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29화 (22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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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첫눈

정령들이 쫑알쫑알 떠드는 사이 사령술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이번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을 뿐이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에단이 싸늘한 어조로 반박했다. 날 선 반응에도 상대는 그저 바람 빠지듯 픽 웃었다.

“글쎄요, 증명할 방법은 없는데. 어쨌든 진심입니다. 꿍꿍이를 꾸미려면 제가 왜 굳이 이런 시기에 경비가 삼엄한 교황청까지 바득바득 기어들어왔겠어요?”

“…….”

“들킬 게 뻔한데.”

비꼬는 뜻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입에 담으면서도 별 감흥 없는 어투라 그 점이 더 수상했다.

입을 다물긴 했지만 에단의 검은 눈동자는 더욱 날카롭게 예배당 내부를 훑었다. 그가 쥬다스 대신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뗀 순간, 어둠 속에서 수십 쌍의 붉은 안광이 촛불처럼 화악 모습을 드러냈다.

“단,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상은 거기 계신 황태자 전하.”

번들거리는 사령들의 붉은 눈 사이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한 분뿐입니다. 나머지 분들은 거기서 기다려 주셔야겠네요.”

“헛소리.”

다시금 칼 같은 거부가 돌아왔다. 당연히 에단과 바이칼은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사령술사와 대치를 하면 했지, 쥬다스만 들여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따위 허튼수작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용건이 있다면 지금 말해.”

“그건 곤란하군요.”

“왜지?”

“제가 좀 예민해서요. 낯을 가리거든요.”

상대가 내건 이유는 뻔뻔스럽기까지 했다. 사령술사는 거기에 한술 더 떠 덧붙였다.

“보는 눈이 많으면 말수도 적어지죠.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못하면……. 흠, 아쉽잖아요.”

말투는 태평성대가 따로 없었으나 어쩐지 그 안에서 마치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듯 약간의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에단과 바이칼이 침묵하는 사이 사령술사는 쥬다스에게로 대화의 화살을 돌렸다.

“그러니까 당신과 따로 대화했으면 좋겠네요. 황태자 전하.”

“무슨 그런 억지가.”

“그러마.”

바이칼이 인상을 찌푸리고 따지려는 순간 산뜻한 답이 떨어졌다.

잘못 들었나 싶어 얼떨떨한 눈으로 돌아보는 수하들에게 쥬다스는 가뿐히 쐐기를 박았다.

“마침 나 역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전하!”

경악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으나 쥬다스는 이미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이대로 사령술사와 둘이 대면하게 둘 수는 없었기에 황급히 따라 들어가려던 두 사람의 귓가에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에단, 바이칼. 너희는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그럴 수 없습니다.”

주군의 명에 의해 급한 대로 멈춰 서긴 했지만 단호하기로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저희는 전하의 친위기사입니다. 전하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모처럼 바이칼이 진지하게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언급했다.

쥬다스가 정령왕과 계약한 특별한 정령술사인 것과 별개로 기사라면 당연히 주군의 곁을 지켜야 한다. 위험은 예측된 범위 내에서 찾아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강한 의지를 엿본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음, 직무를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나도 저 아이에게 들을 것이 있어.”

“들으실 것이.”

“그래. 어차피 위그드라실이 곧 사령의 기운을 눈치채고 이곳으로 올 게다. 시간이 얼마 없어.”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고 있는 사령들은 고위개체는 아니었으나 분명 죽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사악한 존재들이었다.

성녀라면 오래 지나지 않아 이 기운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 말에 무쇠 같던 에단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위험인 줄 알면서도 전하의 명에 무엇 하나 불복하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나는 너희의 바로 그 점을 신뢰하고 있다. 뜻에 따라주어 고맙구나.”

“하아.”

애초에 두 사람은 쥬다스가 완두콩으로 스테이크를 만든다 해도 믿고 따를 이들이었다.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명령에 따르고 마는 에단과 바이칼을 향해 쥬다스가 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 그럼 얼른 다녀오마.”

“……알겠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숙여놓고도 안에서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뛰어 들어올 태세로 건물에 바투 섰다.

그런 두 사람을 문 앞에 세워둔 채 쥬다스는 홀로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이, 탁.

누가 밀지도 않았는데 그가 들어서자마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사령들의 숫자는 척 보기에도 수십이 넘었다. 놈들은 오랫동안 굶어 사납게 이를 드러냈지만 그들 앞을 지나는 쥬다스에게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했다.

심지어 그가 가까이 다가온 순간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쥬다스는 사령들로 바글바글 들어찬 긴 의자를 지나 빈 강당에 올라섰다. 커다란 십자가 밑에 죄인처럼 한 소년이 기대서 있었다.

“드디어 만났네요.”

기다렸다는 듯 소년이 그를 반겼다.

“사실은 별 기대 안 했는데. 진짜 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레이야’가 네 기운에 반응하더구나.”

레이야라는 이름을 듣자 소년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불편한 침묵이 강당에 감돌았다.

쥬다스는 쓴웃음을 삼키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할더.”

마지막 남은 과거의 연이었다.

레이야의 영혼이 검에 묶이고, 프리드가 덧없이 소멸해 버린 이후 할더는 목적을 잃어버렸다. 홀로 남은 세상은 아무 색깔 없는 흑백 그림과도 같았다. 단맛도 짠맛도, 쓴맛조차 없는 수박의 흰 껍질만을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할더는 죽어버린 세상에서 단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빛을 떠올렸다.

늘 차분하고 무감정하게 움직이던 소년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 빛을 찾아 달려왔다.

“역시 당신이 맞았군요. 이그레트 님.”

“일부러 부른 것 아니었더냐.”

“제가 부른다고 무작정 달려오실 분은 아니잖아요.”

“왜?”

곧장 따져 묻는 쥬다스를 보며 할더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소년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쥬다스가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재차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느냐?”

“그야 당신은…….”

할더의 기억 속에서 ‘이그레트’는 늘 그랬다. 아이들이 그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하던 일을 제치고 달려오리란 확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그 무엇도 우선순위가 될 수 없으니까요.”

할더는 웃었다. 서운할 일도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이그레트’란 그런 존재였다. 어떤 누구도 그에게 우선시될 수 없고 어떤 무엇도 특별해질 수 없다.

사랑을 받되 태양이 고루 빛을 뿌리듯 공평했다. 사람이 하늘에게 왜 더 많은 빛을 주지 않느냐 따질 수 없듯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이다.”

“……?”

“네가 나를 부른 적이.”

금색 눈동자가 가만히 상대를 응시했다.

순간 할더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식에게 처음 젖을 물려본 어미 개처럼 미묘한 감정이 그 안에 일렁이고 있었다.

“무슨.”

“함께 지낼 적에도 먼저 찾지는 않더구나. 그래서 너희가 날 필요로 하는 줄 몰랐다. 당시 내게 그 정도 눈치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당시에 그는 자신이 거둔 아이들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찾으리라. 그의 힘을 노리고 접근한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소리 내어 표현하지 않았어도 아이들에겐 늘 돌봐줄 어른이 필요했다.

마치 작고 여린 새싹에게도 햇빛이 필요하듯, 그저 그렇게 그가 곁에 있길 바랐다. 서로 간 소통의 부재로 인해 오해는 커져갔고 결국 그들 사이엔 크나큰 균열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추억의 조각 가운데 무언가를 떠올린 쥬다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중에서도 너는 언제나 무엇이든 알아서 잘하는 아이였지. 할더. 레이야처럼 울며 떼쓰지도 않고, 프리드처럼 화를 내고 따지지도 않았어. 그래서 난.”

묻지도 않은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지만 할더는 조용히 그를 경청했다.

“난 네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스스로 잘하고 있었으니까.”

쉽사리 울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는, 언제나 예의 바르고 잘 웃는 아이. 그게 바로 그가 지옥에서 건져 올린 할더란 꼬마였다.

하지만 그렇게 예의 바르고 잘 웃기 위해서 그 아이가 속으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미안하구나. 진작 알아주지 못해서.”

뜻하지 않게 사과를 받게 된 할더가 십자가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정말 어린 소년이었을 적이라면 모를까, 겉모습만 예전 그대로인 지금은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정말 다른 사람이 되셨군요. 쥬다스 전하.”

할더는 그를 옛 이름 대신 현생의 이름으로 칭했다. 그 정체를 알게 된지는 얼마 안 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예전의 ‘이그레트’라기엔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다시 태어났으니 황실의 피를 그대로 이은 생김새는 어쩔 수 없다 쳐도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다.

“다시 물으마. 왜 나를 찾았지?”

“음, 그냥 찾아왔다고 하면 믿으실래요?”

왜인지 웃음이 났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한없이 탁하고 어두웠다. 마치 실낱처럼 흘러나온 한숨과도 같았다.

쥬다스가 가만히 그 미소를 바라보기만 하자 할더는 쿡쿡 웃었다.

“거봐요. 안 믿으실 거면서.”

“많이 지쳐 보이는구나.”

“네. 지쳤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은 거예요.”

할더는 더 지체하지 않고 그를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이 고통뿐인 삶을 당신 손으로 끝내달라고 부탁드리기 위해.”

“허, 맹랑하구나. 죽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이야?”

“사령과 계약한 자는 혼자서 자기 숨통을 못 끊거든요. 정령술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정령과 사령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계약자에게 집착하는 성향이 강하다.

물론 그 이유는 달랐다. 우선 정령은 계약자에게 강한 애착과 유대를 느끼며 정서를 공유한다.

그렇기에 능력이 허락되는 한에서 무조건적으로 계약자를 지키려든다.

반면 사령은 계약자의 영혼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계약이행의 의무에 따라 사령은 계약자를 최대한 죽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호한다.

그리고 계약을 이룬 순간, 혹은 계약자가 계약이행에 실패한 순간 사령은 먹이를 노리던 매처럼 그의 영혼을 강탈해 간다.

어찌 되었든 각각의 이유로 정령과 사령은 계약자가 죽는 걸 결사적으로 막는다. 그러니 술사들은 자살하거나 자해를 저지를 수 없다.

“왜 이제 와서 죽으려는 거지? 너희들에게는 꼭 이루고자 한 목적이 있어 사령과 계약한 것이 아니었나. 그래서 레이야마저 사령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더냐.”

“잘못 알고 계신 게 하나 있네요. 우리가 억지로 그렇게 만든 게 아닙니다. 레이야는 스스로 사령이 되길 택했어요.”

쥬다스의 예상과는 다른 얘기였다.

“그 앤 늘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했죠.”

할더는 십자가에서 등을 떼었다. 형벌에서 탈출한 죄인처럼 홀가분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특히 당신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아시잖아요? 레이야가 얼마나 ‘가족’에 집착했었는지.”

노예였던 소녀는 유독 가족을 갖길 원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프리드가 비틀어 꼬드겼고 결국 처음으로 일탈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 아이는 도리어 하늘을 잃었다.

“당신이 사라진 후, 입버릇처럼 얘기하더군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어쩌면 우리 중 가장 필사적이었던 건 레이야 그 녀석이었을지도 몰라요.”

“…….”

“어땠나요? 당신이 만난 레이야는.”

‘잘못했어요.’

쥬다스는 레이야의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똑똑히 기억했다. 소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꿈결처럼 귓가에 아른거렸다. 사령이 된 소녀는 그를 알아보자마자 잘못을 빌었다.

‘죄송해요. 정말. 정말로.’

‘제발 미워하지 마세요.’

‘……다시 찾아줘서 고마워요.’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열이 끓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차게 얼어붙은 것도 같았다.

그 기묘한 감각을 견디기 어려워진 쥬다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 이 시간에 보시는 분들이 계실 줄은 ㄷㄷ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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