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27화 (22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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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첫눈

교황의 장례는 7일간 이어졌다. 장례를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신도들이 바친 촛불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장성(長城)을 이룰 정도였다.

애도의 물결에는 루바르잔 황제와 그의 후계자도 섞여 있었으며 타국에서 온 신자도 많았다. 근간 예정되어 있던 모든 행사가 취소되었으며 전 대륙이 숨을 죽이고 루바르잔을 주시했다.

신성을 인도하던 자의 죽음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마냥 애도만 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입단속을 한다 해도 교황의 죽음에 얽힌 충격적인 진실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고개 숙인 사람들의 귀를 타고 불온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황이 사령술사에게 살해당했다더라.’

‘사망 직후 저주받은 검은 별의 표식이 남아 있었다지.’

‘신의 대리자가 사악한 영에게 패하다니!’

‘인간은 결국 사령에 먹히고 마는 게 아닐까?’

교황이란 신권의 최상위층에 있는 존재. 그런 이가 사령의 표식을 남기고 죽었다는 건 황제가 적장의 손에 목이 베였다는 것과 비슷한 충격을 일으켰다.

감추지 못하고 새어 나간 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맙소사. 신성력이 그렇게 충만하셨던 분이셨는데도.”

“세상이 망해가는 징조가 아닐까 싶군.”

대성전에 모인 귀족들이 제국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곱씹으며 혀를 찼다.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말세의 징조라 떠드는 이들도 있었다.

“말세가 다가오니 신께서 인간을 포기하셨는지도 모르지.”

한번 불씨를 지핀 혼돈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짙어지기만 했다. 심지어 신을 의심하는 불경한 언사도 서슴지 않고 튀어나왔다.

추모를 위해 장식 하나 없이 깔끔한 검은색 복식을 갖춘 쥬다스는 고개를 돌려 술렁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검은색과 대조되는 깨끗한 은발로 인해 그의 움직임은 유독 눈에 띠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금안과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기도하는 척 두 손을 모았다.

“…….”

한차례 성전 내부를 훑어본 그는 그런 술렁임을 읽고 천천히 꿇었던 무릎을 폈다. 길게 늘어진 검은색 후드케이프가 가볍게 펄럭였다.

그가 돌아서자 수군거림이 딱 멈추었다. 무겁고 침울하게 울려 퍼지는 레퀴엠만이 천사의 중얼거림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쥬다스는 무릎 꿇은 사람들 사이로 홀로 역행했다. 오늘만큼은 사제들도 흑색 제의를 입은 채 촛불을 들고 있었다.

그가 다가오자 사제들은 고개를 숙이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막 문이 열리던 차에 쥬다스가 입을 열었다.

“신성이 더 이상 너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작지만 숨 막히는 침묵 속에 엎드린 사람들의 귓가로 파고들기엔 선명한 음성이었다.

“두렵더냐.”

“……!”

기도하는 척 손을 모았던 귀족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차기 군주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고요한 질타에 압도되어 있던 군중 틈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외람되오나 전하. 최근 사령에 관한 망측한 입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발언한 자는 쥬다스의 시선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쉬쉬하기 바쁜 귀족들 중에서 그나마 용감한 발언자였다.

“블레어 J.루드 백작입니다.”

남자는 약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이제 막 가문을 물려받은 젊은 수장이었다.

주름살 하나 없이 둥근 이마처럼 청년의 가슴속은 패기와 열정으로 팽배했다. 쥬다스가 계속 해보라는 눈으로 응시하자 블레어는 곧장 말을 이었다.

“사령술사들이 이제 조직을 갖춰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으셨겠지요. 제네럴급 사령술사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파멸할 자들이 아닙니다.”

해동에서 알려온 프리드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희망을 선사해 주었다.

투르케 주민을 비롯하여 그에게 고향과 가족을 잃고 절망했던 자들, 그리고 제네럴급 사령술사의 출현에 겁먹고 떨던 이들이 소식을 듣자마자 일제히 환호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독사입니다.”

하지만 블레어는 그것이 끝이 아님을 단호히 주장했다.

“그것도 평범한 독이 아니라 신의 가호를 뚫어버릴 정도로 무서운 맹독을 품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패하실 정도이니 오죽 강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머리 하나가 죽어도 독사굴에 남은 뱀들은 우글거리고 있겠죠.”

몇몇 비위 약한 귀족이 그 묘사를 듣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반면 쥬다스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한 블레어가 순간 멈칫거렸다.

“……현재 우린 그 굴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독니로 사람을 물지 알 수 없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젊은 수장의 눈으로도 쥬다스는 아직 어렸다.

그는 황태자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사령의 무서움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사령술사의 무서움을 실감나게 표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루드 백작.”

쥬다스는 부드럽게 그를 호칭했다.

“그대는 뭔가 착각하고 있군.”

“예……?”

“만일 굴에서 독사가 전부 사라진다 하여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독사가 아니라 독사가 물어다주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착각.”

독사가 사라져 봤자 또 다른 굴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독이 있으니 독사가 두려운 것이지. 한낱 말장난일 뿐이잖나!’

블레어는 도무지 그 말만 듣고 납득할 수 없었다. 오히려 농락당한 사람처럼 황태자에 대한 실망감이 차올랐다.

그가 보기에는 당장 만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독사를 제거함이 옳았다.

“하오나 전하!”

“두 번째 착각은 고(故) 교황께서 사령에게 패했다는 것이다. 인간 ‘노아 에세키엘’은

죽음을 맞았으나.”

무언가 반박하려던 블레어의 서두가 강제로 뚝 잘렸다. 불만스럽게 고개를 치켜든 젊은 백작을 향해 쥬다스가 고압적으로 명했다.

“신께서 사령보다 약하기 때문이라고는 착각하지 말거라.”

혹은 신이 인간을 버렸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는 건 스스로의 몫이며 나라를 지키는 건 다스리는 자의 몫이니.”

신은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어여삐 여기나 그렇다고 왕으로 군림하는 건 아니다.

신은 신으로서 사랑을 나누어줄 뿐. 그리하여 인간은 신성을 섬기지만 그와 별개로 위기를 이겨낼 주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신은 인간과 나라의 존망에 그 어떠한 책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말에는 공포를 갖되, 신을 의심하거나 원망하진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신에게는 그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언뜻 매정하게까지 들리는 말을 남긴 채 쥬다스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떼어 열린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철컹!

사제들이 열어주고 있던 두터운 철문이 도로 굳게 닫혔다.

황태자가 자리를 떠나자 엎드린 이들이 고개를 들고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사제들도 당황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게 된 블레어는 참고 있던 숨을 훅 내뱉으며 생각했다.

‘다스리는 자의 몫이라는 건, 전하께서 이 일을 직접 해결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단순하게 상황을 축소하면서도 그 책임의 소재를 교황청에서 황실로 넘겼다.

블레어는 황태자가 풍기던 위압감을 다시금 떠올리며 소매를 걷었다.

‘마르젠 그 친구가 입이 마르게 칭찬한 재목답군. 뭐, 차기 군주께서 나서신다는데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면 귀족 자격 박탈이지.’

걱정과 불만이 가득했던 입가에 어느덧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 *

쥬다스는 대성전을 나오자마자 길게 한숨을 뱉었다. 부쩍 추워진 날씨는 내쉰 숨을 따라 하얀 입김을 그려냈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숨결 너머로 잔뜩 구름이 껴 흐려진 하늘이 보였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에단.”

바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두 수하가 가까이 다가왔다. 쥬다스는 대답 대신 그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추모식이 조금 늦게 끝나긴 했지. 둘 다 오래 기다렸겠구나. 춥진 않았느냐?”

“크으, 말도 마십시오. 날씨 완전 미쳤습니다.”

“……바이칼, 전하 앞에서 교양 없는 말투는 지양하도록.”

에단이 주의를 주었으나 바이칼은 덜덜 떨리는 팔을 스스로 쓰다듬으며 재차 투덜거렸다.

“거 단장은 왜 맨날 표현의 자유를 막습니까? 과언이 아니라 정말로 날씨가 돌았어요. 어씨, 아직 초겨울인데 입김이 어는 게 말이 되냐고요!”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수하를 보며 에단은 이마를 짚었고 쥬다스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세 사람 중 가장 옷을 두껍게 껴입은 건 추위와 더위에 모두 약한 바이칼이었다.

그는 검은색 롱코트에 목도리까지 칭칭 감다시피 입어놓고도 호들갑을 떨어댔다.

“으아아! 저 찌뿌듯한 하늘 좀 보십쇼. 이러다 눈까지 내리겠네요.”

‘눈이라.’

쥬다스는 흘끗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이칼이 한 묘사대로 하늘이 정말 찌뿌듯해 보였다.

당장 눈이 내려도 이상할 것 없는 날씨에 잔뜩 흐려진 하늘.

그는 예전부터 눈 오는 날을 무척 좋아했다. 햇살도 삼킨 잿빛 구름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잠시 그리운 감성을 떠올렸다.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가.’

딱히 눈이 온다고 해서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눈만 오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늙어 홀로 살 무렵에는 눈 오는 날 흔들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아마도 눈이 온 세상을 솜이불처럼 덮은 날. 함박눈이 펑펑 내린 그 날, 보랏빛 눈의 아기는 하얀 눈밭에 버려졌다.

고향이 정확히 어딘지 모르던 그에게 있어 눈 내리는 날은 흡사 고향과도 같은 친근감을 주었다.

“첫눈 오는 날은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옛말이 있단다.”

“어? 정말입니까?”

추위에 몸서리치던 바이칼이 그 말을 듣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의 코트 안에 폭 파묻혀 함께 오들오들 떨고 있는 플루비 탓에 그 모습이 꼭 새끼를 품에 안은 어미 곰처럼 보였다.

“오호라, 그렇다면 혹시 곧 새 교황 성하라도 정해지는 게 아닐까요?”

“그럴 리는 없다.”

에단이 칼같이 바이칼의 추측을 부정했다.

“차기 교황은 아직 후보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그 후보를 정하고, 후보 사이에서 다시 또 적합자를 계시 받아야 한다.”

황제와 다르게 교황은 핏줄로 그 자리에 앉는 직위가 아니다.

사람의 눈으로 먼저 신성력을 판단하고, 신의 계시를 통해 최종적으로 가부를 결정한다.

계시를 받는 인원은 교황이 직접 임명한 주교 열한 명으로, 그들은 교황과 성녀 다음으로 가장 강한 신성력을 가졌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선 교황은 공석으로 유지된다.

명맥대로라면 제 명을 다하기 전 후임을 미리 선출해 놓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사령에 의해 살해당한 이 경우엔 교황이 지목한 후임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과정이 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너무 일러.”

“어이쿠. 성전 일은 뭐가 그리 복잡하답니까?”

“첫눈이 올 시기도 아니다.”

에단은 검을 정교하게 다루기 위해 착용하고 있던 손등장갑을 벗어 맨주먹으로 찬 공기를 가볍게 훑어 쥐었다.

“온다면 진눈깨비 정도겠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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