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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첫눈
사람이고 정령이고 나눌 것 없이 모조리 황당함으로 물들어 침묵하는 가운데 정작 의혹을 받게 된 쥬다스만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즐거워 보이는 웃음소리에 이번엔 모두 황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의혹을 제기한 바이칼은 얼떨떨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 음. 아닙니까?”
“그래, 아니야.”
즉시 단호한 부정이 돌아왔다. 쥬다스는 여전히 웃음기를 거두지 못한 채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것 참. 내가 제자라니……. 제법 재미있는 발상이구나.”
「사람은 모름지기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법이라며. 그런 의미에선 맞지 않을까?」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유니가 손가락으로 녹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바이칼의 가설을 지지했다.
「그럼요. 누구나 과거라는 스승 하나쯤은 가지고 있잖아요?」
「오왕. 뭔가 철학적이다요!」
「토니 네가 철학적이라는 말뜻도 알고 있어?」
「무시하지 마라요. 인간들이 사용하는 어려운 말은 잘 모르긴 하지만 어려운 말이 뭔지는 안다요!」
「……뭐라는 거야. 네 말이 제일 어려워.」
진지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동조가 정령들 사이에서 쏟아졌다.
쥬다스는 그 시끌벅적한 의견에 흔들리지 않고 잔잔히 말을 이었다.
“네 추측 중 일부는 맞았다, 바이칼. ‘이그레트’는 죽었지.”
“이럴 수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긴 했지만 쥬다스에게서 다시 존경하던 위대한 현자의 죽음을 듣게 된 바이칼은 충격에 휩싸였다. 마치 확인사살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하나 그는 제자를 거두지 않았다. 코르토반 옌이 제자가 되기를 자처하긴 하였으나 실제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어.”
“예에? 잠깐만요, 전하.”
“그러니 나 역시 그의 제자일 수 없다.”
콜은 진정으로 스승을 존경하고 섬겼으나 힘과 지식, 지위 전부 스스로 노력하여 맺은 열매였다.
이그레트가 어렸던 코르토반 옌에게 준 것이라곤 고작 그 주변을 맴도는 정령들에 대해 알려준 정도였다. 정령이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대해야하는 건지 정도는 눈대중으로 보고 배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스승노릇을 한 적이 없었다.
‘콜이 들으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도대체 뭐가 스승이란 말인가. 심지어 그 어렸던 꼬마를 홀로 남겨둔 채 세상을 등지고 달아났으니, 자신에겐 스승자격이 없다. 그는 그리 여겼다.
“다만.”
선명한 빛을 담은 맑은 금안이 바이칼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이그레트’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혹 이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 있느냐?”
“…….”
“너희들이 묻는다면 가감 없이 사실만을 알려주도록 하마.”
엄청난 이야기를 입에 담으면서도 그의 태도는 변함없이 차분했다.
그는 아이들이 바란다면 기꺼이 이 자리에서 그 자신이 이그레트 본인이란 사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이미 ‘쥬다스’와 ‘이그레트’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언급한 상태였다.
딱히 숨기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단지 자세한 사정을 밝혀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궁금해한다면 알려줄 수야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이렇다 할 상상이 가지 않았다. 믿지 않을 수도 있고 혐오감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게 될지도 몰랐다.
이건 그간 쌓아온 믿음과 별개로 사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따른 반응이었으므로 함부로 확신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쥬다스는 그들이 어떤 반응을 하든지 상관없었다. ‘이그레트’는 자신의 한 부분이 맞았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그를 받아들이지 못해 깨질 관계라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 지나간 건지 이해하지 못한 리베흐만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세 사람을 둘레둘레 쳐다보았고 나머지는 각자의 이유로 상념에 잠겼다.
꽤나 긴 침묵이 흐르고 난 후 바이칼이 머리에서 손을 내리며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전하. 저는 말입니다.”
사실 묻고 싶은 건 많았다. 제국 1황자로 태어난 쥬다스가 오래전 행적을 씻은 듯이 감추어버린 위대한 정령술사와 도대체 어떻게, 또 어떤 접점이 있었단 말인가.
바이칼뿐 아니라 묵묵히 서 있던 에단도 그에 대해서는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그 의문을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그건 쥬다스가 굳이 먼저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궁금하긴 한데요.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궁금한데 굳이 알 필요는 없다?”
“옙.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한밤중에 허기가 진 느낌 정도일까요?”
바이칼은 본인이 실제로 종종 겪는 현실적인 갈등을 예시로 들었다.
“어휴, 끼니때도 아닌데 배가 고프다고 해서 굳이 뭘 챙겨먹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오히려 밤중에 잘못 먹었다가 소화가 안 돼서 탈날 수도 있는 거고요.”
“맞아. 나 밤에 쿠키 먹고 잤다가 얼굴 부은 적 있어.”
“역시 그렇지?”
중간에 끼어든 리베흐를 보며 바이칼이 씩 웃었다.
“그리고 뭐, 꼭 알아야 하는 거라면 전하께서 진작 말씀하셨겠죠.”
“흠. 에단,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에단은 그저 묵묵히 선 채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쥬다스에게 무언가를 물을 생각이 없었다.
“과거에 어땠는가보단.”
시선을 받은 에단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전하께서 어떠하신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바로 당신이 우리에게 알려준 진실이니까요.’
언제나 그랬다. 과거에 못살게 군 바이칼도, 낮잡아보고 냉대했던 크리스티나도, 이용하고자 접근한 마르젠도 전부 지금은 그의 신뢰를 받는 동료들이다.
노예였던 수인족 소녀조차 지금은 수많은 사람에게 열광받는 가수로 키워냈다.
그건 잘못을 용서한다는 개념과는 좀 달랐다. 쥬다스는 그들이 자신에게 보인 태도로부터 상처입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저 곁에서 자신을 보여주며 천천히 가치관과 태도를 변화시켜주었다.
진실을 알 기회를 주었는데도 거절하는 두 친우를 보며 쥬다스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상관없는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저 태연함은 자신이 주로 보이던 태도였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그런 태도를 취한 적은 없었기에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그들은 서로 닮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종소리가 울렸다.
뎅― 데엥―
엘리시움 가장 높은 곳에 달린 거대한 종, ‘알리’가 울고 있었다.
알리는 교황청 전역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큰 소리를 냈는데 한번 울릴 때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작은 종들이 함께 연달아 딸랑딸랑 합창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웅장하고 경건하던지 일행은 하던 대화도 잊고 멍하니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기 천사가 그려진 창문 밖으로 붉은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알리는 총 12번을 울렸다.
“‘알리’? 저거 새해가 왔을 때나 울리는 신성한 종 아니었습니까?”
바이칼의 말이 끝나자마자 예배당 문이 거칠게 벌컥 열렸다.
“저, 저, 전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뛰어온 사제 하나가 쥬다스에게 급히 비보를 전달했다.
“교황 성하께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 같은 낯빛이 떠올랐다.
“승하하셨습니다.”
* * *
교황 ‘노아 H.에세키엘’이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아직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고 건강에 별다른 이상신호도 없었던지라 세간의 충격은 더욱 컸다. 루바르잔은 신성을 믿는 국가였고, 따라서 황권과 신권이 양립했다. 교황의 죽음은 곧 황제의 죽음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위그드라실이 부탁한 게 이런 거였구나.’
오늘 밤은 이곳을 떠나지 말아 달라 부탁했던 성녀를 떠올린 쥬다스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신성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강한 신성력을 가진 존재 중에서는 예언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마도 성녀 위그드라실은 교황의 수명이 다했음을 예지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진명식은 중지됐다. 진명을 받기 위해 찾아온 학생들을 비롯한 모든 손님이 교황청에서 나가야만 했다.
지금 엘리시움에 남은 사람은 성녀와 사제들, 그리고 성녀의 부름을 받은 쥬다스 일행뿐이었다. 그들과 같이 있던 리베흐는 시무룩한 얼굴로 아슬란과 함께 먼저 학교로 돌아갔다.
성녀의 요청에 따라 교황청에 남은 쥬다스는 두 수하를 데리고 대예배당에 들어섰다.
“오, 신이시여.”
그곳엔 벌써 많은 사제가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쥬다스는 그 행렬의 끄트머리에 선 채 침묵을 지켰다. 섣불리 위그드라실에게 다가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앞에 경건히 무릎 꿇은 상태였다.
「하여간 인생사 정말 알 수 없네.」
유니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신의 사랑을 받는 성스러운 인도자잖아. 그런 교황이.」
그녀의 보석 같은 연두빛 눈동자가 유리관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사령의 표식에 당할 줄이야.」
교황청에서 사건이 터진 즉시 모든 외부인을 쫓아냈기 때문에 이는 아직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사인(死因)이었다.
유리관 안에는 숨을 거둔 교황의 시신이 하얀 꽃과 함께 안치되어있었다. 월계수 관으로 덮어놓은 이마에는 성스러운 잎사귀로도 가릴 수 없는 선명한 검은 표식이 남아 있었다.
이를 본 쥬다스의 금안이 짙게 가라앉았다.
‘팔각의 검은 별.’
유니가 말한 대로 사령을 상징하는 표식이었다. 물론 표식이 떴다고 해서 교황이 사령과 계약한 건 아니다.
사령술사의 말로는 숨을 거둠과 동시에 산산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영혼부터 육신까지, 그 티끌만큼의 흔적도 용납하지 않고 모조리 사령에게 빼앗기는 것이다.
죽은 뒤 그 시신에 표식이 새겨졌다는 건 그가 침범해 오는 사령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교황은 신성력이 가장 강한 인간 아니다요? 근데도 어떻게 당할 수가 있다요?」
“사람의 마음은 약하니까.”
쥬다스는 눈을 감으며 작게 답해주었다. 아무리 강한 존재에게 가호를 받는다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약한 부분을 함께 가지고 있다.
사령이 어떤 방식으로 교황에게 접근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황을 욕할 수는 없었다.
교황도 결국 인간이다.
‘그간 홀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는 속으로나마 교황을 위로했다. 진명을 받던 날, 교황은 그의 진명인 ‘Egret’를 함께 목도했다.
그 즉시 교황은 그의 정체를 꿰뚫어보았고, 아무도 모르게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그대에게.>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짤막하게 고개를 숙인 것은, 교황이 표할 수 있는 최대의 예우였다.
<빛의 영광이 함께할지라.>
그날 교황은 강한 신성을 담아 그를 축복했다.
교황의 축복을 기억한 쥬다스는 그 자리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따라 에단과 바이칼도 함께 무릎을 꿇고 숨을 거둔 교황을 향해 애도를 표했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기도를 올리던 위그드라실이 손을 뻗어 차가운 유리관을 매만졌다.
늘 정갈하게 묶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잔뜩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녀린 어깨가 잠자리날개처럼 떨렸다.
“노아…….”
인간과 달리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성녀 위그드라실에게 어릴 적부터 돌보아온 교황은 마치 자식 과도 같았다.
숨을 거둔 교황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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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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