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28화 (22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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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첫눈

그 말을 들으며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던 쥬다스는 문득 에단이 차고 있던 검으로 시선을 향했다.

‘검에서 빛이……?’

두 개의 검 중 하나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쥬다스가 유의 깊게 검 쪽을 바라보자 에단도 그 눈길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검에 손을 올렸다.

빛을 내고 있는 건 투명한 얼음으로 만들어진 사령검, ‘레이야’였다. 검집에서 뽑아 들자 검신과 함께 눈이 얼얼해질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 주변까지 푸르게 물들였다.

“빛나는 검이라니! 휘두르면 섬광마법처럼 눈뽕 효과를 얻을 수 있겠네요.”

“눈뽕?”

“그 왜, 강렬한 빛 때문에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는 효과요. 그걸 노리신 겁니까?”

“아니다.”

바이칼이 우스갯소리를 던져 보았지만 에단은 그 와중에도 칼 같은 단호함을 유지했다.

“그럼 그 눈뽕검은 뭡니까?”

“…….”

사령검이 갑자기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건 조금 전부터였다.

평소에는 그냥 얼음장처럼 차갑고 투명할 뿐 이렇게 빛을 번쩍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에단이라고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근처에 사령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모양이구나.”

의문을 풀어준 건 그 사령검을 직접 에단에게 맡겼던 쥬다스였다.

그는 푸른빛으로 번뜩이고 있는 사령검을 살며시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우우.

마치 검이 울기라도 하듯 부르르 떨렸다.

“이 아이는 본래 사령이었으니까. 아마도 근처에 동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모양이야.”

“……살아 있는 겁니까?”

“글쎄.”

살아 있다고 표현하기엔 좀 애매했다.

에단이 쥐고 있는 사령검은 검의 형태를 취한 소녀의 영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벌이 달콤한 꽃향기에 끌리듯 사령의 기운에 반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쥬다스는 그에 대한 설명을 아꼈다.

의도적으로 레이야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바이칼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 쓸어 넘기며 헛기침했다.

“크흠, 동류라면 사령이 지금 근처에 있다는 거죠? 설마 또 제네럴급 사령술사가.”

“그건 아닐 게다. 지금은 이곳을 지탱하는 힘이 약해졌을 테니 누구든 침입하기 쉽겠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바이칼은 그간 강대한 교황의 힘으로 지켜지던 많은 부분이 무너져 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습격을 노린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같은 생각을 한 에단이 신중하게 사령검을 응시했다.

‘지난번에 사령술사들과 대치했을 때에는 이런 반응이 없었는데.’

그의 기억으로는 해동에서 사령에게 잠식된 신수들을 상대로 싸울 때엔 이렇게 빛나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 무언가 계기가 되었거나 특별히 반응하고자 하는 대상이 따로 정해져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세한 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당장 문제는 사령이 습격하고자 하는 대상과 이유 모두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교황이 사라져 결계가 약해졌다 하더라도 성전 엘리시움에는 아직 성녀가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교황의 장례를 위해 황족과 귀족이 방문한 상태라  평소보다 훨씬 보안이 철저해진 상태였다.

이 타이밍에 정면승부로 덤벼와 봤자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뛰어드는 나방 꼴이나 다름없다.

그는 사령에게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만큼 중요한 목적이 이 교황청에 남아 있는가를 검토했다.

‘……남아 있는 성녀를 노리는 건가.’

교황을 죽여 혼란에 빠뜨림에 이어 아예 신권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이라면 놈들의 다음 목표물이 성녀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하. 위험할지도 모르니 궁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마침 좋은 기회로구나.”

“……?”

잠시 멈칫한 에단이 이내 주인이 하려는 바를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전하……!”

“독사를 잡으러 독사굴로 들어가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기어 나와 주었으니 말이야.”

블레어 J.루드 백작이 했던 비유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쥬다스를 본 에단이 간곡히 말리기 시작했다.

“사태를 성전에 알리고 물러서시는 게 좋겠습니다.”

“굳이 따로 알리지 않아도 위그드라실이라면 이미 사령의 기운을 눈치챘을 게다.”

“하면 전하께오선 서둘러 피하시는 편이.”

“아니, 나는 지금부터.”

쥬다스는 어떻게든 발길을 돌리게 하려는 수하의 노력을 부드럽게 허물어뜨렸다.

“이 성소에 침입한 사령술사를 찾아갈 생각이다.”

도망은커녕 제 발로 찾아간다는 포부였으나 그걸 듣고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쥬다스의 돌발행동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두 수하의 얼굴에는 놀람보다는 곤욕스러움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건 교황청만의 문제가 아니다. 등 돌려 도망가야 할 일은 더더욱 아니지.”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포기는 빨랐다. 기사로서 주군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거듭 만류하였을 뿐 학생시절부터 그 곁을 지켜온 에단은 쥬다스가 쉽사리 고집을 꺾지 않으리란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다.

에단은 그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끝끝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만 전하께서 무탈하셔야 나라의 우환도 거둘 수 있음을 잊지 마시옵소서.”

“원 녀석도. 젊은 나이에 벌써 세상 다산 늙은이마냥 걱정이 많구나.”

“전하.”

“알겠다, 알겠어.”

순식간에 잔걱정 많은 어르신 취급을 받게 된 에단이 차마 내뱉지 못한 한숨을 속으로 푹 삼켰다.

그들은 더 시간을 소요하지 않고 곧장 사령검이 빛을 발산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목적지는 어느 낡은 예배당이었다. 엘리시움에는 대성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예배당이 많았지만 모든 건물을 사용하는 건 아니었다.

불이 켜진 건 주로 사용하는 건물들 뿐, 나머지 오래되고 자그마한 예배당은 찾는 이가 없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기 일쑤였다.

간혹 수습사제들이 청소를 하러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찾지 않는 그런 장소.

쥬다스는 지금 찾아온 건물이 공교롭게도 5년 전 프리드를 만났던 건물과 같은 예배당임을 알아차렸다.

“……여긴.”

당시 함께 프리드를 만났었던 에단과 바이칼도 그 사실을 눈치챘다.

오래전 일이긴 했어도 워낙 큰 사건이었던지라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단장, 정말 여기가 맞습니까?”

불 꺼진 창문을 기웃거리며 바이칼이 투덜거렸다. 사령검이 인도하는 빛을 따라온 에단도 말없이 창문 쪽을 훑어보았다.

반면 쥬다스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눈앞의 낡은 건물을 응시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비록 어둠에 잠겨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안에 마치 동굴 벽에 붙은 박쥐 떼처럼 시커먼 사령들이 우글거리고 있음을.

“문이 잠겨있습니다.”

겁 없이 먼저 나서서 문고리를 당겨본 바이칼이 쥬다스를 돌아보며 보고했다.

단단히 잠긴 문은 아무리 힘을 줘서 거세게 밀고 당겨 봤자 꿈쩍하지 않았다.

“부수고 들어가시겠습니까?”

명령만 떨어진다면 곧장 문을 박살낼 기세로 에단이 검을 들었다.

그가 쥔 건 빛나는 사령검이 아닌 본래 그가 다루는 애검이었다. 사령과 가까워져 이미 밝을 대로 밝아진 사령검 레이야는 검집에 넣어두었어도 흡사 마법구처럼 번쩍거렸다.

“흠.”

쥬다스는 턱을 짚은 채 가만히 예배당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잠긴 게 아니라 사령의 힘으로 봉해두었어.’

힘으로 억지로 열려고 하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문에 닿자 금속 특유의 서늘한 감촉과 함께 녹이 슬어 끈끈함이 함께 느껴졌다.

철컹!

그때, 별달리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쇳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앞서 문고리를 잡고 끙끙거렸던 바이칼의 표정이 얼빠진 사람처럼 변했다.

“으아니! 왜 저렇게 칼로 버터 자르듯 쉽게 열린 답니까? 무, 문의 상태가……?”

“…….”

에단의 찌르는 듯한 검은 눈동자, 그리고 쥬다스의 손바닥에 의해 가볍게 밀린 예배당 문을 번갈아 쳐다본 바이칼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분명 잠겨 있었는데요. 진짜로요!”

한 뼘 정도 열린 문 틈새를 억울함과 황당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쥬다스가 허허로이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 안에 있는 사령술사가 주술을 걸어놓은 모양이다.”

“주술을?”

“그래. 허가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도록.”

그 말을 듣자 당황은 배가되었다.

“그럼 여기 숨어 있는 사령술사 놈이……. 전하께서 들어오는 건 허가하고, 제가 들어가는 건 거부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옳지. 잘 이해했구나.”

주군으로부터 따뜻한 칭찬을 받았으나 바이칼은 여전히 찝찝해했다.

그가 말문이 막힌 채 입을 다물자 쥬다스도 반쯤 열린 문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캄캄한 어둠이 자리한 예배당 내부는 고작 한 발 들여 넣기도 꺼려질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처음부터 목적은 나와 만나는 거였나.’

목적을 알고 나니 대충 상대의 정체도 짐작이 가능해졌다.

그러자 더 고민할 이유도 사라졌으므로, 쥬다스는 가만히 붙들고 서 있던 문을 힘주어 완전히 열어젖혔다. 텅 하는 금속 특유의 묵직한 울림과 함께 예배당 문이 활짝 열렸다.

구름 낀 하늘에선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고, 따라서 문이 열린 예배당 내부도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밖에서 보이는 거라곤 긴 의자나 불 꺼진 은촛대의 그림자 정도였다.

크르릉.

쥬다스가 그 안에 막 발을 들여놓으려던 순간 루니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계약자의 앞을 막아섰다.

“……역시 감이 좋은 친구들이네요.”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낡은 예배당 안에서 울려 퍼졌다.

꼭 소년소녀성가대가 부르는 찬송처럼 감미로운 음성이었으나 이를 들은 자들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에단과 바이칼은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겨누고 있었으며 쥬다스는 그저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그 자리에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아, 그래도 그렇게 노려보면 무서워요. 당신에겐 그들이 친구겠지만 남들 보기엔 공포소설에 등장하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들이라고요.”

어느 틈엔가 쥬다스의 네 정령이 모두 모습을 드러낸 채로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머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고 자빠졌네요.」

카니가 봄꽃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은 채로 수줍게 볼을 감쌌다.

「사람 영혼에 빨대 꽂아서 쪽 빨아먹는 사령술사 주제에.」

「……옳은 말이긴 한데 표정이랑 행동 좀 일치시켜 줄래?」

유니가 소름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중얼거렸지만 불의 정령왕은 여전히 방긋방긋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어머? 충분히 일치하고 있는데요. 정말 웃겨서 웃고 있는 거예요.」

「정말?」

「그럼요. 타는 쓰레기보다 못한 사령술사 따위에게 화낼 일이 뭐가 있겠어요.」

「으, 응? 그치만 카니 너 점점 입이 험해지고 있는 것 같은…….」

「치워봤자 잊을 만 하면 다시 나타나고. 또 치우면 보란 듯이 또 나타나고. 꼭 겨울철 내리는 함박눈 같아요. 호호호,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역시 화났잖아―!?」

카니가 평소에는 온화하지만 한 번 화나면 입이 거칠어지며 파괴적으로 날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니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유니는 팔짱을 낀 채 난감한 어조로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

「진정해. 뭐 확실히 사령을 보면 짜증 나긴 하지만 못 참을 만큼은 아니잖아. 그치, 루니?」

「그렇군. 이번엔 카니가 과했다.」

평소 중립적인 루니가 모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유니의 의견에 동조했다.

곧 푸른 늑대의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동자가 불만스럽게 불의 정령왕에게로 향했다.

「함박눈이 어때서? 도저히 동의할 수 없군. 겨울에 내리는 눈이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자연현상인데. 당장 취소해라.」

「알았어요. 그럼 가을철 쌓이는 낙엽으로 정정하죠.」

「낙엽이 뭐가 나쁘다요? 가을에 이그레트가 낙엽으로 책갈피 만들면서 기뻐한 것도 모른다요?」

「아, 그런가.」

「저기, 얘들아? 그거 아냐. 그 부분이 문제가 아니라고!」

멍하니 지켜보던 유니가 울상을 지으며 두 팔을 붕붕 내저었지만 누구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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