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22화 (22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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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첫눈

홀로 적막한 예배당에 남은 아슬란은 씁쓸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배낭을 뒤적여 챙겨온 교재를 꺼내 들었다.

‘수업을 빠지니까 예습이라도 해야.’

그러나 막상 다들 놀러나갔는데 혼자 남아 공부하려니 내키지 않았다.

아슬란은 망설이다 주섬주섬 다른 책을 꺼내 들었다. 필기와는 상관없는 책. 그는 소중히 책을 펼쳐 보았다. 지금껏 혼자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그려온 그림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는 빈 종이에 상상 속의 인물이나 동물 등을 주로 그려두었다.

그림은 모이고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게 바로 그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

‘어디까지 그렸더라.’

며칠 전 그리다 만 그림이 보였다. 그는 그 부분을 찢어버리고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에 닿는 소리만 고요한 예배당에 울렸다.

아슬란은 그 소리를 가장 좋아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순간이 가장 보람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이 무척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정교하고 섬세한 표현을 즐겨했다. 그러다 보니 한 장면을 완성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만 두 시간이 넘었다.

“휴우, 됐다…….”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하나 보구나.”

“……!”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아슬란이 그림을 끌어안으며 흠칫 어깨를 좁혔다.

예배당의 긴 의자에 누군가 함께 앉아 있었다.

예배당이니까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는 있지만 하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 외엔 아무도 관심 갖는 사람이 없었다. 이 와중에 자신의 그림을 남에게 보여줬다는 사실이 좀 창피하기도 했다.

놀람과 수치심, 걱정 등으로 물든 아이의 표정을 보며 상대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음, 미안하다. 훔쳐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옆에서 몇 번 불렀는데 답이 없어서 기다렸단다.”

‘기다렸다고?’

원래 아슬란은 한 번 집중하면 옆에서 뭐라 하든 잘 듣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 있곤 했다.

상대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자 그는 조금 경계를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은 끌어안은 채였고 낯선 이를 앞에 둔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교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그에게 있어 낯선 사람과 둘이 대화하는 상황은 고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쩐지 낯설기만 한 사람은 아닌 듯한……?’

상대방은 그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소년이었다. 아직 어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교복을 입은 학생도 아니었다.

소년에게는 금방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상함을 담은 금색 눈동자라든가, 고귀하다 못해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 은빛 머리카락이라든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슬란은 헉 숨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화, 황……!”

유일무이한 은발금안, 그 소문 무성한 황태자였다.

놀라 일어나긴 했는데 그러는 바람에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단 사실을 깨달은 아슬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손에서 그림을 그려둔 공책이 툭 떨어졌다. 허둥지둥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서 종이가 구겨졌지만 이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라몬가의 아슬란 라몬이 전하를 뵙습니다.”

“따지고 보면 선후배간이니 그리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쥬다스는 떨어진 책을 주워 아슬란에게 다시 내밀어주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을 받아 들자 부드러운 미소가 되돌아왔다.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본 적 없는 호의였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다시 쥬다스와 나란히 예배당 의자에 앉게 된 아슬란은 속으로 오만 가지 의문에 휩싸였다.

‘어째서 황태자 전하께서 여기 계신 거지? 수행원들은?’

힐끗 옆을 쳐다보니, 쥬다스는 정말 기도만 하러 온 사람처럼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그 혼자였는데도 무사태평한 기색이었다.

이쯤 되니 정말 황태자가 맞긴 한 건가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키리에.”

“예, 예?”

“나도 정말 좋아하는 가수란다. 노래가 아주 어여쁘지.”

기도를 마친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아슬란은 조금 당황하여 머뭇거리다가 그가 그림을 보고 하는 이야기인 걸 알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키리에 엘라이손의 팬입니다.”

아슬란이 아까 그렸던 그림의 주인공이 바로 아이돌 키리에였다.

며칠 전 우연히 학교에서 누군가 녹음해온 그녀의 노래를 듣고 반해 그 자리에서 팬이 되어버렸다. 마법구에 담긴 노랫소리는 직접 들을 때만큼 감정을 움직이는 힘도 없었고 음질도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듣자마자 푹 빠져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학교에서 유행한다는 놀이나 인기몰이 등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던 아슬란이었지만 키리에만큼은 특별했다.

그녀의 노래에는 눈물이 녹아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아픔과 상냥함이.

“이거 반갑구나. 나도 그녀의 팬이란다.”

“정말요?”

“정말이고말고. 얼마 전엔 공연도 직접 보러 갔었어.”

“우와!”

아슬란은 황태자를 직접 만났다는 사실보다 그가 키리에의 공연에 갔었다는 말이 더욱 놀라웠다.

11살 아이의 천진함에 웃고만 쥬다스는 차근차근 공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경청하던 아슬란은 망설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펼쳐보였다.

“진짜 키리에는 제 그림 따위보다 훨씬 예쁘지만…….”

흰 종이 위에 그려진 소녀가 새끼 양 한 마리를 품에 꼬옥 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따뜻해 보이는구나.”

특이한 감상이었다. 보통은 ‘잘 그렸다’거나 ‘실제랑 다르다’등, 그림에 대한 평가를 내렸지 지금처럼 온기를 느끼진 않았다.

게다가 우는 소녀를 보고 따뜻하다고 할 줄은 몰랐던 아슬란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자 쥬다스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키리에는 양 수인족이지. 그런 그녀가 작고 힘없는 새끼 양을 안고 함께 울어준다는 건 마치 자신의 어린 과거를 안고 보듬어주는 느낌이 들어.”

“아…….”

정확했다. 아슬란은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키리에는 따뜻한 노래를 부르니까요.”

두 사람은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런데 전하께선 교황청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신께 기도를 올리고.”

예배당이니 당연히 기도를 하러 왔다는 말에 아슬란은 아차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벗을 만나러 왔단다.”

“벗…….”

황태자가 ‘벗’이라 부를 정도가 되려면 어떤 사람일까. 아슬란은 무심코 그리 생각했다.

“한데 그 친구가 지금 좀 바쁜 모양이야.”

“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몰라 무얼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후배를 만나게 된 게지.”

“하…… 하…….”

아슬란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후배로 대해주는 쥬다스를 보며 조금 전 했던 생각을 철회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을 특별히 대하는 게 아니었다. 특별하지 않은 상대를 특별하게끔 만든다.

“다른 친구들은 어디로 갔느냐?”

그 물음에 아이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이 친구가 아니라는 점, 기다리라는 지시를 어기고 놀러 나가버린 점, 혼자 그 틈에 끼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점.

어느 하나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아슬란이 좀처럼 답하지 못하자 쥬다스는 빙긋이 웃어보였다.

“나도 루바흐를 다닐 적에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왔었지.”

“전하께서도…….”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쥬다스는 루바흐에서도 유명한 졸업생이었다.

최악, 최약의 상태로 입학하여 어느 순간 찬란한 날개를 펼친 백로. 2년간 전과목 수석은 물론 조기졸업까지, 그에 관련된 것들은 가히 전설로 남은 일화뿐이었다.

“그때 같은 조였던 아이들이 어땠냐면 말이다.”

“네.”

“‘자유시간마저 같이 지낼 필요는 없겠지’라며 자리를 이탈하곤 했단다.”

“……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아슬란에게 쥬다스는 비밀얘기를 나누는 친구처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신이 자리를 이탈하지 않게 하려면 그만큼 유익한 무언가를 알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지.”

“무슨.”

“같은 조원은 아니었지만 수업 때 강의 내용을 따라올 수 없을 거라 비꼬던 아이도 있었고.”

“어, 어찌 전하께 그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 아이들과 어찌 되었을 것 같으냐?”

“혹, 그들을 크게 벌하셨습니까?”

과거 황태자가 루바흐에서 발톱을 숨길 당시 도를 지나친 학생 몇을 그대로 재판에 회부하여 집안 째로 매장시켰다는 일화를 들은 적 있었다. 그래서 아슬란은 그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내게 그 누구보다 절친한 친우들이 되어 있단다.”

“……!”

도저히 어떤 과정을 거쳐 그리 되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나라면.’

아슬란은 무릎 위에 놓았던 주먹을 꾹 쥐었다. 자신을 비웃고 모욕하던 다른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저 역겹기만 했다.

‘나라면 절대 못해. 그 자식들과 친구가 되는 일.’

딱히 친구가 되지 않아도 학교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아슬란은 교사들 사이에선 이미 우수한 인재로 손꼽히고 있었고, 잘하면 조기졸업까지도 가능할지 몰랐다. 이 역겨운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반드시 조기졸업을 해내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던 아슬란의 귓가에 허탈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창피하게 옛날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바이칼.”

밤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긁적이며 예배당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달하고 왔습니다.”

“고맙구나, 에단.”

‘에단이라면 그 에단인가.’

에단 R.헤이가.

헤이가 공작의 외동아들인데다 황태자에게 검을 바쳐 루바흐를 졸업하자마자 최연소 기사단장으로 임명된 검술 천재.

루바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바이칼에 대해선 몰라도 에단의 이름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과연 실제로 보니 검에 대해 잘 모르는 아슬란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기세가 대단했다.

눈에 띄게 큰 키, 절도 있는 태도 등이 더욱 그를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아슬란은 꼭 교과서에 실린 위인을 보는 기분으로 쥬다스와 에단을 번갈아보았다.

“루바흐 학생?”

“……?”

그때 바이칼이 툭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런 질문에 아슬란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바이칼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 후배구만. 반가워. 바이칼이다.”

“아슬란 라몬입니다.”

조심스럽게 악수에 응하자 바이칼이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븡금 들은 근 잊으어.”

“……네?”

복화술도 아니고 이를 앙 다물고 웅얼거리는 소리에 아슬란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이를 향해 바이칼이 답답하단 표정으로 재차 강요했다.

“방금 전하께 들은 건 잊으라고. 창피하니까.”

그러자 에단이 쯧 혀를 차며 강제로 두 사람의 손을 떼어놓았다.

“있었던 사실을 잊게 만들 궁리나 하지 말고 반성이나 하도록.”

“에이씨.”

“씨?”

“씨…… 씻은 듯이 반성하겠습니다.”

아슬란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공방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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