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23화 (22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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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첫눈

쥬다스에 이은 에단과 바이칼의 합류로 적막하던 예배당은 제법 떠들썩해졌다.

바이칼에게 나름 장단을 맞춰주곤 있지만 에단은 본래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다. 대신 그 점을 보완할 존재가 하나 더 끼어 있었다.

“삐익!”

아슬란은 바이칼의 품속에서 툭 튀어나온 파충류의 머리에 기겁하고 뒤로 물러섰다.

“드, 드, 드래곤?”

“허어, 이 녀석이 무슨 드래곤이야. 와이번이다, 와이번.”

플루비를 예배당 바닥에 풀어준 바이칼이 어느 틈엔가 벽까지 도망간 아슬란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대체 이 쬐끄만 걸 보고 어떻게 드래곤을 떠올리냐?”

“그게, 책에서 본 모습이랑 똑같아서…….”

유리를 깎아 만든 것 같은 푸르고 투명한 비늘, 몸길이에 비해 짤막한 앞발과 앉은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통통한 뒷다리, 그리고 박쥐를 떠올리게 하는 날개와 긴 꼬리까지.

모습은 확실히 드래곤과 닮았지만 기껏해야 닭 한 마리 크기였다.

우물우물 변명을 하긴 했지만 아슬란 스스로도 겁을 먹었단 사실이 민망했기에 금방 입을 꾹 다물었다.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플루비가 커다란 주홍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막 잠에서 깬 꼬마 와이번은 양 날개를 부채 펴듯 쫘악 펼친 채 늘어져라 하품했다.

크기는 앙증맞았지만 주둥이 사이로 엿보이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플루비가 애완용 동물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플루비라고 한단다.”

아슬란이 와이번을 향해 호기심을 드러내자 쥬다스가 넌지시 이름을 알려주었다.

열한 살 소년은 몹시 상기된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이름이 플루비…… 군요. 혹시 그려도 될까요?”

“엉? 좋을 대로 해. 워낙 빨빨거리고 잘 돌아다니는 녀석이라 가만히 있진 않겠지만.”

플루비는 이미 신나게 예배당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마 전 플루비의 집사로 인정받은 바이칼이 대신 대꾸해 주자 아슬란은 펜을 입에 물고 연습장을 펼쳤다.

“괜찮습니다.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편이 그리기 편해요.”

“그래? 가만히 있어야 더 편한 거 아니야? 하긴 난 그림은 잘 몰라서.”

“저도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판에 박은 듯 똑같이 그리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사이 플루비는 성화가 타오르는 촛대를 신기한 눈으로 톡톡 건드려 보고 있었다.

아슬란은 꼬리를 살랑대는 와이번을 바라보며 흰 종이 위로 펜을 가져갔다.

“제가 그리고 싶은 건 ‘느낌’이에요.”

“느낌?”

“예. 지금 이 그림을 그리는 제가 느낀 느낌이요.”

아이들의 말은 가끔 너무 직관적이어서 어려울 때가 있다.

바이칼은 느낌을 그리고 싶다는 아슬란의 이야기에 난해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운동감각은 뛰어났지만 미술에 대해서는 바이칼과 그리 수준 차이가 나지 않는 에단도 역시 침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슬란은 이미 그림에 열중해 있었다.

끼이익.

와이번 낑낑 우는 소리, 펜 사각거리는 소리만 오묘하게 이어지던 예배당에 누군가 들어섰다. 오래된 경첩이 공기를 긁는 소리에 아슬란을 제외한 모든 이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어…….”

시원하게 드러낸 하얀 목선 위로 분홍색 단발이 찰랑거렸다.

머리 양쪽에 더듬이처럼 쪽머리를 내어 민트색 리본으로 묶어놓은 헤어 스타일이 앙증맞아 보였다. 양손으로 꼬옥 문고리를 잡은 채 멍하니 예배당 안을 쳐다보고 있는 소녀는 자그마한 체구에 유난히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진한 남색 교복 스커트가 무릎께에서 살랑였다.

“어어?”

소녀는 곧장 쥬다스를 알아보았다. 놀람이 깃든 크림색 눈동자는 동그랗고 큼직했다.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겨울바람 정령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눈알갱이가 섞인 바람을 훅 일으켰다.

서늘하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찬바람에 쥬다스가 잔잔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리베흐.”

“우아!”

그러자 놀라 굳어있던 소녀, 리베흐의 안색이 화악 밝아졌다.

“오빠다!”

“…….”

“앗, 아니지. 쥬다스 님…… 아니아니, ‘전하를 뵙습니다’?”

5년 전 루바흐에서 같은 정령학연구소 수업을 듣던 7살 꼬마 리베흐였다.

정령술사로서의 굉장한 자질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여전히 겨울바람의 정령 비비와 함께였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이젠 비비가 실체화하여 모습을 드러내고 다녔으며 다루는 힘도 한층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쥬다스가 자란 만큼 꼬마아이도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12살 소녀가 되어 있었다.

습관처럼 쥬다스의 호칭을 남발하던 리베흐는 입술을 오므리며 어색하게 치맛자락을 잡고선 꾸벅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자 꼭 다 자란 손녀딸의 재롱을 보는 기분이 된 쥬다스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원 녀석도, 갑자기 예의를 차리니까 내가 다 어색하구나. 이제 다 컸다는 게야?”

이제 수줍음을 탈 줄도 알게 된 리베흐는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내려 차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땐 아가였으니까. ……요?”

“되었다. 개인적인 자리에선 예전처럼 대해주렴.”

“진짜?! 그래도 돼? ……요?”

“그럼. 내게 있어 리베흐는 여전히 아가란다.”

“힝. 인제는 아가 아닌데.”

뚱하니 볼을 부풀린 채 꿍얼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기억 속 꼬마아이 그대로였다.

「어머. 예전의 그 귀염둥이네? 많이 컸다!」

「그러게요. 아이들이란 정말 빨리 자란다니까요.」

유니와 카니도 그녀를 알아보고 반가운 내색을 했다.

「어떨 땐 좀 아쉽더라. 좀 천천히 자라도 귀여울 텐데.」

「으응. 그렇지만 어리다는 건 약하다는 뜻도 되니까요. 얼른 성장하는 편이 생존엔 도움이 되겠죠.」

「괜찮아! 내가 지켜줄 거니까!」

「맞다요! 나요도 지켜줄 수 있다요!」

「……응? 지금 뭔가 대상이 한정적인 기분이 드는데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 처음부터 이그레트 얘기였는데.」

“…….”

본의 아니게 정령들의 대화를 엿듣는 꼴이 된 쥬다스의 표정이 다소 어정쩡해졌다.

그는 못 들은 척 리베흐와 밀린 안부 인사를 나누며 생각했다.

‘원래 정령들이 아이를 좋아하긴 하지.’

그래서 정령술사가 정령과 계약하는 시기는 대부분이 어린 시절이었다.

정령은 어린아이의 눈앞에 가장 잘 나타나고 어른이 되어갈수록 흥미를 잃는다. 한번 계약을 맺으면 죽는 그날까지 함께하지만 정령과 계약을 맺지 않은 채 어른이 되는 경우엔 아무리 자질이 충만해도 곁을 떠나버리곤 했다.

어른이 되든 노인이 되든, 심지어 다시 태어나서까지 늘 맹목적으로 정령의 사랑을 받는 존재는 ‘이그레트’가 유일했다.

정령왕들의 철통같은 수비로 계약을 하지 못했을 뿐 아직도 그의 곁을 맴도는 정령은 많았다.

‘생각해 보면 이들은 언제, 어떻게 나를 찾아왔던 걸까?’

쥬다스는 새삼스럽게 그 과정이 조금 궁금해졌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정령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당연시 여겼던 그들의 관계에도 당연히 첫 만남이란 게 존재했다.

네 정령왕 중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온 건 누구였을지,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건지, 한 번 궁금하기 시작하니 그물에 고기가 줄줄 올라오듯 여러 궁금증이 딸려 올라왔다.

그사이 리베흐는 루바흐에서 안면이 있었던 에단과 바이칼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에단 님, 바이칼 님도 안녕!”

에단은 가볍게 고개만 까딱였으나 바이칼은 가까이 다가가 소녀의 머리를 헝클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야, 꼬맹이! 많이 컸네.”

그런 바이칼을 물끄러미 올려다본 리베흐가 헤에 감탄사를 뱉었다.

“바이칼 님도 이제 다 큰 거야?”

“엉?”

“옛날엔 맨날 볼 때마다 에단 님한테 혼나고 있었는데. 헤헤, 철들었나봐!”

“내가 그랬냐…….”

12살 꼬마숙녀에게 듣는 과거지사에 바이칼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그를 더 슬프게 만드는 건, 리베흐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방금 전까지도 에단에게 한 소리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발전이 없잖아, 발전이. 크흑.’

그는 남몰래 눈물을 훔친 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리베흐에게 툭 질문했다.

“야, 꼬맹아. 너도 그럼 진명을 받으러 왔어?”

“응! 오늘 받았어.”

“벌써 받았다고?”

“유디모닉(Eudemonic).”

거침없이 그들 앞에서 진명을 밝혀버리는 리베흐의 당돌함에 바이칼이 기겁하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듣고 난 후였다.

그림에 집중하느라 누가 왔는지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아슬란도 마침 종이에서 펜을 떼고 그녀를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오! 미치겠구만.”

“왜?”

“꼬맹이. 진명받을 때 못 들었어? 이건 신과 교황 성하, 그리고 너 자신만 알고 있는 특별한 세례명이야.”

신권으로 내려진 ‘진명’은 유일하게 황권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었다.

심지어 황제조차도 강제로 교황청에서 내린 진명을 들을 권한이 없다. 진명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서 축복과 저주를 다룰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은 충성을 맹세한 주인, 사랑을 맹세한 부부 간이 아니면 진명을 밝히지 않았다.

“응, 들었어.”

“근데 그걸 홀랑 아무한테나……!”

“아무나가 아니잖아.”

리베흐는 맑은 크림색 눈동자로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그에겐 따뜻한 빛이 있었다. 분홍머리 소녀는 이른 아침 갓 떠오른 태양을 만난 해바라기처럼 함박 웃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쥬다스 님이 믿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허어.”

“그러니까 괜찮아.”

열두 살, 귀족 출신 학생들로 구성된 작은 사회, 루바흐에서는 그다지 어리고 순수할 나이가 아니다.

오히려 물들 대로 물들어 충분히 영악해졌을 법한 나이였다. 그녀보다 한 살 어린 아슬란조차 그들 사회에 역겨움을 느끼고 홀로 겉돌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베흐는 여전히 쥬다스를 처음 만났던 7살의 순수한 믿음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를 본 쥬다스는 문득 왜 정령들이 유독 어린아이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령들은 단순히 어리다고 해서 다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건 저런 올곧은 마음이겠지.’

어찌 보면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신성력도 마찬가지였다.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직관적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순진함을 가질수록 강한 신성력이 몸에 임했다.

영적인 존재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상대방을 믿고 사랑해 주는 그 마음이 좋은 것이다.

“리베흐.”

“응?”

살짝 비뚤어진 민트색 리본이 보였다. 쥬다스는 소녀의 머리카락에 달린 리본을 단정히 정리해 주며 말을 이었다.

“믿어주어서 고맙다. 하지만 앞으로는 진명을 이야기할 때 신중해야한다는 점을 잊지 말거라.”

리본은 깔끔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쥬다스가 리베흐보다 어른이긴 했지만 여자아이의 머리를 리본으로 묶는 일이 익숙할 만한 나이도, 그럴 지위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손길이 마치 여러 번 여아의 머리를 만져준 사람처럼 익숙하게 느껴져서 리베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건 네게 단 하나뿐인 소중한 이름이니 말이야.”

“으응. 알았어.”

“착하구나.”

그는 얌전히 대답하는 소녀의 머리를 가벼이 쓰다듬어주고 손을 내렸다.

분홍색 단발머리에 달린 리본이 무척 잘 어울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이네요. ^^

날씨도 선선하고 빗소리가 자글자글(?)해서 좋습니다.

비오는 날엔 역시 커피가 제 맛이 납니다.

게다가 부침개.. 치킨... 피자.... 짬뽕+탕수육..... 따끈한 음식이 안어울리는 게 없는 날이 또 비오는 날 아니겠습니까!! 크으.

내일도 비가 많이 온다하니 안전 유의하시고,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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