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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첫눈
리베흐는 문득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아슬란을 발견하고 그에게 총총 다가갔다.
“넌 누구야?”
“……저요?”
“응. 난 리베흐.”
무심코 자기 이름을 소개하던 리베흐는 앗 하고 다시 말을 고쳤다.
“리베흐 E. 그리젤!”
보통은 학교에서 가문명까지 소개하진 않지만 진명이 생겼으니 써먹고 싶어진 탓이다.
기분 좋게 풀 네임을 알려준 리베흐를 보며 아슬란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슬란 라몬. 진명은 아직…….”
“헤에. 네가 아슬란이구나? 이름 들었어!”
“날 알아요?”
“응. 문과부 1등.”
조금 쑥스러워진 아슬란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1등까진 아니에요.”
“스승님들이 그러시던데. 천재라며?”
“천재도 아닙니다. 그냥 책을 많이 읽어서 성적이 잘 나왔을 뿐이죠.”
다른 아이들이 친구와 놀러 다니는 동안 아슬란은 책과 하루를 보냈다.
자조적으로 대답하는 그를 보며 리베흐가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어깨 아래로 쏟아지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흡사 솜사탕처럼 달달해 보였다.
“신기하당. 난 책 읽는 거 무지 싫어하는데.”
“왜요?”
“재미없어.”
리베흐는 어릴 적부터 무척 영특한 아이였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고 해서 공부를 좋아하진 않았다.
리베흐는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것보다 바깥에 나가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발랄한 소녀였다.
“그치? 비비.”
「…….」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겨울바람 정령 비비가 생긋 미소 지었다.
계약자가 조용히 앉아 책을 읽든 밖으로 나가 뛰어놀든 정령에게는 아무런 상관없었다.
정령이 바라는 소망은 결국 계약자가 바라는 소망. 비비는 리베흐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정령…….”
아슬란은 상기된 표정으로 비비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정령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겨울바람의 정령은 인형처럼 작고 예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비비는 주변에 끊임없이 반짝이는 눈송이를 흩뿌렸다.
“예쁘다.”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리베흐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
이렇게 되자 어쩐지 리베흐에게 예쁘다고 한 기분이 되고 만 아슬란이 어쩔 줄 모르고 얼굴을 붉혔다.
두 꼬마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바이칼이 ‘이것들 봐라?’ 하는 눈으로 서 있다가 에단에게 속닥거렸다.
“크으. 귀엽네요. 단장, 우리도 몰랐을 뿐이지 학창시절에 저렇게 풋풋했겠죠?”
“내 기억에 자네가 학창시절에 연애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얘기 말고요, 이 양반아.”
풋풋한 학생 시절을 떠올리려 했더니 급 암흑기로 묘사해 버린 에단 덕에 바이칼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그사이 리베흐는 자신의 정령에게 예쁘다고 해준 아슬란에게 한층 가까워진 태도로 조잘거리고 있었다.
“정령은 다 예뻐.”
“그런가요?”
“응! 있지, 쥬다스 님 정령들도 완전 예쁜데. 봤어?”
“아뇨.”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께서 유명하신 이유 중 하나가…….’
아슬란은 리베흐의 조잘거림을 듣고서야 쥬다스가 4속성 정령의 계약자란 소문을 떠올렸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쏠리자 예배당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구경하고 있던 쥬다스가 작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화앗!
그러자 마치 보이지 않던 투명 커튼이 걷히듯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정령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발치에 길게 누워 있던 푸른 늑대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어깨며 머리에 자리한 자그마한 정령들도 보였다. 각자 강렬한 빛을 품고 있어 크기는 작아도 다른 정령들에 비해 존재감이 부각되었다.
“정령술사가 보는 세계는……. 이런 겁니까?”
아슬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마치 밤하늘에 박힌 별처럼 무수한 정령이 반짝이는 광경이 보였다.
함께 입을 벌린 리베흐가 바닥에서 열심히 기어 다니던 고슴도치 모양의 정령 하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달라. 모든 정령술사가 이런 걸 보는 건 아니야.”
바람의 자질이 매우 강한 리베흐는 평상시 바람에 관련된 정령들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그것도 늘 보는 건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씩 자연체로 노닥거리는 정령을 발견하는 날이면 축복이라도 받은 듯 기분이 좋았다.
정령술사는 보통 자신이 가진 친화력의 종류와 등급에 따라 정령을 본다. 바람과 불을 다루는 최상급 듀얼 정령술사로 알려진 코르토반 옌조차 모든 속성의 정령을 보진 못했다.
“굉장해. 이것 봐봐.”
“……고슴도치?”
“아마 땅의 정령일걸.”
“그런 건 어떻게 구분합니까?”
“싹이 나 있잖아.”
리베흐의 손짓을 따라 움직인 아슬란의 눈에도 고슴도치 머리에 달린 여린 새싹이 보였다.
‘머리에서 싹이 자라?!’
뿐만 아니라 날개가 달린 여우라든지, 파란 불꽃으로 짠 드레스를 입은 소녀 등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선 형태를 하고 있는 정령들이 보였다.
그들의 형상은 실체화를 가능하게 만든 쥬다스의 의지를 따른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의 눈에는 그저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환상적으로 보이기만 했다.
“히히, 귀엽다.”
감탄하는 리베흐의 곁에서 아슬란도 눈만 둥그렇게 뜬 채 굳어 있었다. 지금 잘못 움직였다간 이 모든 게 꿈처럼 깨어질 것만 같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정령이 여기 다 모인 것 같아!”
쥬다스는 손끝에 날아든 녹색 정령을 쓸어주며 태연히 답해주었다.
“나도 만나보지 못한 정령이 많단다.”
“쥬다스 님이 모르는 정령도 있어요?”
“여기에 있는 건 자연계 정령 중 일부일 뿐이야. 정령들도 각자 성격이 달라서 사람을 좋아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아이가 있는 반면, 사람 눈에 띄거나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도 있지.”
“꼭…… 사람 같네요.”
정령을 무지개나 오로라처럼 초월적인 현상쯤으로 이해하고 있던 아슬란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유니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코웃음 쳤다.
「헹. 우리가 사람 같은 게 아니라 원래 이런 거거든? 저게 우릴 뭐로 보고!」
「어머, 유니.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사실이에요.」
「뭬야?」
「우리의 계약자는 다른 종족보단 주로 인간이니까. 우린 계약자의 의지와 의식을 따라 형상화되고, 움직이잖아요.」
카니가 조목조목 이유를 짚어주자 유니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이 세상이 만들어진 직후 태어난 아주 초기의 정령들은 감정을 아무것도 몰랐다고 해요.」
「오아앙! 정말이다요?」
「네. 후후, 상상이 안 가죠?」
카니는 다른 정령들에 비해 옛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가장 늦게 태어났는데도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지식인지 한 번씩 이렇게 꺼내놓곤 했다.
신기한 건 유니도 마찬가지였지만 토니의 반응이 더 빨랐다.
「감정을 모를 수가 있다니. 그거 완전 바보 아니다요?」
「뭐래. 그 바보가 네 조상님이시거든.」
정령이 비록 후손을 남기는 구조가 아니라 해도 선대와 후대 간의 등급은 분명히 나누어져 있었다. 같은 정령왕이라 해도 후대가 앞서 태어나 선대를 살았던 이를 존경하는 건 당연했다.
왁왁거리기 시작한 두 정령을 앞에 두고 카니가 살포시 웃었다.
「웃는 법도, 우는 법도. 그리고 ‘사랑스럽다’는 감정까지. 전부 계약자로부터 배웠는걸요.」
자연은 생명의 어머니라 불리며 인간을 품어주었지만, 역으로 인간 역시 자연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 온기를 자연에게 전해주었다.
‘바람이 유니. 물이 루니. 땅이 토니. 그리고 불이 카니. 음……. 이러면 된 건가?’
굳이 계약하지 않고도 늘 같이 있었기 때문에 계약에 대한 욕심을 내지 않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그들과 계약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기쁜 마음에 일단 계약을 먼저 맺은 다음 이유를 물었더니 어렸던 그는 처음으로 어린아이답게 얼굴이 빨개져서 대답했었다.
‘……부러워서.’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한데.’
‘그런데도 사실. 다른 사람들이 질투 날 정도로 부러웠어. 나한텐 없으니까.’
그가 처음으로 욕심내 본 단어. 그들이 계약이란 이름으로 묶인 관계는, 단 하나였다.
‘고마워. 다들. 내 가족이 되어줘서.’
그 수줍은 고백을 듣고도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그들에게 단지 언제나 함께 있어줄 것을 바랐지만 그가 원했다면 어떤 바람이라도 들어줬을 것이다. 설령 세상을 유지해 온 절대적인 질서와 조율을 파괴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잘 보았구나. 정령도 마치 사람 같지. 이들도 서로 맞는 사람과 함께할 뿐이란다.”
“그럼 정령도 자기랑 맞지 않는 사람은 차별하는 겁니까?”
어쩐지 울컥한 아슬란이 대뜸 따지듯 물었다.
루바흐에 입학한 지 이제 겨우 일 년째, 그동안 아슬란은 학업에는 뛰어난 성과를 보였으나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엔 완전히 실패했다. 그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닐뿐더러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남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일을 하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들 사이에서 소외되었고 알게 모르게 차별당하는 일도 잦았다.
그런 상황에서 쥬다스의 말은 마치 자신을 비웃는 다른 학생들이 하는 변명처럼 들렸다.
괜히 꼬아 듣고 분개하는 아이를 보며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차별하여 남을 핍박하는 데에 집중하란 소리가 아니다.”
“그러면.”
“지금 힘들다면 억지로 너를 힘들게 하는 그들과 친해질 필요 없다. 서로 잘 맞는 사람들을 찾으란 뜻이야.”
마치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본 듯한 이야기에 아슬란은 어깨를 흠칫 좁혔다.
불안에 가득 찬 아이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쥬다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누군가를 싫어한다면, 그 역시 너를 싫어하게 마련이다.”
“……제가 먼저 싫어한 건 아니었어요.”
“그래. 상대가 너를 싫어했기에 네가 그들을 싫어할 수도 있지.”
그는 누군가를 탓하려는 게 아니었다. 일단 자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자 아슬란은 목구멍을 막고 있던 가시 같은 게 스르륵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는 서로 맞춰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단다. 전부 둥글게 같이 맞출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이상일 뿐이다.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서로 힘들기만 할 뿐이다.”
그 말과 함께 쥬다스는 주변을 감싸고 있던 힘을 거두어들였다.
훅,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정령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 시야에는 리베흐의 겨울정령 비비와 4속성 정령왕들만 남아 있었다.
이제 아슬란은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서있었다.
‘나랑 맞는 사람? 맞지 않는 사람? 그런 건 어떻게 구분해야…….’
그러다 문득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던 리베흐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눈을 접으며 맑게 웃었다.
그는 문득 그 웃는 얼굴만큼은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베흐…… 님은.”
“엑! 같은 학생끼리 무슨 님이야, 님은. 너 몇 살인데?”
“열한 살입니다.”
“난 열두 살. 내가 누나네. 귀찮으면 그냥 이름 불러.”
나이로 따지면 누나였지만 리베흐는 아슬란보다 키가 작았다. 소녀는 뚱하니 쥬다스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억울해.”
“뭐가?”
“원래 쥬다스 님이랑 나, 키 똑같았는데.”
“…….”
분명 그럴 때가 있긴 했었다. 그게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던 거지만 리베흐는 마냥 억울해했다.
“혼자서만 그렇게 크다니 반칙이야!”
“리베흐는 아직 어리잖니.”
“잘 먹고 잘 자면 큰다구 해서 믿었는데!”
그동안 리베흐는 그의 말에 따라 착실하게 편식도 안하고 끼니도 잘 챙겼으며, 아무리 재밌는 놀이를 하다가도 잘 시간이 되면 침대로 가 누웠다.
하지만 정작 자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또래 소녀들 중에서도 유독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그녀는 그 점이 가장 불만스러웠다.
“씨잉. 쥬다스 님 거짓말쟁이.”
그날, 쥬다스는 처음으로 아이를 달래는 데에 실패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