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30화 (23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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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첫눈

우우우우-

짐승 우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렸다.

“수호견이군요. 성녀가 눈치챘나 봅니다.”

“…….”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그래도 이게 마지막인데.”

“…….”

쥬다스가 직접 손을 쓰지 않더라도 성녀가 엘리시움에 침입한 사령술사를 결코 살려둘 리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할더는 고해성사라도 하듯 쥬다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하, 그나저나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당신이 군주가 되는 건 상상해 본 적없는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기다려 볼 걸 그랬나 봅니다.”

“무엇을.”

“개혁이요.”

언젠가 프리드가 그에게 말했었다. ‘악은 악으로 제압해야 가장 효과적’이라고. 애초에 그들은 권선징악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선은 악을 단죄할 생각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용서가 진정한 승리라는 둥 물러터진 주장만을 반복할 뿐이다.

반면 악은 타인을 공격하고 망가뜨리며 불행을 가져다주는 일에 망설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악이 되는 길을 택했다.

“한때 누군가는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 흔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손 놓고 타인의 불행을 구경하기만 하는 지배층을 처단하고 직접 심판자가 되어 죄인의 싹을 뿌리 뽑는다.

과정 중에 희생자들도 속출하겠지만 어차피 가만 놔두어도 닥칠 불행. 그 희생을 양분 삼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면 된다.

그들은 이를 개혁이라 불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작 썩어가고 있었던 건 나 자신이네요.”

할더는 눈높이까지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사령의 그림자가 마치 부화를 위해 태동하는 나방의 유충같이 느껴졌다.

“너무 늦었지만 레이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계속 착한 아이로 남아 당신을 기다렸다면.’

공허한 녹색 눈동자가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꿈이다. 만일 이룰 수 있다면 그건 꿈이 아니라 희망이라 불렸을 것이다.

“이제 그만둘래요. 전부.”

할더는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악마와 계약했다가 신벌을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처럼 모든 걸 포기한 눈이었다.

그때 줄곧 침묵하던 쥬다스가 입을 열었다.

“……네겐 삶이 고통뿐인 지옥이라 했던가.”

“네.”

“그렇다면.”

소년은 웃었지만 쥬다스는 지독히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지옥에 남아.”

생각지도 못한 선고가 떨어졌다. 무감정하게 죽어 있던 할더의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그게 내가 너에게 내리는 벌이다.”

그가 하고자 한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쥬다스는 그대로 돌아섰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돌아가는 발걸음을 멍하니 쳐다보던 할더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만요! 설마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심히 문으로 향하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할더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게 벌이라고? 이런 게?’

웃는 것도 한숨도 아닌 애매한 숨이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듯 터져 나왔다.

끝끝내 돌아봐 주진 않는 자신의 하늘을 향해 소년이 절규하듯 소리 질렀다.

“진짜 바보예요? 난 당신을 배신했어요. 등에 칼을 꽂고 불행으로 몰리도록 채찍질했다고요. 그렇게 당하고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내가 당신을……!”

“아. 그렇지.”

우뚝 걸음을 멈춘 쥬다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맑은 금안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치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갑갑하게 만들었다.

“사령술사라면 같은 사령술사들이 어디에서 어떤 일을 꾸미는지 더 잘 알 테지. 그들의 뒤를 쫓아.”

“무슨.”

“발견 즉시 제거하든, 정보만 알아오든 상관없어. 한 달에 한번 경과를 보고해라.”

이독공독(以毒攻毒). 사령술사인 할더를 사령을 제거하기 위한 발판으로 쓰겠다는 말이었다.

후웅!

당황으로 일그러진 할더의 얼굴 앞에 녹색 바람의 정령이 나타났다.

바람은 마치 밧줄을 묶듯 그의 목을 꽈악 휘감았다. 목이 졸리진 않았으나 단단히 얽힌 바람의 족쇄가 선명하게 피부 위로 느껴졌다.

“‘바람의 구속’이다. 내가 죽거나 해제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풀리지 않는 정령술이지. 따라서 너는 네 원대로 죽을 수도, 끊고 달아날 수도 없다. 두 번 배신당할 일은 없어야 하니까.”

“……!”

“네 스스로 버린 목숨 줄은 내가 가져가마.”

은은하게 빛나던 바람의 끈은 잠시 깜빡거리다 이내 시야에서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할더는 떨리는 손을 들어 제 목을 감쌌다. 바람은 형체를 감췄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개에게 목줄을 채워놓듯 그는 정령의 힘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어째서.’

이유를 묻기도 전에 쥬다스는 이미 예배당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대신에 문이 열리자마자 밖에서 기다리던 에단과 바이칼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안에서 별일 없으셨습니까?”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단다.”

괜찮다는데도 여전히 표정이 굳어있는 두 사람을 향해 쥬다스가 조용히 웃어 보였다.

“보렴. 멀쩡하지?”

에단과 바이칼은 입을 다문 채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상관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는 확신이 든 바이칼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혹시 그 음침한 사령술사 놈이 무슨 짓 했습니까?”

“응?”

“아까 얼핏 들어보니 겁나게 재수 없는 목소리던데요. 짜식이 건방지게 개긴 거 아닙니까?”

“아니. 그저 조금 대화를 나눴을 뿐이야.”

가벼이 손을 저었지만 둘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바이칼은 한숨을 푹 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휴, 표정이 전혀 괜찮지 않으시잖아요.’

다른 이들은 속아 넘어갈지 몰라도, 주군을 모신 지 이제 5년도 넘어가는 그들이었다.

미소라는 가면을 덮어썼다 한들 미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라든가 미처 감추지 못한 창백함 정도는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실제로 상처도 없고 본인이 괜찮다는데 계속 따져 묻기도 어려워 입을 다물긴 했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 하는 의심만 한가득 이었다.

“그럼 지금 저곳에는…….”

“크르르륵.”

바이칼이 낡은 예배당을 힐끗거리며 할더에 관한 질문을 꺼내려하는 찰나 하얀 털의 짐승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심기 불편한 눈으로 그르렁대는 거대한 개를 발견한 쥬다스가 친근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헤브.”

수호견 헤브라시스였다. 쥬다스에게 이름을 불린 수호견은 고개를 숙여 그가 내민 손바닥에 콧등을 비볐다.

“헤브가 하늘을 바라보며 울기에 불순한 일이 있을까 저어하였습니다만.”

당연한 수순으로 성녀 위그드라실이 그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연못가에 내려앉은 학처럼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저 제 기우였던 모양이군요.”

교황의 장례 기간이었지만 성녀는 신성을 상징하는 존재였기에 티 없이 하얀 의상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는 흑색 제의를 입은 사제들이 따르고 있었다.

“나의 소중한 벗이여. 내가 이 성전 안을 들여다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위그드라실은 쥬다스가 등지고 서있는 작은 예배당을 손짓했다.

“어찌 내게 허락을 구하십니까. 이곳은 신의 영역이니 뜻대로 하십시오.”

그가 기꺼이 비켜주자 성녀를 따라 많은 사제들이 함께 예배당에 들어갔다.

혹시 큰 싸움이 일어날까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던 바이칼은 도로 우르르 나오는 사제 무리를 보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쳇. 벌써 달아난 건가?’

고개를 쭉 빼고 예배당 안을 훑어보자 붉은 안광을 빛내던 사령들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다루는 사령술사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고 나온 성녀가 입을 열었다.

“더러운.”

초점 없는 하늘빛 눈동자가 잠시 예배당을 향했다가 다시 쥬다스에게로 돌아왔다.

“먼지가 많이 앉았더군요. 성전을 이리도 소홀히 관리하다니 부끄럽습니다.”

“청소가 필요하겠군요.”

“예. 형제님들께 청소를 부탁해 두었으니 다른 예배당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정말로 예배당 내부에선 몇몇 사제가 청소를 시작하고 있었다.

성녀는 별다른 추궁 없이 남은 사제들과 함께 대예배당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떼었다.

“위그드라실.”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성녀가 가슴께에 두 손을 모은 채 그를 돌아보았다.

“신은 정말로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십니까?”

제국의 황족인 그가 모를 리 없는 기본 교리였다. 성녀는 뜬금없이 그걸 묻는 쥬다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깜빡인 위그드라실이 상냥한 온기를 담아 대답했다.

“네. 누구에게나.”

괴로움으로 물든 금빛 눈동자 위로 먹구름 진 하늘이 비쳤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날씨 속에서 성녀의 기도가 이어졌다.

“사랑스러운 당신께 축복을.”

* * *

쥬다스는 일행과 함께 낡은 예배당을 뒤로 하고 엘리시움의 거리를 걸었다.

그와 마주친 귀족들은 깊이 허리를 숙였으며 사제들도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해왔다. 평소라면 하나하나 부드럽게 응대해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간단한 눈인사 정도로 예의를 차린 그는 거침없이 사람들을 지나쳐 갔다.

도착한 목적지는 포탈이었다. 추모예배도 참석했으니 더 이상 교황청에 머물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 눈 오는데요?”

막 포탈관리실로 들어가기 직전, 바이칼이 하늘을 가리키며 감탄했다.

“허 참. 춥다 춥다 했더니 진짜 눈까지 오네.”

“벌써 눈이 올 시기인가.”

에단도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곤 중얼거렸다.

양탄자처럼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탓에 아직 해가 질 시간은 아니었는데도 어두컴컴했다.

“올해는 겨울이 빠르군.”

“아으, 추워지면 아침에 눈 뜨는 게 두 배로 힘들어지는데. 단장, 오전 훈련 좀 줄여주시면 안됩니까?”

“안 돼.”

“……저기. 단호박이세요?”

두 사람이 떠드는 걸 들은 쥬다스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고개를 들자 막 내려온 눈송이 하나가 그의 볼 위로 내려앉았다.

‘첫눈.’

차갑던 눈송이는 체온에 닿자 몽글몽글 녹아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수줍어하는 여인처럼 예고도 없이 찾아온 눈은 곧 함박눈으로 바뀌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깐 넋을 놓고 서 있는 사이 머리며 어깨 위로 소복이 쌓일 정도였다.

“전하. 옷이 얇으십니다. 이대로 계속 눈을 맞으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에단의 말대로 그들은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나 입는 재질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쥬다스가 걸친 것 역시 후드케이프 형식의 겉옷이라곤 하나 함박눈이 쏟아지는 추위를 막기엔 턱없이 얇았다.

수하들의 걱정에도 쥬다스는 느긋하기만 했다. 그는 여유롭게 눈 내리는 하늘을 좀 더 구경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만 가자꾸나.”

하얀 눈이 그림자진 세상을 차곡차곡 덮어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남기고 간 발자취도, 가을 내내 쌓였던 낙엽들도, 먼지 낀 낡은 예배당도 하얗게 파묻혔다.

그리고 곧 새로운 소식이 제국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교황 서거, 장례절차 이후 사인이 사령술사의 소행으로 밝혀지다.

-루바르잔의 황태자, 사령술에 관련된 모든 증거를 엄중히 검토할 것을 명하다.

-조사 도중, 거대 조직의 뒷심을 마련하던 사령술사 집단이 덜미를 잡히다.

-황태자의 명에 의해 발각된 사령술사 전원 공개처형하다.

찬 겨울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이고 뭔가 수정하면서 올리다보니 텀이 좀 길어졌네요 (..)

이것으로 '26장 : 첫눈' 챕터가 끝났습니다.

다음 편부터 '27장 : 성인식'으로 이어집니다.ㅎ

밤인데도 무척 덥네요. ㅠㅠ 슬슬 여름이 끝나가려나 하고 달력을 봤더니 이제 시작이었다는....부들부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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