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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Kyrie
게임머니를 전부 배분해 준 베르너가 이내 씩 웃으며 게임 종류를 설명해 주었다.
“초보자가 즐기기에 좋은 게임이야 많지. 운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카드게임, 민첩성이 생명인 스피드게임, 상대를 죽고 죽이는 전략게임, 땅따먹기 게임, 힌트를 모아 범인 잡는 추리게임.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들어?”
“난 골치 아픈 건 싫어.”
가야는 단도직입적으로 미리 못을 박아두었다.
평소에도 문제가 생기면 일단 몸으로 부딪치고 보는 청룡이었다. 그는 복잡하게 생각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게임이라도 딱 질색했다.
“운발 게임하자.”
“아니 그러면 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가야 님은 신…….”
신수니까 하늘의 천기를 읽을 수 있지 않느냐고 따지려던 바이칼은 카페 주인 베르너의 눈치를 살피며 어물어물 말을 바꾸었다.
“신께 귀의한 몸이시라면서요.”
“엥. 내가?”
“조만간 사제가 되러 엘리시움에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뭐?”
“아무튼 저는 공평한 추리게임과 땅따먹기게임 추천합니다.”
졸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비 사제가 되어버린 가야는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바쁜 카페 주인 베르너는 그들이 고른 게임들을 꺼내 놓고 간단한 설명을 한 후 다른 손님들을 맞으러 사라져 버렸다. 대신 단골이 될 정도로 게임 카페에 많이 와본 준전문가 바이칼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은 차근차근 게임을 배웠다.
학업과 검술 측면에선 천재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이었지만 게임은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적응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
게임 규칙과 승리를 위한 전술 전략 등은 쉽게 익혔지만 문제는 심리전이었다.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그 나이 또래들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얍삽한 수법이나 치사하게 함정을 파고 뒤통수를 때리는 전략에는 취약했다.
늘 전나무처럼 올곧게 행동하는 에단, 그리고 얍삽한 수는 품위 없다고 여기는 크리스티나는 융통성 있게 임해야 하는 전략게임에서 매번 뒤통수를 맞았다.
“눈에는 눈, 똥에는 똥으로 대응하셔야죠. 그렇게 자꾸 정직하게 구시면 안 된다니까요?”
“……이 비열한.”
“예, 비열해지셔야합니다. 게임은 이기면 장땡이거든요.”
모처럼 에단을 놀려먹을 수 있게 된 바이칼은 씨익 웃으면서 주사위를 굴렸다.
“크아! 이걸 어쩌나, 또 인수해 버렸네요. 랜드마크 건설합니다?”
“…….”
그들이 지금 하는 게임은 땅을 구매하여 건물을 짓고 세계 제일의 부호가 되는 게임이었다.
기껏 공들여 건물을 지어둔 도시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자 에단은 허무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런 상관을 두고 바이칼이 그 자리에 건물을 새로 올렸다.
“이제 이 도시는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와, 봤어? 저 비열함. 쟤한테는 정치 맡기면 안 되겠다.」
「제 생각은 반대예요. 저런 사람한테 맡겨놓으면 나라를 엄청 잘 발전시키지 않을까요? 욕은 좀 먹겠지만요.」
쥬다스의 양어깨를 차지하고 앉은 유니와 카니가 동네 아낙들처럼 수군거렸다.
현재 게임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건 바이칼이었고, 꼴찌는 부관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만 에단이 차지했다. 쥬다스는 그냥저냥 평타를 유지하고 있었고 크리스티나는 나름 꾸준히 땅을 정복하여 자산을 모으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의외네. 전하라면 처음 하는 게임도 모조리 재패하실 줄 알았는데.’
바이칼은 에단을 놀려먹으면서도 쥬다스를 힐끗거리며 생각했다.
적응을 못하는 건 아닌데 생각보다 성적이 특출하진 않았다.
함께 학교를 졸업한 친우들은 그가 1등을 하지 못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물론, 생각지도 못한 목적을 위하여 일부러 뒤처지는 경우는 간혹 있었다.
‘설마 이번에도……?’
바이칼의 생각과 달리 쥬다스는 나름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승패를 떠나 같은 상황에서 아이들이 각자 어떤 수를 쓰나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지고 있어도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다.
쥬다스 일행과는 대각선에 위치한 테이블이었는데 구성원 나이가 십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으로 비슷한 수준이고 인원도 똑같이 5명이었다.
“……어때?”
“완전 샌님들인데?”
“게임 좀 할 줄 아는 일반인 하나랑 초보자 넷. 선수는 없음.”
그들은 마치 약하고 어린 짐승을 노리는 하이에나 무리처럼 군침을 삼켰다.
근방에선 질 나쁘기로 꽤나 유명한 불량배 무리였다. 게임 카페의 모든 도박은 가짜 돈을 걸고 하는 건전한 문화였지만 그 틈새를 찔러 실제 도박판도 함께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쥬다스 일행을 지켜보고 있는 무리는 게임 초보자들을 꾀어내어 실제 도박판으로 데리고 가 홀딱 벗겨 먹는 악질적인 꾼들이었다.
머리색을 바꾸고 간편한 차림으로 나오는 등 외출에 신경을 쓴 쥬다스 일행이었지만 그들이 걸치고 있는 고급 의상이며 절도 있는 동작에서 풍기는 귀족적인 냄새까진 감출 수 없었다.
한동안 주변 테이블에 앉아 추이를 지켜보던 불량배들은 결국 그들을 오늘의 타깃으로 정했다.
길고 긴 건달 생활을 통해 발달한 촉은 부유하면서도 아직 세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귀족자제를 물색할 줄 알았다.
문제는 그냥 귀족자제 정도로 여겼지, 설마하니 황태자 일행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헤헤, 여자 예쁘다. 비싼 공방에서 파는 인형 같아.”
“미친놈아, 여자는 건드리면 안 돼. 저 초보자들 돈만 뜯자고.”
“걱정 마. 저런 도도한 여자들 특징이 뭔 줄 알아? 막 대하는 거 좋아해. 워낙 아무나 예쁘다고 잘 대해주니까 다정함에 질렸을 거거든.”
불량배들은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려 하는 줄도 모른 채 저들끼리 낄낄거렸다.
“잘 봐. 저렇게 자상하게 대해 봤자 소용없다고.”
크리스티나를 목표로 삼은 남자가 손가락으로 일행을 척 가리키자 다른 불량배들이 기대 어린 시선을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하필 비용이 큰 땅에 걸려 파산 직전에 처한 그녀가 차마 돈을 빌려달란 말은 꺼내지 못하고 눈동자만 떨고 있었다.
“파산입니까? 크리스티나 님?”
“…….”
“파산이죠? 돈 없으시죠? 예? 예?”
큰 땅의 소유자인 바이칼은 쉴 새 없이 깐족거리며 그녀를 약 올렸다. 곁에서 보던 에단마저 표정이 팍 구겨질 정도의 극심한 깐족거림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울컥했다가 이내 시무룩해지던 순간이었다.
“이걸 쓰려무나.”
“……!”
“게임에서 돈을 빌리는 건 전혀 창피한 일이 아니란다.”
그리 다독거린 쥬다스가 선뜻 제 몫의 게임머니를 내놓았다.
별로 열심히 한 것 같진 않은데 요리조리 표 나지 않게 띄엄띄엄 땅을 사들이고 건물을 지어놓아 제법 모아둔 게임머니가 많았다.
다른 이가 호의를 베풀었으면 자존심에 걷어찼을 크리스티나였지만 상대가 쥬다스인 이상 반응이 손바닥 뒤집히듯 달라졌다.
“감…… 사합니다.”
그녀는 조신하게 게임머니를 받아들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봐야 볼을 발갛게 물들인 홍조는 감출 수 없었다.
이를 본 구경꾼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닌 것 같은디?”
“그러게. 누가 봐도 저 자상한 애한테 호감이 있어 보이는뎀?”
“그, 그렇지 않아! 호감은 개뿔, 착각이다!”
씩씩거리며 현실을 부정한 남자가 가장 먼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섰다.
하는 수 없이 나머지 불량배들도 건들거리며 그를 따라 일어나 걸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가까이 다가갔지만 쥬다스 일행 중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도도한 여자는 막 대해야 좋아한다’고 주장한 남자가 막 투지를 불태우던 크리스티나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끈 순간이었다.
“잠깐……?”
휘익, 쿵!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어졌다. 말도 채 꺼내기 전이었다.
등부터 바닥에 꼬라박힌 사내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끼고 눈물마저 찔끔 흘렸다. 흐려진 시야로 굽이치는 푸른 머리카락이 보였다. 언뜻 바다를 연상시키는 빛깔과도 같았지만 윗부분은 챙이 넓은 나들이용 모자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가라앉는 머릿결 사이로 싸늘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멋대로 손대지 마. 천박하긴.”
“크헉.”
뒤늦게 당황 섞인 기침이 튀어나왔다.
하늘하늘한 레몬빛 원피스에 가려 나약하게만 보였던 소녀의 몸 어디에서 저리도 강한 힘이 나왔는지 의문이었다.
가장 나이도 많고 우두머리격인 청년이 재빨리 그들 일행을 재판단했다.
‘귀한 집 아가씨가 호위도 없이 이런 곳에 왔을 땐 역시 그 이유가 있게 마련이지.’
같이 온 일행이 실력자들이든지, 그녀 자체가 잘 훈련받은 무인이든지. 무엇이든 좋지 않은 결론이었다.
사실 하다못해 일행 중 에단을 건드렸어도 이 정도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테지만 여자라서 만만하게 보고 크리스티나부터 건드린 게 불량배들의 실수였다.
우두머리는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시비를 걸려던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
“무슨 용무지?”
에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그의 허리춤에 걸린 두 개의 검을 발견한 불량배들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어쨌든 그들과 싸우려는 게 목적은 아니었기에 우두머리 청년이 최대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친구들, 제대로 된 게임을 즐기고 싶지 않아?”
“친구?”
에단은 그저 되물었을 뿐이지만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심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본 불량배 다섯이 동시에 움찔했다. 잠깐의 침묵 후 말을 꺼낸 청년이 다시 유들유들한 어조로 대꾸했다.
“어. 뭐 황제폐하의 크신 은혜 아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수도 엘리에선 모두가 친구지. 안 그런가, 친구들?”
“암! 그렇고말고.”
“근데 여자한테 얻어터진 놈은 친구라고 하기 좀 부끄럽다.”
일행에게 접근한 무리는 괜히 나섰다가 망신을 당한 동료를 저들끼리 거하게 비웃었다.
“아무튼 좋은 정보를 나누어주고 싶어서 그래. 이런 애들 놀이터 대신 진짜 어른들의 놀이터를 가보고 싶지 않나?”
그들은 슬슬 본론을 꺼내 들었다. 에단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어른들의 놀이터?”
“그래. 화끈한 놀이터지.”
카페 주인에게 걸리지 않도록 자연스러운 태도로 테이블에 손을 짚은 청년이 은밀하게 제안했다.
“진짜 도박게임. 어때?”
“…….”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단은 당장 검을 뽑아 저들을 벌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을 거쳤다.
그들이 말하는 건 불법 도박장을 뜻했다. 지금처럼 게임머니를 가지고 순수하게 경기를 즐기는 도박이 아니라 진짜로 큰돈이 오고가는 도박장. 일정 금액 이상 현찰을 걸고 도박을 하는 행위는 불법이었다.
“아무나 알려주는 정보는 아니야. 우린 수준 있는 사람들만 초대하거든.”
불량배 하나가 윙크를 날리며 손가락으로 돈을 뜻하는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한마디로 돈 있는 사람들만 도박장에 초대한다는 뜻이었다.
귀족은, 즉 돈이다.
한번 도박을 맛본 귀족은 쉽게 그 맛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부유한 평민이라 해도 귀족만큼 돈을 쏟아 붓진 못했다. 수도에서까지 간 크게 사업장을 벌릴 정도니 이미 공공연하게 귀족들 사이에선 불법도박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빠져들지 않더라도 이미 참여자 명부에 이름이 들어간 이상 함부로 윗선에 찌르지도 못하게 되므로 잡힐 확률이 적었다.
불법도박장은 한 군데를 잡는다고 해서 근절하지 못할 정도로 무척이나 조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진짜 도박은 이런 애들 장난과 다르지. 한번 경험해 보면 반드시 그 맛에 중독될 거야.”
에단은 먼저 행동하지 않고 주군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쥬다스는 잠자코 테이블에 한 손을 얹고 턱을 괸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게임을 즐길 때나 다름없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어때. 이번 기회 놓치면 다신 못 가볼지도 모른다?”
불량배들의 작태는 영락없이 사탕을 내밀며 순진한 아이들을 꼬드기는 유괴범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쥬다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거 기대는 되는데, 좀 의심스럽구나.”
“응? 우린 수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지레 찔려 발뺌하려던 청년의 말허리가 싹둑 잘렸다.
쥬다스는 여전히 턱을 괸 채 심드렁하니 말을 이었다.
“무언가에 중독 되어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찌르는 듯한 금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일동 침묵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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