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20화 (22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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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Kyrie

“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건물을 나온 후 바이칼이 연신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뒷일은 어련히 황실기사단이 잘 처리하겠지만 이번 사안이 단순히 도박장 한 군데만의 문제는 아니리란 생각이 엄습한 까닭이었다. 비단 그만의 생각이 아니라 도박장이 돌아가는 행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전원이 같은 짐작을 해냈다.

그 정도 규모의 놀이터라니, 저건 막대한 운영 자금과 무수한 인력을 굴리는 거대 조직이다. 고위 귀족과 더불어 그 뒷배를 봐주는 세력이 분명 존재했다.

“저 녀석들, 뭔가 뒤가 구린내가 나는데요. 살살 구슬리든 고문하든 해서 배후를 잘 캐내 보면…….”

“구린내라, 좋은 표현이로구나.”

뜬금없는 부분에서 칭찬을 받게 된 바이칼이 머쓱하게 코끝을 훔쳤다.

쥬다스는 발길을 돌리지 않은 채 계속 걸으며 말했다.

“하지만 빛나기만 하는 나라는 없단다. 사람이 모인 곳엔 어딘가 꼭 구린내가 나게 마련이지.”

조금 전까지 냉혹하게 기사단을 투입해 도박장을 진압하라 명한 사람답지 않은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최고의 인재양성기관이라 불리는 루바흐. 그리고 이 제국을 다스리는 자들이 모이는 황궁. 너희가 보기엔 어떠했느냐?”

“그건.”

쉽사리 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니, 답은 알고 있어.’

바이칼과 에단, 크리스티나는 같은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장 눈앞에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쥬다스만 보아도 답은 나왔다.

그가 예시로 든 두 장소는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라 칭송받았지만 그다지 아름답기만 한 것도, 위대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찬란한 햇살처럼 아름다운 추억이었던 순간이 다른 어떤 이에겐 캄캄한 밤에 숨통을 조르던 끔찍한 악몽으로 기억되기도 했다.

사람이 모인 곳은 똑같다. 천민이든 귀인이든,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결국 빛나기만 할 수는 없다.

“그게 옳은 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분명 바뀌어야 하고 깔끔하게 고쳐져야 할 부분이지. 그건 이를테면.”

“으음.”

“변소 같은 거란다.”

“예?”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뜬금없이 튀어나온 변소 타령에 모두 놀란 아기사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더러운 오물이 싫다 한들 사람으로 하여금 배변을 금할 수는 없어.”

“그…… 렇지요.”

“하지만 가는 길마다 아무 데나 오물이 널려 있으면 그건 너무 더럽질 않겠느냐.”

“더, 더럽죠.”

가까스로 의식에 흐름에 따라 대답하고 있던 바이칼은 문득 자기가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혼란에 빠져 눈동자를 떨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똥을 더럽다 욕할 게 아니라 나라의 변소를 지어주는 게지.”

“……!”

그제야 확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와 닿은 바이칼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그보다 한발 앞서 탄식하는 중이었다.

‘초점을 맞춰야 할 건 오물 따위가 아니라.’

오물을 배설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당연히 위에서 군림하며 나라를 더럽히는 치들을 벌하고 구석구석 빛을 나누어주는 것을 정치라 여겼던 이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개념이 세워졌다.

그들이 멍하니 상념에 잠긴 사이 쥬다스가 가벼이 덧붙였다.

“조만간 루바르잔이 쌓아 방치해 둔 오물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땐 명령만 하십시오.”

바이칼은 장난스레 씩 웃었다.

“아주 끝내주는 변소를 짓겠습니다.”

보란 듯 호언장담하는 말에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덧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낮과 저녁의 경계에 걸친 시간대에 뜨는 달은 이제 막 봉오리를 피운 꽃처럼 여린 색을 띠었다.

저 멀리 어둠과 불빛이 뒤섞여 반짝이는 강이 보였다.

“참, 그러고 보니 쥬다스 님.”

“음?”

“정말로 무언가에 중독되어 보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아까 전 그가 불량배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쥬다스는 웃음기를 담아 되물었다.

“왜, 재미없어 보이누?”

“아뇨. 그래서가 아니라.”

“거짓말이야.”

“예에?”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다는 주군을 보며 바이칼이 입을 떡 벌렸다.

“끊으려야 도저히 끊을 생각이 들지 않는 걸 중독이라고 한다면.”

세상엔 도박이나 음주처럼 부정적인 중독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중독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너희들을 놀……. 아니, 함께 시간을 보내며 노는 것도 중독이라 할 수 있겠지.”

‘방금 놀린다고 하려시던 것 같은데.’

아이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쥬다스는 모르는 척 다시 말을 이었다.

“햇볕 좋은 날 산책하는 것도 좋고. 책을 읽는 시간도 버릴 수가 없고. 박하사탕도 여직 끊을 수가 없고.”

그가 끊지 못하는 것들 중에는 전생에서부터 이어온 취미나 입맛도 있었다.

그는 과거와 현재, 모든 부분이 전부 자신의 것임을 인정했다.

“이런. 말하고 나니 완전히 욕심쟁이 같구나.”

“……조금 더.”

묵묵히 뒤를 따르던 에단이 문득 제 목소리를 내었다.

“좀 더 욕심내셔도 됩니다.”

“음?”

“차라리 전하께서 많은 걸 욕심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쥬다스가 어린 날 가졌던 공허한 눈을 기억했다. 환상 속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은 눈이었다.

그런 에단을 마주본 쥬다스는 이제 더 이상 그가 어린 소년이 아님을 깨달았다.

열아홉, 이미 성년식을 마친 시기. 쥬다스의 눈에는 한없이 어리게만 보였지만 아이는 착실히 자라 어느 틈엔가 뒤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가 가진 검은 눈동자는 딱딱해 보이지 않았다.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수 있는 따뜻함이 그 안에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쥬다스는 조금 놀랐다.

‘어느덧 읽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졌구나.’

가을하늘처럼 청명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고맙다, 에단.”

어둠이 내린 강가 한복판에 환하게 불을 밝힌 무대가 보였다.

미리 예고를 하고 손님을 끌어모은 공연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 불빛을 보고 모여든 사람은 별로 없었다.

텅 빈 무대에 양 뿔이 달린 청초한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구불구불 등허리를 덮는 레몬빛 머리카락과 하얀 프릴로 장식한 귀여운 미니드레스가 잘 어우러져 꼭 강가에 떨어진 천사를 보는 듯했다. 의상이며 분위기까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일행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키리에.’

무대에 선 키리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살며시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쥬다스가 무대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마치 마법처럼 그녀의 눈이 떠졌다. 겁에 질려 떨고만 있던 노예소녀는 그를 본 순간 함빡 웃음을 머금었다.

아.

탄성과도 같은 맑은 목소리가 다홍색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걸 시작으로 키리에는 마치 친구에게 하는 다정한 속삭임처럼 반주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물도 아닌

―50골드라는 이름표를 단 소녀는,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건도 아닌 것을 파는 ‘시장’이란 곳에서 자랐어요.

노래는 바로 그녀 자신의 이야기였다. 특별한 반주도 없이 흘러나오는 단조로운 노랫소리를 듣고도 홀린 듯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가 바라야만 했던 소원은

―구속이란 이름의 행복.

―하지만 정말로 행복했다면 왜 소녀는 단 한번도 ‘싫어’라고 말할 수 없었을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다지 슬픈 가사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정적을 깬 건 갑자기 무대를 감싸고 피어오른 연기였다. 동시에 귓가가 멍멍해질 정도로 큰 음악이 터져 나왔다.

키리에는 이젠 슬픔이 주체가 아니라 기쁨을 담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래알이 파도에 휩쓸리듯 같은 감정에 휩쓸려 열광했다.

노래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 무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타인의 감정을 움직이는 노래라니, 역시 대단하구나.’

이럴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쥬다스는 새삼 감탄했다. 그녀의 노래는 상상했던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사람은 타인과 교감할 때 애정을 느낀다.

노래를 통해 기쁨과 슬픔, 모든 감정을 전이시키는 키리에는 그 목소리를 듣는 관객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녀였다.

“와줘서 고마워요.”

노래가 끝날 무렵, 그녀가 속삭이듯 말하며 웃었다. 순수한 애정이 가득 담긴 감사인사였다.

관객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지만 키리에가 바라보고 있던 건 단 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미소를 지어 그녀의 인사에 화답했다.

머리 위로 떠오른 커다랗고 둥근 달마저 반짝이는 박수갈채를 보내는 듯하였다.

무대는 이제 시작이었다.

아직 음악 소리가 끝나지 않은 강변을 뒤로 한 채 쥬다스 일행은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아무리 허가받고 나온 외출이라지만 밤을 새워가며 궁 밖에 있을 순 없었다.

돌아가는 길, 여전히 가슴을 쿵쿵 울리는 박자에 따라 휘파람을 불던 바이칼이 먼저 운을 떼었다.

“제가 진짜 음악엔 관심 없었거든요?”

“도박에 관심이 많았겠지.”

“……단장.”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억울해할 수도 없었다. 인상만 종잇장마냥 꾸깃거리던 바이칼은 푹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이건 진짜 순식간에 매료되더군요. 공연을 보는 순간만큼은 사랑에 빠진 기분? 내내 두근거려서 제가 미친 줄 알았다니까요.”

그랬던 게 공연장을 벗어나자마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꼭 한바탕 신나는 꿈을 꾸고 온 기분이었다.

바이칼은 진지하게 팔짱을 낀 채 단언했다.

“장담하죠. 키리에 녀석, 대박 날 겁니다.”

“이미 대박은 난 것 같은데.”

에단이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축제 현장처럼 바글거리는 강가를 턱짓했다.

간이로 설치한 공연장엔 남녀노소, 신분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든 상태였다.

그 많은 사람을 한마음으로 열광하게 만드는 소녀를 보며 쥬다스도 농담을 던졌다.

“사인이라도 받아둘 걸 그랬구나.”

농담치곤 제법 진지한 어투로 말하는 바람에 에단은 순간 돌아가서 사인을 받아와야 하나 내적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로 인해 새 공연 문화가 유행하겠군요.”

크리스티나도 이번 키리에의 공연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동안 공연이라 함인즉, 오로지 귀족을 대상으로 지은 근사한 홀에 모여 와인을 들며 고상하고 우아한 악기연주를 감상하는 형태뿐이었다. 때문에 남성들은 따분함을 느껴 공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관람료가 비싸 귀부인들 사이에서나 친목을 다지는 용도로 종종 찾았다.

이번 공연은 그 틀에 박힌 무대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유롭게 노래하고 감상할 수 있는 대중가요의 첫 시작이었다.

‘아직 이 나라에선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구나.’

비단 문화적인 성장만이 숙제가 아니었다. 낮에 제압한 도박장에 얽힌 검은 세력을 조사하다보면 또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우스갯소리로 변소 이야길 하긴 했지만 정말로 사회의 더러운 찌꺼기를 모아 합법적으로 관리할 체제가 필요했다.

「이그레트. 네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진 알겠는데.」

귀신같이 그의 생각을 읽어낸 유니가 고개를 저었다.

「수백 년이나 지속해 온 악습을 한순간에 바꾼다는 건 불가능해. 역대 황제들이 전부 몰라서 그냥 놔둔 게 아니야.」

“…….”

「그러니까 너무 다 짊어지려고 하지는 마.」

언뜻 매정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그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쥬다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섣불리 건드리면 부푼 고름을 터뜨리는 격이 되겠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속도를 맞추어 접근할 생각이었다.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이 거대한 제국의 공연 문화를 흔들기 시작한 키리에의 노래처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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