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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첫눈
가을을 닫는 비가 지상에 남은 온기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후, 젖은 낙엽 위로 찬바람이 불었다.
이제 아침 동이 트면서 창문에 서리가 함께 끼는 그런 계절이었다.
제법 싸늘해진 공기 아래로 전날 못다 내린 비가 진눈깨비가 되어 흩날렸다.
“어흐, 추워.”
하루아침 새 변덕스럽게 변해버린 날씨에 바이칼이 팔짱낀 자세로 바들바들 떨며 실내에 뛰어 들어왔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의상은 기사단 임무수행 중 입는 정복이긴 했지만 춘추 전용으로 통풍이 잘 되는 얇은 재질의 로브 종류였다. 머리에 달라붙은 반쯤 녹은 얼음알갱이를 툭툭 털어내던 그의 어깨에서 플루비가 폴짝 뛰어내렸다.
“삐이익.”
따뜻한 기온을 좋아하는 블루 와이번은 점차 추워지는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터운 카펫 아래로 버둥버둥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날개가 걸려 머리만 들어갔을 뿐 몸통은 여전히 밖에 남아 있었다. 보다 못한 바이칼이 플루비를 꺼내 담요를 둘러주려 했다. 하지만 추위에 떨던 플루비는 좀처럼 카펫 아래에서 머리를 꺼낼 생각을 않고 고집을 부렸다.
“야이 멍청한.”
“삐이!”
“날개가 꼈다고! 머리만 따뜻해지면 다냐!”
“쁘익! 삐에에엑!”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플루비를 카페트 아래에서 끄집어내는 데에 실패한 바이칼이 하는 수 없이 담요를 들고 와 푸른 등짝에 덮어주었다.
“오늘도 사이가 좋구나.”
“……전하. 와이번은 머리 좋아지는 교육 같은 거 없을까요?”
“글쎄, 지금도 충분히 영리해 보이는데 말이다.”
손수 주전자에서 따뜻한 음료를 컵에 따라 가져온 쥬다스가 이를 바이칼에게 건네주었다.
마침 진눈깨비를 잔뜩 맞고 들어온 바이칼은 감사히 컵을 받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초코였다. 컵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그나마 손바닥을 따스하게 달구어주자 살 것 같았다.
바이칼은 한숨을 푹 쉬며 핫초코를 홀짝였다.
찬바람 부는 바깥이 어찌나 추운지 마음 같아선 플루비처럼 카펫 밑에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날이 추워서 더 힘들었던 모양이야.”
“어으으, 말도 마십쇼. 어찌 된 게 단장의 괴롭힘이 점점 심해집니다.”
지난번 도박장을 다녀온 뒤로 에단은 곧장 기사단원을 소집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극악한 난이도의 훈련을 시행했다.
마법기사라고 종종 제외시켜 주던 고강도 훈련에서도 이젠 예외가 없었다. 바이칼은 쉬는 시간에 여가활동을 즐기고 온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이냐며 억울해했고, 에단은 그 절규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덕분에 최근 두 달간 기사단의 체력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나도 혹독했다.
“대체, 마법기사에게 검기사들이 하는 훈련을 똑같이 시킨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이러다 저 진짜 죽을 지도 몰라요.”
“저런.”
입으로는 안타까워했지만 정작 쥬다스의 표정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그래도 일단 받아주자 평소 에단에게 이를 갈고 있던 바이칼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가끔 단장이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호오, 그럼 무슨 종족 같으냐?”
“알고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가 아닐까요?”
“……아니다만.”
마지막 대답은 쥬다스가 한 말이 아니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기묘한 감각에 바이칼은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싸하게 굳어졌다.
“아쉽게 됐군.”
“다, 단장.”
“내가 악마였다면 자네에게 진정한 지옥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훈련 강도가 약했던 모양이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에단은 몰래 상관을 흉보고 있다 딱 걸린 부하에게 지옥까진 아니더라도 그 유사한 경험까지는 체험시켜 줄 의사가 충만했다.
기겁하여 고개를 붕붕 내젓는 바이칼을 불쌍히 여긴 쥬다스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최근 교황청에서 진명식을 열었다고 하더구나.”
“……진명식을.”
거의 바이칼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던 에단이 멈칫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반응했다.
진명식이란 신성을 국교로 믿는 루바르잔에서 15세 이하 아이들에게 ‘진명’이라 불리는 세례명을 부여하는 특별한 행사였다.
그들도 루바흐에 다닐 적에 교황으로부터 직접 진명을 받은 바 있었다.
원래는 매년 봄에 치르는 행사였으나 부득이한 경우로 정상적인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이렇듯 해의 마지막 시기에 교황청의 문이 열리기도 하였다.
“마침 기도를 위해 엘리시움을 방문하던 참이었는데.”
군주의 후계자라 하여도 결국 신의 피조물. 순례의 길을 마치고 돌아온 후 무사귀환에 대한 감사기도를 올리는 게 예법이었다.
그가 귀환한 지도 꽤 오래 지났으니 더 늦기 전에 교황청을 한번 방문해야 할 시기긴 했다.
“이번에 가면 후배 아이들도 만나볼 수 있겠어.”
“크흠. 뭔가 묘한 기분이네요.”
바이칼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쿨럭였다. 진명식을 받으러갈 때만 해도 그들은 지금 같은 사이가 아니었다.
당시 쥬다스는 ‘백로황자’라 조롱받을 시기였고 그러다 보니 충성은커녕 껄끄럽기만 한 대상이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고 심지어 바이칼은 같은 조원도 아니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만 긁적이던 바이칼이 문득 쥬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크리스티나 님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아, 그 아이는.”
크리스티나는 지금 특별한 업무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친위기사단으로 쥬다스를 늘 곁에서 호위하는 임무를 가진 에단, 바이칼과 다르게 그녀는 기사도 아니었고 집안의 작위를 이은 후계자도 아니었다. 가문을 잇는 건 그녀의 오라비인 알시오스 C.델피아의 몫이다.
“루바흐 학생부에 지원했더구나.”
“허어.”
의외인 소식이면서도 그녀라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바이칼이 한숨도 경탄도 아닌 애매한 숨을 뱉었다.
학생부는 루바흐를 총괄하는 핵심이자 졸업자 중에서도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던 자들만이 지원 가능한 부서였다. 학생부에 들어간다는 뜻은 곧 황실소속의 인재로 발탁된다는 의미.
그녀는 귀족영애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새 지위와 명예를 받아 황실을 위해 일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바쁠 게야. 안정적인 위치를 찾으면 곧장 찾아오겠다고 하였다.”
“예에, 뭐. 그분도 참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솔직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지. 거 애매한 성격이네요.”
“그 아이는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똑 부러지게 정하질 않느냐.”
“그렇긴 하지만 말입니다.”
‘정작 중요한 말을 못하시던데요.’
오죽하면 눈치 없기로 유명한 자신이 다 알아차렸을까 싶다.
바이칼은 뒷말은 꿀꺽 삼키고 물끄러미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모든 면에서 현명한 주군이 어째서 이런 쪽으로는 가능성을 절대 열지 않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끔 보면 모르시는 게 아니라 일부러 철벽을 치시는 건가 싶기도.’
비단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여성에 대해 쥬다스가 보이는 거부방식은 정말 상대를 싫어한다거나 마음에 안 든다거나 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모든 친밀한 관계에서 그는 한 가지 태도를 고수했다. 마치 어른이 아기를 예뻐하듯 그런 자상함.
아무리 아기가 예뻐도 성인남성이 아기를 보면서 설레지 않듯, 그리 대했다.
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던 바이칼이 손바닥에 주먹을 통 내려치며 입을 열었다.
“참! 그럼 다녀오시는 길에 파티에 참석하시면 시간이 딱 되겠네요.”
“……파티? 설마.”
에단이 먼저 그 뜻을 짐작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말이 나왔던 그 가면파티인가.”
“맞습니다. 단장도 기억하고 계셨네요. 흐흐, 아닌 척하시더니 역시 관심 있으셨…… 으악!”
괜히 깐족거리다 기어코 매를 벌고 만 바이칼을 보며 쥬다스가 작게 웃었다.
“교황청을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파티라. 겸사겸사 그러면 되겠구나.”
“그럼 일정을 조율해 보겠습니다.”
교황청은 수도 엘리와 바로 붙어있었지만 아무 때나 허가받지 않고 입장할 수는 없는 성역이다.
신께 올리는 기도도 기도였지만 그곳에는 개인적으로도 보고 싶은 벗들이 있었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은 것도 몇 가지.’
쥬다스는 교황청에서 해야 할 일들을 속으로 차근차근 정리했다. 아무래도 제법 바쁜 일정이 될 것 같았다.
* * *
성전 엘리시움.
마침 진명식을 맞은 기간이라 교황청의 포탈관리소는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한산하던 예배당에도 전부 불을 밝혔으며 혹시 모를 사건사고를 막기 위해 감시하는 성기사들이 빈틈없이 객들의 발걸음을 지켜보았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은은한 찬양소리만 울려 퍼지던 교황청에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이 찾아오자 고요가 깨졌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들끼리의 외출에 신이 난 상태였고 교황청의 큰 규모와 아름다움에 감탄하느라 바빴다.
그렇지만 사제들은 일 년에 한 번뿐인 이 소란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역시 아이들이 있으니 활기가 생기는군요.”
“귀엽기도 하지.”
“후후. 저대로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제들은 푸근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란 어른들의 시선처럼 마냥 귀엽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열 살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그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특히 귀족 출신인 아이들은 힘과 명예에 무척이나 민감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힘이란 결국 ‘인기’였다.
인기 많은 아이 앞에서 제 편이 없는 아이는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씨, 지겨워.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사제의 지시에 따라 예배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 중 한 소녀가 불만을 터뜨렸다.
교황청에는 진명을 받으러 온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러 목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엘리시움을 찾았고 자연히 진명을 받는 순서는 뒤로 미루어졌다.
지루함에 발끝으로 대리석바닥만 차던 아이들에게 다른 조 친구가 다가와 쑥덕거렸다.
“페르디온이 지금 대예배당 앞에서 모이자는데?”
“가자. 어차피 오늘도 땡이야.”
예배당에서 하는 일도 없이 이틀이나 기다리는 바람에 마침 지루해하던 두 아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한 아이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조별과제인데.”
“어쩌라고.”
“그렇게 자리에서 이탈하면 벌점이…….”
“뭐래. 벌점 조금 받는다고 안 죽거든? 하여간 쫄보 자식.”
“냅 둬. 저 자식 아슬란이잖아. 원래 책만 보는 찐따로 유명해.”
괜히 말렸다가 욕만 들어먹게 된 아슬란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올해 11살, 몇 달 뒤엔 곧 12살이 되는 그는 아이들 사이에서 힘이 없는 축에 속했다.
성적은 과목마다 일등 이등을 다툴 정도로 무척 좋은 편이었지만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탓에 친구를 거의 사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벌점 때문에 같은 조원들을 말리려던 아슬란은 한숨을 삼키며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더 말해봐야 먹힐 상대들이 아니었다. 조원들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듯 그 역시도 조원들을 탐탁지 않아했다.
‘이번 학기 성적은 잘 받기 틀렸네.’
친하지 않아도 팀을 위해 협력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조원들처럼처럼 놀기 좋아하고 점수에는 그다지 생각 없는 비협조적인 아이들도 있었다.
아슬란은 이번 진명식이 루바흐에서 수업 일수로 인정해 주는 조별과제인 만큼 이로 인해 깎이는 점수가 제법 클 것이라 예측했다.
“재수 없어.”
가장 먼저 일어선 소녀가 코웃음을 치며 친구들을 데리고 예배당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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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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