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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Kyrie
“엉? 몰랐냐?”
가야는 오히려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주인이라고 하면 네가 플루비보다 위에 있다는 뜻인데. 전혀 아니잖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플루비는 바이칼을 유독 잘 따르고 좋아하긴 했지만 딱히 명령을 듣는 태도까진 아니었다. 귀찮을 땐 불러도 오지 않았고 짜증 나게 굴면 잇자국이 남도록 손을 콱 깨물기도 했다.
바이칼은 새삼스럽게 충격받은 눈으로 품에 안고 있던 플루비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그를 올려다보던 주홍빛 눈망울과 딱 시선이 마주쳤다. 와이번의 긴 꼬리가 한 차례 살랑거렸다.
‘좋아! 네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원하는 걸 들어줄게!’
반짝반짝 빛나는 큼지막한 눈동자가 꼭 그리 말하는 느낌이라 바이칼이 울컥 소리쳤다.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고! 전부 제가 해주는데요!”
“이열~ 훌륭하게 수발들고 있구만.”
“……크흑.”
자기가 생각해도 ‘주인’보단 ‘집사’쪽에 무게가 쏠리자 바이칼은 말을 잇지 못하고 좌절했다.
그러자 그의 어깨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간 플루비가 께륵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암만 그래도 용족은 아무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요 꼬마 와이번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삐잉.”
전혀 자부심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대가리니 뭐니 하며 혐오스럽게 느꼈던 때보다야 녀석과 친해진 지금이 훨씬 좋았다.
바이칼은 제게 익숙하게 볼을 비비는 플루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짜식이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그렇게 엉아가 마음에 들었디?”
“걔 여자앤데?”
“…….”
바이칼은 더 이상 생각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 * *
공연 당일.
쥬다스는 약속했던 인원들만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에단, 바이칼, 크리스티나, 그리고 청룡 가야까지. 눈에 보이는 인원은 그 정도고 그 주변을 자연계 정령들이 철두철미하게 가호하고 있었다.
어차피 멀리 나갈 게 아니라 수도에 잠시 다녀오는 일정이었기에 그들은 몹시 간소한 차림으로 성을 나섰다. 배낭이나 말 따윈 필요 없었다.
성에서 나와 죽 이어진 큰 길을 따라 펼쳐진 크고 화려한 영토가 바로 루바르잔의 수도 엘리.
그리고 수도를 끼고 흐르는 큰 강 건너편에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교황청 엘리시움이 있다.
“워, 날씨 끝장나네요.”
바이칼이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감탄했다. 가을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은 하늘은 무척 새파랬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대로 가득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양산을 쓴 여인과 엄마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 파라솔을 펼쳐 야외장사를 개시한 음식점, 사랑하는 연인에게 줄 선물을 고르러 온 사내 등 각각의 하루가 모여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마차도 사람이 많은 거리에선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으며 길목마다 배치된 경비대가 도난사건을 접수한다든지 미아를 돌보는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맘마! 아슈쿠림!”
“아이스크림? 안 돼. 오늘은 이미 하나 먹었잖니.”
“흐에엥.”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가 아이스크림 마차 앞에서 떼를 부렸다.
아이 엄마는 집에 가면 달콤한 초콜릿을 주겠다, 자꾸 울면 경비아저씨들이 와서 이놈 한다 등 회유에서 협박까지 동원해 봤지만 우는 애한텐 씨알도 안 먹혔다.
결국 그녀는 서럽게 엉엉 우는 아이를 억지로 품에 안고 아이스크림 마차 앞을 떠날 수 있었다.
힘들게 떠나가는 뒷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 쥬다스는 문득 자신도 어렸을 때 저랬을까 싶어 상념에 잠겼다.
‘……기억이 안 나.’
전생엔 갓난아기일 적부터 부모가 없었으니 떼를 부릴 대상이라곤 계약하기 전부터 그 곁을 지키던 정령들이 전부였다.
차가운 눈밭에서 살아남고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익힌 건 전부 그들의 도움이었다.
그게 계약으로 이어지고 죽 함께 지내면서 다 크고 나서도 늙어죽을 때까지 정령의 손을 탔으니, 그에게 있어 정령이란 피는 이어지지 않았어도 진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자.”
“……?”
불쑥 눈앞에 민트색 성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성이 아니라 콘과자 위에 구불구불 쌓아올린 아이스크림이었다.
가야가 어느 틈에 사온 건지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계속 쳐다보길래.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주인도 참.”
그래서 보고 있던 건 아니지만 쥬다스는 일단 가야가 성의껏 사온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었다.
“민트 초코맛이래. 뭔 맛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초코보다 상큼하다는데.”
“아.”
“역시 그냥 초코가 나았을까?”
“아니, 충분해. 고맙다.”
초코가 알알이 박힌 민트색 아이스크림은 확실히 상큼하긴 했다.
계약자에게 감사인사를 받은 청룡은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 휘파람을 불어댔다. 자신이 도움이 되었단 사실이 굉장히 뿌듯해보였다.
「야야, 이거 불량식품이잖아. 막 사다 주면 어떡해!」
“뭐 어때. 가끔은 불량한 것도 먹어줘야 위장이 튼튼해지는 거야.”
「와앙? 그런 거였다요?」
「아니거든! 토니 넌 또 뭘 넘어가고 있어!」
「으응, 이번엔 좋은 뜻이기도 했고 특별히 몸에 나쁜 건 아니니까 넘어갈게요. 하지만.」
쥬다스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앉아있던 카니가 후후 웃었다.
「한 번만 더 상의 없이 저지르면, 그땐 똥을 입으로 싸게 만들어줄게요.」
「…….」
“…….”
카니 저 무서운 아이. 토니의 볼을 잡아 뜯고 있던 유니가 중얼거렸다.
저들끼리 왁왁거리면서 나름 친해지고 있는 정령들을 부드럽게 응시한 쥬다스의 입가에 웃음기가 맴돌았다.
‘저들의 눈엔 나는 아직 어린아이나 다름없겠지.’
정령들은 언제부턴가 그를 챙겨주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는 늘 정령들을 아이처럼 대했지만 그건 정령이란 존재 자체가 워낙 순수하고 귀여웠기 때문이다.
제대로 따지자면 저들은 어떤 생명체보다 오래 이 세상을 살며 지켜온 어른이었다.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 가지고 호들갑 떠는 귀여운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잔잔히 웃고 있던 그는 고개를 돌려 에단에게 말을 건넸다.
“키리에의 공연은 저녁달이 뜰 무렵에 시작한다 하였지. 그동안 시간이 좀 남겠구나.”
“예. 햇볕이 뜨거우니 실내에 들어가 쉬시겠습니까?”
가을이긴 해도 한낮의 태양빛은 꽤 강렬했다. 아직 회복기에 있는 그가 강한 열기를 고스란히 받으며 걷기엔 힘들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에단이 휴식을 제안했으나 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몸이 상했던 건 사실이나 여직 환자인 건 아니란다.”
“하면.”
“모처럼 나들이를 나왔으니 놀아야지. 다들 자유 시간에 해보고 싶었던 일이나 가보고 싶었던 장소는 없느냐?”
“저요! 저 있습니다.”
그의 세 친우들 중, 노는 얘기에 가장 빠삭한 건 역시 바이칼이었다.
“도박해 보고 싶습니다.”
에단의 표정이 흡사 악귀처럼 변하자 바이칼은 잽싸게 가드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뇨! 불법도박 말고요. 혹시 게임 카페라고 아십니까? 최근 유행하는 문화인데요.”
“게임 카페?”
최근 제국에선 차와 케이크만 시켜놓고 얌전히 대화하는 카페와 다르게 시끄럽게 떠들며 친구들끼리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카페가 새롭게 유행하고 있었다.
바이칼은 바로 그 최신 유행 시설에 대해 일장 읊어대며 일행을 유혹했다.
“비용은 음료 값만 내면 되고요. 입장할 때 인원수대로 똑같은 양의 게임머니를 받습니다. 그 게임머니를 걸고 카드나 보드를 이용해서 노는 겁니다. 게임머니 다 쓰면 탈락! 음료수나 빨면서 손 터는 거죠.”
“불건전한 문화는 아닌 것 같군.”
“어휴! 건전하다마다요. 이게 지금 얼마나 유행인데요. 단장, 진짜 못 들어보셨습니까?”
“모른다.”
오로지 검술과 차후 주군을 보좌해야 할 정계에 대해서만 관심을 둔 에단은 오락 문화에 대해선 아예 무지했다.
무리 지어 노는 활동에는 일절 관심을 꺼버리는 크리스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철벽을 눈앞에 둔 바이칼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코를 긁적였다.
“뭐 사실 별로 기대는 안 했습니다만. 너무 당당하게 모른다고 하시니까 좀.”
“당당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최근 유행하는 놀이시설도 죄 섭렵할 정도인 걸 보아하니 그동안 열심히도 뺀질거리고 논 모양이군.”
그 말에 바이칼이 뜨끔하여 시선을 쥬다스에게로 돌렸다.
“어떠십니까? 쥬다스 님도 도박게임은 즐겨보신 적 없으시지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흐음. 도박이라.”
점점 험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쥬다스가 흥미를 보였다.
“유행을 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사로잡았기 때문인 게지. 어떤 곳인지 궁금하구나.”
바이칼은 제가 판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동아줄을 하나 붙잡은 사람처럼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렇죠? 궁금하시죠? 재미는 제가 보장합니다. 짱짱한 게임들로다가 다 알려드릴게요!”
신난 바이칼을 제지하고 싶긴 했지만, 딱히 다른 놀 거리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는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야는 어차피 루바르잔의 문화 자체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멀뚱히 지켜보다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
에단의 말마따나 훈련을 빼먹고 열심히 뺀질거린 덕에 바이칼은 수도에서 가장 크고 인기 많은 게임 카페를 이미 뚫어놓은 상태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카페주인은 바이칼의 얼굴을 알아보고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와 새끼. 이게 얼마만이야? 다른 가게로 단골 옮긴 줄 알고 형 실망할 뻔했다.”
“에이, 그럴 리가. 근데 형이 지금 그런 말 하면 나 이따가 맞아죽어.”
“왜?”
“다음에 설명할게. 아으으. 제발 모른 척 좀 해주라.”
친해도 보통 친한 게 아닌 듯 서로 말까지 놓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얼씨구, 하는 추임새가 절로 입안에 맴돌았다.
‘하. 단골? 돌아가면 훈련 강도를 높여야겠군.’
그간 마법기사라고 좀 풀어줬더니 어지간히 놀고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놀아도 플루비나 데리고 나가 비행훈련을 시키는 줄 알았더니 훈련은커녕 도박장에서 비행이나 일삼았나 싶어 절로 주먹이 근질거렸다. 에단은 속으로 오늘 일과를 마치면 기사단 전체를 소집하여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카페 주인은 잡담을 멈추고 일행을 한 테이블로 안내해주었다.
“자, 여기 앉아. 근데 친구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게임 카페 와본 적 있어?”
다짜고짜 반말로 물어보는 직원을 향해 당황스러운 시선이 쏠렸다. 그 반응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카페 주인이 넉살좋게 웃었다.
“아하하! 표정 보니까 초보구나. 여기선 서로 말 놓는 게 룰이야. 나는 베르너. 나이 상관없이 호칭이 ‘형’이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니들도 편안히 대해줘.”
파격적인 컨셉이었다. 규율과 예법에 엄격한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적응하기에 이 게임 카페는 너무나 험난한 장소였다.
그러나 가장 적응이 어려워야 할 쥬다스는 오히려 곧장 편안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좋아. 그래서 무슨 게임을 할 건데?”
“글쎄? 우리가 저놈 빼고 다 초보라. 형이 가벼운 걸로 하나만 추천해줘.”
바이칼마저 말문이 막혀 버릴 정도로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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