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5 / 0240 ----------------------------------------------
26장. 첫눈
한참 칭얼거리던 리베흐는 박하사탕을 하나 입에 물고서야 울먹이는 걸 멈췄다.
“그런데 꼬맹아.”
바이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리베흐를 불렀다. 그러자 아이는 사탕을 오물거리며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는 벌써 진명을 받았잖아.”
“응.”
“그런데 왜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남아 있어?”
“비비가 알려줬어. 여기에 쥬다스 님이 왔다고.”
바람의 정령은 여러 정령 중에서도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곧잘 했다.
겨울바람 정령 비비도 가끔 리베흐가 시키지 않아도 도움이 될 법한 정보를 미리 알아다 전해주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조원들은?”
“몰라. 어디 놀러간 댔는데.”
복귀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처럼 나온 외출을 최대한 즐기고 돌아가고 싶어 했다.
평소 같았으면 리베흐도 그 틈에 끼어 함께 놀러 다녔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하여튼 요즘 애들은 겁도 없네. 이 신성한 교황청 내부를 놀이터쯤으로 여기고 돌아다니다니.”
“진명식 이후로 정학 처분을 받았던 자네가 할 말인가.”
내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에단의 일침에 바이칼이 찔끔했다.
그들이 진명식을 받던 당시, 바이칼은 교황청에서 사령술사와 접촉한 혐의로 붙잡혀 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사령술사인 줄 모르고 학자로서 만났다곤 하지만 일이 잘못됐다면 큰 피해로 번졌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바이칼을 올려다보며 리베흐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정학? 왜?”
“으하하! 별거 아니야. 그냥 뭘 좀 잘못 알아서 생긴 해프닝이랄까?”
“뭘 잘못 알아? 누가 잘못 알았어? 별거 아닌데 왜 정학씩이나 받아?”
“……살려주세요, 단장.”
그러나 그의 상관은 매정했다. 차갑게 시선을 회피해 버리는 에단을 보며 바이칼은 실연당한 여인네처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까도 까도 양파처럼 끊임없이 나오는 자기 흑역사에 질린 그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바이칼 님, 울어?”
“크흡.”
“괜찮아. 살다보면 누구나 실수하는 거랬어. 반성하면 됐지 뭐.”
어깨를 토닥이는 작은 손바닥 때문에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던 쥬다스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보면 그때.’
새 삶을 살게 된 후로 옛 친우를 처음 만났던 날.
‘프리드는 왜 교황청에 왔었던 거지?’
당시에는 그냥 포탈을 건드리러 왔다고 여기고 넘어갔었는데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석연찮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때 프리드는 분명, ‘이그레트’의 존재를 몰랐다.
오랫동안 찾아다니긴 했으나 정작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조차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렇다는 건 ‘이그레트’를 찾는 것과 별개로 따로 꾸미고 있던 음모가 있었다는 뜻이다.
‘왜 하필 교황청 포탈을 노린 걸까.’
정령석을 모으는 게 목적이었다면 다른 루트를 통해서 보다 안정적으로, 많이 모으는 게 가능했다.
보안이 철통같은 교황청을 노린 까닭은 비단 포탈뿐만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쥬다스는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프리드를 직접 죽였다. 그 결정을 후회하진 않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은 남아 있었다.
‘네 얘기를 좀 더 들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옛 친우들과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그의 주변을 둘러싼 친우들과는 사뭇 다른 비틀어진 관계였다. 그는 그 점이 못내 안타까웠다.
과거의 그는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고 그런 그의 밑에서 자란 아이들도 역시 속내를 숨기는 일에 익숙했다. 그러다 보니 가슴속에 자꾸만 맞추어지지 않은 퍼즐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형제자매님들의 하루에 평안과 축복이 함께하길.”
상념에 잠겨 있던 사이 예배당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고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의 시선이 막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에게로 향했다.
리베흐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성녀님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자매님.”
“히히. 오랜만에 오빠들을 만났거든요.”
알겠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인 검은 머리의 여인이 초점 없는 눈을 들어 그들을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위그드라실.”
쥬다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성녀 위그드라실의 멍하던 표정에 상냥한 미소가 떠올랐다.
“……빛의 인도가 함께하는 분. 건강을 찾으셨군요.”
“덕분에.”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가진 활기를 감지해 낸 위그드라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계까지 찾아와 도움을 주긴 했으나 오래 교황청을 비워둘 수 없어 경과를 지켜보지 못한 채 돌아가야만 했다.
무사할 거라는 믿음과 별개로 걱정되는 마음이 컸던 그녀는 이제야 안심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런 성녀를 보며 쥬다스가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진즉 감사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늦었지요.”
“아뇨. 벗과 이렇게 다시 만나 말을 섞을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위그드라실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어조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도 함께 마음이 차분하게 정돈되었다. 그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간 밀린 안부 인사와 감사 인사를 나누었다.
“크릉.”
수호견 헤브라시스도 여전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수호견이 아슬란을 향해 눈길을 주자 성녀도 함께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아슬란 형제님이군요.”
“네, 네!”
긴장한 채 서있던 아슬란이 더듬거리며 답했다.
“진명을 받을 차례가 되어 안내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위그드라실은 헤브의 등에 손을 얹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느껴지는 기운은 낯익은 것들뿐이었다.
“세 분이서 한 조라고 들었는데.”
“아.”
다른 조원들은 오늘 진명식이 있을 줄 모르고 놀러나간 상태였다. 그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아슬란이 탄식을 터뜨렸다.
“그게.”
그들을 위해 변명을 해줄 이유도 없고 할 말도 없었다. 아슬란은 잠시 고민하다 사실만을 그녀에게 알렸다.
“지금은 이 자리에 없습니다.”
“그렇군요.”
다행히 위그드라실은 더 추궁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형제님.”
“저, 저만 가나요?”
당황한 아슬란이 묻자 성녀가 곧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조별활동 권장은 학원 루바흐에서 관리하는 규칙이지요. 제가 할 일은 차례에 따라 진명식을 진행하는 것뿐.”
“그럼 다른 조원들은.”
“한 번 자기 차례를 놓쳤다면 올해에는 더 이상 진명을 받을 수 없답니다. 다음 해에 다시 부름을 받는 수밖에요.”
교황은 차례를 지키지 않은 아이들의 편의까지 봐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기회를 놓치면 올해는 그걸로 끝. 다음 해 진명식에 다시 신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위그드라실은 아슬란을 데리고 예배당을 나갔다.
나가기 직전, 그녀는 쥬다스를 돌아보며 살짝 목례했다.
“나의 벗이여, 오늘 밤은 이곳에서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
뜬금없는 부탁을 남긴 채 성녀는 아슬란을 데리고 뒤돌아 사라져 버렸다.
자리에 남은 일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 뭐죠? 하루 묵고 가란 뜻인가?”
“……그런 것 같군.”
에단도 이해할 수 없는 성녀의 부탁에 미간을 좁혔다.
원래대로라면 성녀를 만난 후 교황청을 떠날 생각이었다. 굳이 교황청에서 하루를 묵을 이유는 없었다.
이유를 모르기는 쥬다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의문을 표하는 대신 다시 예배당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런, 외박 허락까진 받지 않았는데.”
태평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곁에 리베흐가 총총 다가와 함께 앉았다.
“쥬다스 님도 무단외박하면 황제폐하께 혼나요?”
“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황자로서 살아오면서 한 번도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본 적 없는 그였다.
당연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도 없었다. 그저 추측해서 답했을 뿐인데 리베흐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우아! 쥬다스 님이 혼날 수도 있다고 하니까 되게 이상하다.”
엉뚱한 부분에서 놀라는 리베흐였다. 막상 구체적으로 혼나는 상황까진 상상해 본 적 없었던 쥬다스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폐하께 혼나게 되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긴 하구나.”
“있지, 있지! 폐하께선 한 번도 화내신 적 없어?”
“글쎄. 적어도 내 앞에선 없었던 것 같은데.”
애초에 그들 부자지간은 면담하는 상황 자체가 적었다. 황제가 그를 사적인 자리에 불러내는 경우는 무언가 따로 일을 시키거나 그 일에 대한 경과 보고를 들을 때 정도였다.
삭막하다 못해 가뭄 든 논처럼 건조하기까지 한 관계였으나 거기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그는 그저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귀를 축 늘어뜨린 채 발치에 앉아 있던 루니가 그런 그를 토닥거리듯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문득 정령계에서 정령들을 만나 대화했던 때를 떠올린 바이칼이 묘한 눈으로 푸른 늑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저 개…… 같이 생긴 분이 물의 정령왕이라 이거지?’
뭔가 어감이 좀 이상했지만 정말로 바이칼의 눈에 루니는 커다란 개처럼 보였다.
깊고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털에 유리알 같은 맑은 눈동자, 그리고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물거품이 마치 너울거리는 바다를 온몸으로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잘 실체화를 시키지 않아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저렇게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시선이 사로잡히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정령은 계약자가 죽어야만 자신의 계약자를 바꾼다.’
아무리 정령에 대해 무지한 바이칼이라도 그 정도 상식은 알고 있었다.
정령의 계약자는 오로지 한 명뿐. 먼저 계약했던 술사가 죽지 않는 이상 멋대로 파기하고 다른 계약자에게로 옮겨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흐응. 쟤가 또 루니 널 열렬히 바라보는데?」
묘한 시선을 알아차린 유니가 킥킥대며 루니의 콧등에 내려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푸른 늑대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자리에 엎드렸다. 귀찮음을 잔뜩 담은 콧김이 푸릉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 바이칼이 심각한 표정으로 추리를 이어갔다.
‘그렇다는 건 세간에 알려진 정령왕의 계약자…….’
4속성 정령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대현자 이그레트는 이미 사망했다는 뜻이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바이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쥬다스를 휙 돌아보았다.
“설마!”
“응?”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전하, 저번에 미처 여쭙지 못했던 게 하나 있습니다.”
바이칼은 진지하게 운을 떼었다.
“그 개 같은 정령…….”
크르릉.
푸른 늑대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지자 그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이 아니라, 루니 님과 쥬다스 님이 계약하셨다는 건 ‘이그레트’가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뜻이 되는 거죠?”
“…….”
참 애매했다. 쥬다스로서는 기다 아니다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이그레트’는 분명 죽었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에 없진 않았다. 기묘한 딜레마에 빠진 그가 침묵하자 바이칼이 흥분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그의 제자라고 알려진 코르토반 옌과도 유독 친해 보이시고요.”
“으음. 친하긴 하다만.”
“또한 자연의 사랑을 받았다는 그와 마찬가지로 자연계 4속성 정령을 모두 다루고 계시죠. 그렇다는 건.”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추리에 그동안 관심 없어하던 푸른 늑대의 눈동자도 스르륵 그를 향해 움직였다.
“설마 전하께선…….”
바이칼은 틀림없다는 확신을 담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대현자 이그레트의 숨겨둔 진짜 제자?!”
“…….”
「…….」
홀로 신난 바이칼을 사이에 두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응, 그거 아니야....(..)
헉 방금 눈앞으로 모기 한마리가 슥 지나갔는데 벌레공포증이 있어서 때려잡질 못했네요.ㅠㅠ 에프킬라를 손에 들었을 땐 이미 모습을 감춘... 으아아아 모기 네이놈(들)!!
...라고 치는 사이 또 바로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나길래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바람을 훅 불었더니 그대로 날아서 도망갔네요 ㅠㅠㅠㅠㅠ 아이고 멍청한 ㅁㄴㅇㄹㅇㄴ아이고;;
근데 바로 눈앞에 모기가 있으면 그 사이즈가 되게 커보입니다.ㅠ 징그러워요. 큽... 는 변명이군요. 여러분 모기는 보이면 바로 때려잡읍시다.ㅠ...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