 노는 법. 모범생 축에 끼는 그들은 기껏해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학교 축제에 참가해 구경한 정도가 다였다.

묘하게 설득력 있는 한마디로 모두를 굴복시킨 쥬다스는 다음 말로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실은 이번 공연이 무척 기대되는구나. 여유가 된다면 다들 같이 다녀왔으면 좋겠어.”

“……따르겠습니다.”

초대장만 봤다면 모를까, 저 기대감 가득한 표정을 보고도 반대를 고집할 수 있는 이는 자리에 없었다.

에단마저 잘 익은 곡식처럼 고개를 숙여 버리자 따라서 크리스티나도 공연을 보러가는 일에 동의했다. 그걸 본 바이칼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양어깨를 으쓱였다.

“아!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 전하.”

매실을 설탕에 담가 만든 장아찌를 후식으로 입에 쏙 집어넣은 그가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일정 잡혔습니다.”

“응?”

“그 왜, 저번에 약속하셨던 거요.”

그제야 바이칼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감이 잡힌 쥬다스가 나직하게 웃었다.

이럴 때보면 바이칼도 평소엔 에단에게 눌려서 그렇지 한다면 하고야마는 성격이었다.

“가면 파티를 말하는 게냐?”

“예입. 수요 조사 좀 미리 해봤는데 생각보다 참석자가 많더라고요. 가을이라 다들 쓸쓸해서 그런가?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일정이 빨리 잡혀 버렸습니다.”

“그걸 진짜로 한다고?”

에단이 황당하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약속할 당시 상황이야 너무 급박하기도 했고 정신이 없어서 그러려니 보고 지나쳤는데 진짜로 가면 파티를 기획하고 있을 줄은 직속상관인 그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에단에게 먼저 경과를 알렸다간 당장에 멱살 잡혀 중단될 게 뻔했기에 바이칼은 소리 소문 없이 주도면밀하게 파티를 준비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수의 귀족이 그가 준비한 가면 파티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진짜로 하지 그럼 가짜로 합니까? 전하께서 친히 약속해 주신 좋은 기회인데요.”

“전하. 혹 언짢으시다면 취하해 버리십시오.”

얄짤없이 가면 파티에 대한 약속을 무시해 버리라는 에단을 보며 바이칼이 펄쩍 뛰었다.

“안 됩니다! 벌써 참여자 명단도 정해졌고 장소 예약도 다 해놨다고요!”

“자네가 가서 직접 즐기면 되겠군.”

“제가 즐기려고 여는 파티가 아니잖습니까!”

급기야 울상을 짓기 시작한 그에게 쥬다스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약속대로 참석할 것이니 너무 걱정 말 거라.”

“하오나 전하.”

가면 파티에는 미혼의 젊은 귀족남녀만 초대되며, 주최자 외엔 아무도 참여자 명단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품위를 지키거나 일반적인 파티 예절을 따를 필요도 없었다. 남성과 여성, 고위층과 하류층 등으로 무리를 나누어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접근해야만 하는 황실무도회와 다르게 그곳에선 편안한 마음으로 뒤섞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육체적인 관계만 노리는 불손한 목적을 가지고 오는 이들도 있었으며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겐 다소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장소기도 했다.

에단은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해도 차기 군주인 쥬다스를 그런 곳에 보내기 영 꺼려졌다.

무엇을 하든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는 걱정 많은 수하를 보며 쥬다스는 그저 태연하게 답해주었다.

“내가 가진 지위가 상대보다 더 높다고 하여 모른 척 취하한다면 그게 어찌 약속이겠느냐. 이는 약속이 아니라 기만이니, 나는 너희를 기만하고 싶진 않구나.”

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에단은 속으로 천근만근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신경 쓰이는 일정이 두 개나 늘었다.

당장 다음 주에 있을 콘서트와 그 뒤로 이어질 가면 파티. 얼핏 평범한 놀이문화와 같이 들리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게 쥬다스인 게 문제였다.

모시는 주군과 부하가 동시에 벌려놓는 판에 에단은 젊은 나이에 허리가 굽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건 언제라고?”

“어, 단장도 참석하시게요? 두 달 뒤입니다.”

지금이 한창 가을이었으니 두 달 뒤는 계절상 겨울이 왔을 무렵이다.

‘그러고 나면 슬슬 새해인가.’

쥬다스는 새삼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12살로 깨어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여덟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니.

마냥 어린아이 같았던 주변 친우들도 전부 이젠 제법 어른스러운 태가 나고 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는 경탄이 나올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이미 살 만큼 살아봤다고 생각한 그 자신조차도 아이들과 속도를 맞추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전보다 자주 웃었고 슬플 때엔 눈물 흘리는 법도 알게 되었다. 홀로 결론을 내기 어려운 고민이 생기면 터놓고 의논하기도 했으며 지금처럼 무언가를 기대하고 설렐 수도 있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후 몸이 자라면서 이전 삶에선 자라지 못했던 억압된 내면도 함께 자란다는 사실이 못내 신기했다.

“나도 갈래.”

언제부터 들은 건지 청룡 가야가 불쑥 창문을 통해 들어오며 당당히 끼어들었다.

「와, 귀도 밝다. 가야 너 황궁 무사들이 수련하는 수련관까지 갔었다가 이쪽 얘기가 더 재밌어 보이니까 돌아온 거지?」

그쯤 되면 천리안도 아니고 천리이라는 둥 감탄하며 유니가 가야 주변을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쫑알거렸다.

실제 청룡의 오감은 일반적인 생명체와 다르게 발달해 있었다. 평소에는 인간보다 조금 더 잘 보고 듣는 정도였지만, 필요하다면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 떠드는 소리도 명확하게 도청할 수 있었다.

“가야 님, 그리 다니시면 창문 망가집니다. 다음부터는 문으로 들어오십시오.”

식사 시중을 맡고 있던 시종 로한이 차분히 가야의 잘못을 지적했다.

어지간한 무관이나 귀족들도 무서워서 말을 못 붙이는 신수 청룡이었지만 로한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할 말을 다했다.

용이든 신수든, 궁에 온 이상 예법을 지켜야만 했다.

“미안. 급한 마음에 실수했어. 다음부턴 문으로 들어올게.”

가야는 순순히 사과했다. 청룡씩이나 되는 위대한 존재가 일개 시종에게 미안해하는 장면을 다들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로한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그가 짓밟고 들어온 창틀을 깨끗이 닦기 시작했다.

“으음……. 가야. 어딜 가고 싶다는 뜻이었느냐?”

“음악회도 갈 거고 파티도 갈 거야. 여기 너무 심심해.”

본래 이리저리 쏘다니는 걸 좋아하는 동물계 정령이었으니 황궁 생활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해동에 있을 적에도 청룡을 비롯한 사방신수는 계약자를 두고도 궁궐에 주구장창 머무는 게 아니라 산과 들로 나돌아 다니곤 했다. 가야가 지금 멀리 떠나지 않고 궁 안에서만 설렁설렁 돌아다니는 이유는 그만큼 현재 계약자에 대한 애착이 깊기 때문이지만, 건수만 있다면 흥미로운 사건을 찾아 돌아다닐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동방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가야에게 루바르잔에서 열리는 음악회라든지 가면 파티 같은 건 무척 생소하고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래, 같이 가자꾸나.”

“응. 갈 때 놓고 가지 말고 꼭 불러.”

“그나저나 가야. 요즘 통 안 보이던데 식사는 하고 다니는 게야?”

“별로? 안 먹어도 돼. 나는 신수니까.”

특별히 몸을 회복시켜야 하거나 맛을 느끼고 싶은 게 아니라면 먹지 않는다.

신수는 자연의 정기를 흡수해 살아가기 때문에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여기 음식 좀 느끼해. 아무것도 안 바르고 소금만 친 통구이 같은 거 먹고 싶어.”

고기와 과일에 꿀과 버터를 발라 구운 걸 보고 식겁한 뒤로 가야는 통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심지어 야채 스프에도 치즈가 들어갔다. 가야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아침에 잼 바른 모닝빵 말고 굴비고추장 비빈 밥에 우거지된장국 먹고 싶다…….”

“저런. 여러 측면에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해동의 요리법을 찾아보마.”

“고마워, 주인.”

가야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동방국가에서 살아온 신수가 적응하기엔 제국은 음식문화부터 시작해서 건축물, 생활양식까지 너무나도 달랐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 역시 제국에선 무척 눈에 띄는 하늘색 도포차림이었다. 본체가 청룡인 이상 마음만 먹으면 의상을 바꿀 수 있었지만 가야는 지금이 훨씬 편하다며 바꾸지 않았다.

“아, 그리고 이건 플루비 집사에게 주는 선물.”

“예?”

휙!

갑작스레 날아든 보따리를 가까스로 받아 든 바이칼이 황당한 눈으로 이를 내려다보았다.

“플루비 옷이야. 이제 날씨도 슬슬 추워지는데 애를 그렇게 홀딱 벗겨 놓냐.”

“거, 무슨 와이번이 옷을 입는다고…….”

보따리를 풀어보니 그 안에서 앙증맞은 크기의 빨간색 후드 망토가 한 벌 나왔다.

“이거 애들용 아닙니까?”

“애잖아.”

“사람 애가 아니잖아요.”

“지금 종족 차별하냐?”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바이칼은 주섬주섬 옷을 꺼내 플루비에게 입혔다.

후드 망토라 팔다리를 넣을 필요도 없이 목에 둘러주고 앞에 단추만 잘 여며주면 되었다.

보기엔 시장 지나가다 대충 아동복을 하나 집어온 것 같은데 어째 사이즈가 맞춘 듯 딱 들어맞았다.

심지어 빨간색이라 푸른 비늘인 플루비에게 잘 어울리기까지 했다. 바이칼은 문득 억울한 심정으로 가야를 향해 따져 물었다.

“아니, 근데 제가 왜 플루비 주인이 아니고 집사입니까?”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늦었습니다. ㅠㅠ; 죄송합니다.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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